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사무엘상 13:8-15 / 부득이하여

전봉석 2017. 12. 29. 13:26

20171231 주일

사무엘상 13:8-15

부득이하여

 

13: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13: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3:10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13: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3: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13:15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의 수를 세어 보니 육백 명 가량이라

 

 

들어가는 말

 

살면서 우린 얼마나 자주 부득이하여에 사로잡히곤 하는지 모른다. 모든 변명과 핑계는 부득이하였다는 데서 정당하다. 왜 저들은 끝내 잘못을 뉘우칠 수 없었을까? 회개만 이뤄지면 용서를 약속하셨는데도 이내 저들은 벌을 받으면서도 억울할 따름이다. 죽는 날까지 끝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고 이에 주를 바라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회개가 곧 은총이었다.

 

저들은 왕을 원했고 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삼상 8:20).” 이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7).”

 

인격적인 관계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자유의지란 그래서 겁나는 것이다. 이를 강제하여 막으실 수 있었으나 하나님이 그러실 수 없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저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데도 이를 억압하여 막지 않으셨다. 신약에서 아들이 자신의 분깃을 요구하여 집을 나갈 때 아버지는 저를 저지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묵인하거나 용인하시는 게 아니라 더 큰 선을 이루기까지 인내하시는 것이다. 처음 아담의 타락으로 죄가 이 땅에 들어오고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구원을 성취하셨다.

 

저들은 왕을 원했고 그 고집이 완강하여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져 500여 년 왕을 두고 사는 고로함에 대하여, 더는 어쩔 수 없을 때를 알게 하심으로 메시아 우리의 구세주, 만왕의 왕으로 오시기까지. 참고 또 기다리시기까지 하나님은 긍휼하시다.


사울이 왕이 되다

 

그 날에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어 사울을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다. 사울은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다. 저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미약하였다. 그럼에도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담화하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밝혔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며,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으셨다고 선포하였다.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였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말하였다.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도다 그런즉 이제 너희의 지파대로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 하고 정식으로 이를 추진하였다.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다.

 

그런데 사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저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다(10:22). 그는 용모가 수려하여 보기에도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큰지라 믿음직했다.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그러자 일제히 백성들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불렀다(24).

 

사울의 행적, 저는 경건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였다

 

당시는 주변국들이 끊임없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전쟁이 펼쳐지던 때이다. 사울이 왕이 되어 암몬 사람들을 쳤다. 이어서 블레셋이 일어나 싸움을 하였다. 저는 나름 거룩을 도모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부터 보자. 출정에 앞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어떤 일에선지 오지 않았다. 조바심이 날만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저는 임의로 제사장만이 취할 수 있는 제사를 거행하였다(13:3-18).

 

뿐만 아니라 저는 하나님의 궤를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여 함부로 곁에 두었다(14:16-23). 또는 어처구니없게도 군사들의 성결을 도모하느라 금식을 시켜 기력을 쇠하게도 하였다(24-30). 그리고 함부로 금식하고 맹세하여 군사들의 기력을 쇠하게 한 것도 모자라, 이때 자리에 없던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그 죄가 돌아가도록 하였다(36-42). 겉으로만 보면 저보다 거룩을 도모한 이가 없다. 나름은 의를 자처하였고 구원을 이루는 데 앞장서려 했다. 그러므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뒤였다(51).

 

우리는 경건의 이익을 도모하지 말자.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일갈하였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오늘 본문은 사울이 선을 이루는 것 같으나 이는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 실은 자신의 의를 도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우리에게 두신 은사는 우리 자신이 결정한 게 아니다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12).”

 

저는 왕이라. 나름의 책임감도 있었을 것이다. 백성에 대한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막중한 사명감을 마치 자신의 감투인양 여겼을 것이다. 저는 본인이 말한 대로 별 거 아니었다. 스스로도 안다.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였고 그 중에서도 별 볼일 없는 가문에 속해 있었다. 그러한 열등의식으로 저는 왕으로 임명되며 기름부음을 받아야 하는 순간에 짐짝 뒤로 숨었었다. 좋게 보면 순진하였고 나쁘게 보면 열등의식이 있는 자였다. 그런 자가 거저 받은 은사를 마치 권력인양 휘두른 셈이다.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 하니라(대하 15:7).” 무슨 말씀인가? 그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 ‘알아서 할게.’ 하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한다. 오히려 강한 자는 알아서 하는 자가 아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35:3-4).” 곧 하나님을 의뢰하기 때문에 자신을 나대지 않는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믿음이 강한 자는 스스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왜 그럴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2:9).” 알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 어디서 오는가를 말이다.

 

2. 공명심은 실패의 원인이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8, 11).”

 

공명심이란,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이름을 떨치고 싶다. 보람을 도모하는 것이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한다. 사회는 이를 부추긴다. 이게 왜 나쁜가? 노력한 만큼 공로를 취하는 것은 마땅하다. 열심히 일한 자여 떠나라. 스스로에게 보상을 강요하는 시대다. 욜로족이 자연스러워졌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게 어째서 나쁜가. 누릴 수 있을 때 누리라. 젊을 때 취하라.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실컷 즐겨라. 참 위로가 되는 말 같다. 공명심은 엇나간 감사다. 내가 이만큼 해서 얻은 결과다. 굳이 고마울 게 없다. 마땅한 권리를 요구한다.

 

과연 성경도 같은 생각이실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오히려 반대다. 주신 바 그 믿음의 분량을 마땅히 여길 것을 말씀하신다. 너무 소심한가? 꿈을 크게 가져야 할까? 남들처럼,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게 값어치 있는 인생일까? 그리하여 회환이 없는 삶을 사는 것으로 슬기로운 길일까?

 

누구보다 잘났던 바울 사도가 고백하였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3. 예배는 드려지는 게 아니라 받는 것이다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9, 12).”

 

물론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드려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데 드려지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매순간이 받아지는 삶이어야 한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5:1).” 다시 말해서 말씀을 받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숱하게 드리는 제물보다 낫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겸손은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실이다. 나서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주의 뜻이 무엇인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피는 게 급선무다. 우선순위가 분명하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내 요구와 수고와 애씀이 우선이 아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세상적인 속담은 틀렸다. 하나님은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는 자를 도우신다.

 

그래서 이를 경계하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29:13).” 경건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는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만 여겨, 자신이 드린 드림을 경배하곤 한다. 말씀을 은혜를 은총을 권면과 충고를 받는 일에 소홀하거나 이를 회피하는 게 현대 신앙의 특징이 되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좋은데 참견은 싫다. 저를 주인 삼기는 싫어한다. 나는 내가 주인이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예배도 내 방식대로 드리려 든다.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긴다.

 

4. 신앙은 인내다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10).”

 

하나님을 기다리느니 내가 알아서 하는 게 낫겠다. 너무 더디다. 벌써 우리 교회가 글방에서 예배를 드린 지 어언 8년이 넘어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신 것일까? 내가 이래도 되나? 다른 길을 모색해볼까? 이런 방식 저런 방식, 우리도 나름의 방도를 찾아내야 하는 게 아닌가? 어쨌든 성과가 곧 응답이라고 여기는 한 이러한 조바심은 끝도 없다. 결코 인내할 수 없게 만든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남들 보기도 그렇고, 이게 뭔가 싶다. 사울도 그런 심정이었다. 기다리느니 내가 뭐라도 해야 옳겠다. 그런데 성경은 답답하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2:3).”

 

더딜지라도 기다리라니! 언제까지 말인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8:25).” 믿음의 정의도 그러하다. 믿음은 뚜렷한 보장이 아니다. 막연하여서 이보다 어리석은 게 없는 것 같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이를 붙들고 인내하는 것이 신앙이다.

 

5. 현실 너머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11-12).”

 

당장은 언제나 우릴 쥐고 흔든다. 이래도 견딜래? 이 길을 계속 갈래? 더 나은 걸 찾아! 사울의 변명은 그러므로 정당하다. 기다려도 오지 않고, 당장 블레셋은 코앞까지 진격을 하였고, 당장 치러 올 판에 부득이하여어쩔 수 없다. , 모든 어쩔 수 없음의 부득이함이여! 어떤 죄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부득이함이 있다. 어릴 때 깊은 상처가 또는 불운한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었어!’ 하고 두둔하며 죄를 질병으로 희석시킨다. 심신미약으로 또는 조현병으로 보아, ‘괜찮아! 너는 어쩔 수 없었어!’ 하고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게 한다.

 

현실 너머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면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주의 섭리를 용인하기 싫은 것이다. 하나님 말고, 도움을 강구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121:1)” 어디 없나? 도움을 구한다. 앞서 성공한 이의 조언을 듣고, 누가 그러는데 하면서 통계를 따진다. 여러 산이 우뚝 섰다 해도, 하늘 아래 뫼이로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2).”

 

우린 현실을 초월하는 안목을 구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6. 상황윤리보다 하나님이 기준이다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12).”

 

거룩이 묻어지는 대목이나 옳지 않았다. 저가 당장 블레셋을 치러 가야 할 판인데 주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고 여겨 부득이하게 번제를 자기 손으로 드렸다는 것이다. 그게 왜 나쁜가? 오히려 칭찬하고 독려해야 할 일이 아닌가? 다시 한 번 가만히 묵상해보자. 말은 그럴듯한데 저의 말 속엔 자신이 옳았다는 소리만 있지 잘못을 뉘우치거나, 용서를 구하는 대목은 없다. 모든 죄는 잘못을 뉘우칠 수 없는 자기변명을 두꺼운 외투로 걸치고 있다. 그게 훨씬 경건해 보인다. 누구 말도 들리지 않는 이유다.

 

똑같은 상황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건 이런 것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17-18).” 하나님이 도우실 걸 확신한다. 그러나 돕지 않으신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한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21:13).” 인정에 끌리지 않고 상황윤리에 맞추지도 않는다.

 

7. 죄는 변명과 핑계가 아니라 회개로 해결된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11).”

 

사울의 안타까운 심정이 이해는 간다. 정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모든 범죄는 같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이 더 억울한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억울하지 않은 범법자 없다.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많을 때 진정한 회개는 묘연하다. 그러므로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28:13).” 은혜란 긍휼히 여기심이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일이다.

 

이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55:7).” 회개는 이를 인정하는 일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게 회개이지, 할 말이 많아 그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는 게 회개가 아니다. 넋두리와 회개는 다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8.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가 된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11).”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마치 초연한 것처럼 굴 수는 있으나 누가 나를 어찌 여길지, 또는 뭐라 할지, 저들의 평가에 의에 위로를 받기도 하고 실망감이 들기도 하고, 위기감을 느끼기도 하고, 패배감을 맛보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다 허상이다. 영원할 거 같은 사이도 부질없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51:12).”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이젠 좀 단호하게 굴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

 

9. 그럼에도 하나님은 은혜하시다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14).”

 

가끔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없던 일로 하는 게 쉽다. 처음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도 차라리 저를 없이하고 새로 더 나은 완전한 존재를 만드셨으면 될 텐데. 충분히 그러실 수 있으면서도 왜 그럼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55:7).” 인격적인 관계란 전능하신 이가 전인격적으로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에 대해 끊임없는 용서와 긍휼을 베푸셔야 한다.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 완전할 수 없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완전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저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는 완전하신 이가 저의 전능하심으로 일방적인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한다. 마치 어린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지난한 인내와 같다. 이를 바로 알 때,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2:13).”

 

 

나오는 말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윗은 달랐다. 성경은 저를 두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저는 그럼 완전한 자이었나? 뒤를 이어 왕 위에 오르는 자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12:8).” 이 또한 주의 약속이시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3:15).” 주가 양육하실 것이다.

 

누구도 완전한 자는 없다. 그러나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10:34-35).” 첫째, 주를 경외할 줄 아는 자로서 둘째,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사람을 의식하지 말자. 그것이 올무가 된다. 자신을 주장하지 말자. 자신을 주인인 체 한다. 경건을 흉내 내지도 말고, 그것으로 이익을 도모하지 말자. 즉 하나님을 도우심만으로 구하지 말자. 도우시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좋게 여기는 것이 결코 의가 될 수 없다. 모든 죄는 부득이한 것이다. 이를 멀리하는 길은 기쁜 마음으로 주께 하듯 하는 것이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6: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