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9 주일
사사기 11:1-3
입다 이야기
11:1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11:2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11:3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들어가는 말
사람 일 알다가도 모른다. 일련의 여러 정치 상황을 봐도, 그처럼 나는 새도 떨어뜨릴 듯 하던 사람들이 추풍낙엽처럼 구속이 되고 재판을 받으며 인생 말년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오늘 본문 입다의 이야기도, 하나님이 쓰시면 어떠한가! 인생 반전을 여러 번 목도하게 한다. 앞서 지난 주에 읽었던 조지 뮐러 목사의 이야기를 잠깐 언급해야겠다.
뮐러는 14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불량하게 성장했다. 성적으로 문란했으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16세 때는 절도죄로 복역을 하기도 했다. 거짓말쟁이에 불신자인 그의 아버지는 돈으로 뮐러를 교도소에서 빼냈고, 매질하였다. 뮐러 아버지는 저가 목사가 되면 편하게 살 것이라 여겨 ‘할레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게 하였다. 그런 가운데 뮐러가 하나님을 만나 회심을 하고 남은 평생을 고아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던 삶은 가히 경이롭다.
종종 우리는 되바라졌거나 버릇없는 사람을 보면 ‘싸가지 없다’고 표현한다. 한데 이 말은 사실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싸가지는 싹과 아기를 일컫는 합성어로 ‘싹의 아기’라는 뜻을 내포한다. 그런데 누구를 향해 그리 표현한다는 것은 극도로 심한 경우여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하는 말씀 앞에 걸린다.
곧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하는 말씀에도 위배된다. ‘라가’는 ‘바보’, ‘어리석은’이란 아람어다. 하물며 ‘싹수가 없다’고 상대를 판단하는 일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7:1).”는 말씀과도 대치된다.
어릴 적 뮐러를 보고 누가 알았겠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입다의 경우도 그러하다. 저의 출생과 성장 배경은 기구하다. 저는 기생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본처에게서 난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아버지 집의 가업을 이을 수 없었다. 저는 돕 땅으로 쫓겨가 살았다.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3).”
-반전
‘얼마 후에’ 암몬이 쳐들어와 전쟁이 났다.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4).” 그러니까 누구에게는 불행한 일이 누구에게는 인생 반전을 꾀하는 일이 되기도 하였다. 길르앗의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사정을 한다(5).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6)."
가히 어이가 없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튕길만하다(7). 그러자 다시 매달린다. “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8).”
그러니까 말이다. 누가 한 치 앞을 알았을까?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9).” 다시 말하면 내가 너희에게 왕 같이 되겠느냐? 이런 속셈이다. 길르앗 장로들이 속이 탄다.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10).”
-명분
사실 전쟁은 사람의 일 같으나 그 주관은 하나님이 하신다. 이를 진행하는 데 있어 누구에게 의지하느냐? 무엇을 붙들고 싸우느냐? 하는 대목에서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11).” 저가 비록 돕 땅에 거주하면서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으나 그 중심에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였다.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 모든 걸 아뢸 때, 저에게 더하시는 매우 논리적이고 조리 있는 분별력을 보자.
입다가 쳐들어온 암몬 왕에게 물었다.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하니(12).” 저는 무턱대고 싸움에 응하는 자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감정적으로 치고받을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암몬 왕의 진술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 하니라(13).” 실은 길르앗이 살고 있는 땅이 본래 자기들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자 입다의 논증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광야로 행하여 홍해에 이르고 가데스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이 사자들을 에돔 왕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청하건대 나를 네 땅 가운데로 지나게 하라 하였으나 에돔 왕이 이를 듣지 아니하였고 또 그와 같이 사람을 모압 왕에게도 보냈으나 그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가데스에 머물렀더니 그 후에 광야를 지나 에돔 땅과 모압 땅을 돌아서 모압 땅의 해 뜨는 쪽으로 들어가 아르논 저쪽에 진 쳤고 아르논은 모압의 경계이므로 모압 지역 안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당신의 땅으로 지나 우리의 곳에 이르게 하라 하였으나 시혼이 이스라엘을 믿지 아니하여 그의 지역으로 지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을 모아 야하스에 진 치고 이스라엘을 치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매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그 땅 주민 아모리 족속의 온 땅을 점령하되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와 광야에서부터 요단까지 아모리 족속의 온 지역을 점령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족속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15-23).”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오는 동안 에돔과 모압과 아모리 땅을 좀 지나가자고 할 때 저들이 거절하였고, 그럴 때면 멀리 돌아서 갔으나 시비를 걸고 전쟁을 벌이자고 들면 이를 무찔러서 그 땅을 평정하곤 하였다. 그런 얘기다.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24).”
-서원
듣지 않는 데야 별 수 있나?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였으나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27-28).”
입다는 논리적이었으나 성급하였다. 확신에 찼고 주를 신뢰하였으나 경솔하였다. 전쟁을 벌이기에 앞서 주께 장담하며 서원한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30-31).” 자신한 것까지는 좋으나 지나쳤다. 우쭐했을까? 분에 넘치는 마음은 그게 어떠하든 주의 뜻에 어긋나기 십상이다.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32-33).”
-아이러니
아이러니는 겉으로 드나난 것과 실제의 사이에 드는 괴리다. 다시 말해 예상하지 못한 결과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34).” 이를 어쩌나? 누가 그럴 줄 알았나? 누가 됐든 그런 장담은 그릇되었다.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35).”
이를 두고 지혜자는 말씀하신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자신이 보기엔 확신이 들고 분명한 것 같으나, 그런 게 믿음이 아니다. 곧 우리가 믿는 믿음을 자신의 의지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기곤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건 모두 악하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 같으나 실은 자신의 확신을 믿는 믿음이었다.
나오는 말
저의 딸은 슬기로웠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었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36).” 괜한 희생인 것 같으나 더 큰 교훈을 주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바로 아는 신앙이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마 5:34).” 이를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 5:12).” 함부로 우리의 마음을 확신하거나 이를 신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믿음은 더욱 겸손히 주를 경외하는 일이다. 경외함이란 누누이 함께 살펴본 바처럼 하나님을 바로 알면 알수록 두려워할 줄 알고 그 앞에 나의 마음을 들레지 않는 일이다. 믿음이 유난스러운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경거망동하여 함부로 구는 믿음보다 늘 밍밍하여 미지근한 상태도 위험하다. 오늘 입다 이야기에서 우린 두 가지를 주목할 수 있다. 첫째는 인생 모른다. 앞 일을 누가 알겠는가? 함부로 예단하지 말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섣불리 행동하지 말자.
그리고 온전히 주 앞에 겸손하자. 겸손이란 순종이다. 말씀 앞에 순응이다. 입다의 딸은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아버지 입다의 경솔함 때문에 자신이 억울하게 죽는다고 여기지 않았다. 반항하지 않았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주어진 삶에 충실하였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이치와 판단으로 부당하다 해도, 저는 더 큰 걸 알고 있었다. 곧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아니다. 어떤 상황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본체가 선하심을 말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 143: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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