20171105 주일
사사기 6:36-40
기드온 이야기
6: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6: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6: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6: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6:40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들어가는 말
성경은 히브리어로 ‘미크라’다. ‘부르다’의 동사형 ‘카라’에서 파생된 명사다. 곧 성경은 우리를 부르신다. 부르심에 응하느냐 거절하느냐, 둘 중 하나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문이 아니다. 잘 사는 법을 알려주는 책도 아니다. 어렵고 힘들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매뉴얼도 아니다. 성경은 ‘그냥’ 하나님의 이야기,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나 등장하는 인물, 사건, 배경에 따른 기록물이 아니다. 저들 이야기, 사건, 상황을 들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신다. 그 부름에 응할 때, 우리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하게 된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 ‘기드온의 이야기’가 있다. 모든 개인의 이야기는 파란만장하다. 사연과 사건과 상황 들이 얽히고설켰다. 어느 인생도 평탄하지 않다. 안온하고 무난한 이야기는 없다. 그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부르심
당시 저들은 타락하여 미디안의 압제에 있었다. 고질적인 불순종과 타락, 징계와 역경, 부르짖음과 회개, 용서와 회복, 그리고 다시 타락과 불순종, 징계와 역경을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특별히 주의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바로잡으신다. 이번엔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6:11).” 저는 주의 부르심에 항의했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13)?” 하나님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14).”
회피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15).” 항변하였던 충정이 나름의 겸손 뒤로 회피한다.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16).” 그러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17).” 의심은 항상 이런저런 요구가 많다.
저는 돌아가 예물을 준비해 바친다.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19).” 이를 가지고 하나님은 저의 요구인 표징을 보이신다. 저가 준비한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어라. 그리고 주의 사자가 손에든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다.
놀라움에 한눈 팔 때, 주의 사자는 떠났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22).” 하나님과 대면한 자는 죽는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23).” 그러자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24).” 살롬은 ‘평강’이란 뜻이다.
의심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37).” 당돌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의치 않고 이를 보이셨다.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38).” 미숙한 믿음은 그때마다 즉흥적인 응답을 주시기도 하신다.
그것으로 미덥지 않았다.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39).” 하나님은 인자하시다.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40).” 개인적인 체험으로 알고 이를 숭배하는 경우가 많다.
기호(嗜好)
저는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을 무찌르고 요단강에 있는 수로를 점령하였다. 저들 두 방백 오렙과 스렙의 머리를 쳤다(7:25). 그런데 남은 전쟁을 이끄는 데 있어, 숙곳 방백들도, 브누엘 사람들도 저를 돕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였다(8:6, 8). 그럼에도 미디안의 두 왕 세문과 살문나를 사로잡아 죽이고 온 진영을 격파하였다(12).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돕지 않은 숙곳과 브누엘 망대를 헐고 저들을 다 죽였다.
저는 전리품으로 두 왕의 낙타 목에 걸렸던 초승달 장식을 떼어왔다. “세바와 살문나가 이르되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하니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지니라(21).” 그럴 수 있다. 기념하여 또는 어떤 의미를 두고. 한데 그것이 훗날 우상이 되었다.
우상숭배
기드온은 우쭐하여 약탈한 물건들 가운데 금고리를 모았다.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8:24).” 이를 가지고 저는 에봇을 만들었다. 긴 겉옷으로 거룩함을 자아낸다. 한데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27).” 저가 사는 40년은 평온하였다(28).
사생활
다들 그런다고 하면, 그 시대는 원래 그렇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기드온의 사생활은 문란하였다.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30-31).” 그 결과는 우리 몫이다. 첩의 아들 아비멜렉의 포악이 극심하였다. 방탕하고 경박한 이들과 어울렸다(9:4). 저가 그들과 어울리며 형제 70을 죽였다.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5).
요담의 비유
형제간의 피의 숙청에서 살아남은 요담이 백성들 앞에 비유로 말한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8-15).” 가시나무인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숲의 어리석은 나무들, 백성을 두고 한 말이다.
아비멜렉의 최후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다(9:23). 에벳의 아들 가알이 선봉에 섰다. 에벳은 종, 노예라는 뜻이다. 결국 민란이 일었다(28). 이에 저들의 봉기를 진압하려 전쟁이 났다(34). 싸움의 끝은 우스꽝스러웠다.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53).” 전장에서 멋지게 전사한 게 아니라 여인의 맷돌 위짝에 맞아 죽게 되었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54).”
나오는 말
기드온으로 시작된 한 편의 이야기는 저의 첩의 자식 아비멜렉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우린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산다. 어디서 언제 성경의 부르심을 받을지! 그 자리가 오늘 여기이길. 혹은 앞섰거나 혹은 이제 뒤따르거나. 한데 성경은 우리의 이야기를 섞으신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누구도 이 땅에 사는 동안 다 이루고 가는 인생은 없다. 그 이야기는 자식으로 이어지고 혹은 곁을 함께 한 친구나 동료로 이어져서 수만 가지의 이야기가 뒤섞이는 듯하다.
저마다 사연이 있고 성격이 다르고 취향이 같지 않다. 누구는 기구하고 누구는 안온하며, 누구는 잘났고 누구는 못났다. 내 이야기에서 저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렇다. 한데 그 모든 이야기는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오늘 기드온의 이야기가 단순히 저의 이야기로만 그치는 게 아니다. 직접적으로는 그 시대에 직계 가족에게 또는 함께 산 동시대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 같으나, 수천 년이 흐른 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누구는 응하고 누구는 거절한다.
누구는 감람나무나 포도나무로 살고 누구는 가시나무가 되어 서로를 찌른다. 어쩔 것인가?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누구는 돈을, 권력을, 명예를 또는 자신의 자긍심을 의지할 테고. 누구는 자연을, 누구는 다른 신을 의지할 테지만. 오늘 택하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우리는 오늘도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그러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만났다. 이전에는 기드온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해도, 이제 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우리를 부른다. 너희는 오늘 택하라. 그에 앞서 여호수아가 우리에게 해주었던 이야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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