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07 주일
사무엘상 15:22-24
순종은 듣는 것이다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들어가는 말
새삼, 사울 왕보다 경건하고자 애썼던 자도 없는 것 같다. 전쟁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을 우선적으로 제사를 먼저 드리려 했던 행동이나(삼상 13:3-18), 하나님의 궤를 전쟁터에까지 가져가 곁에 두고자 했던 마음이나(14:16-23), 전쟁 중에도 군사들을 성결케 하고자 금식을 단행했던 일이나(24-30), 이를 함부로 어기지 못하게 단단히 맹세까지 시킨 일이나(36-42), 누가 봐도 저는 경건을 도모하였다. 나름은 옳았다. 보기에도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다(51).
그런데 성경은 이에 반하는 말씀을 주신다. 바울 사도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즉 부패하고 진리를 버린 자들이 경건으로 이익을 도모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거라는 소원들, 교회에 헌신하고 봉사하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실 거라는 기대들.
이를 오늘 본문에서 사울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15:15).” 늘 이런 식이다. 말씀을 합리적으로 행한다. 말씀은 분명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3).” 명령은 그러했지만, 그 가운데 쓸 만한 것을 추려, 하나님께 드리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타당하고 이치에 맞다. 상식적이며 매우 합리적이다. 그런데 그의 판단에 대해 하나님은 후회를 하셨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11).”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고 죄악은 이를 교묘하게 묵인하는 것이다. 사울 왕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나름의 논리가 있고 이는 매우 설득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16).”
차라리 가만히 좀 계시라. 순종은 곧 듣는 것이다. 듣는 건 가만히 있어야 들린다. 내가 말하고, 내가 분주히 무슨 일을 추진할 때는 들리지 않는 법이다. 아니, 듣지 않는 것이다. 우선하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판단이 우월한 것 같기 때문이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9).” 얼마나 유용한가?
나름의 수고와 애씀 뒤엔 구구한 변명만이 즐비할 뿐이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20-21).”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간단하다. 순종이란 뭘 하는 게 아니라 듣는 것이다. 무엇이 순종을 망치는가? 뭐라도 한다고 해서 자신의 의를 삼는 것이다. 참 예배가 무엇인가? 온전히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받아야 하는 것이다. 불순종이 왜 우상숭배인가? 우선하는 자기 생각 때문이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
순종은 듣고 따르는 것이다. 기꺼운 마음이 아니면서도 듣고 따르려는 것을 복종이라고 한다. 내 목소리를 뒤로 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기준을 앞세우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순종은 본래 고통을 통해 배운다. 왜냐하면 우린 본래의 순종을 잃었다. 날 때부터 떼를 쓴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내 생각이 우선할 때 나에 대한 주장이 먼저다. 말씀은 뒷전이다. 불순종은 말을 안 듣는 게 아니라, 말씀보다 우선하는 나름의 선이다.
믿음이란 들음이다. 들음이 우선이고 행함은 그 증거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순종이란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하심을 받은 일이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여기에 두신 것이다. 심지어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2-3).” 그럼에도 주가 나를 오래 참으시는 것.
그러므로 순종이란, 내가 드리는 예배 이전의 받음이다. 말씀을 받아들임이다. 재고 따지는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선택을 당함이 우선이다. 부르심인 것이다. 이에 내가 응하는 것이 예배이고, 나의 헌신이고 봉사다. 곧 받은 것에 대하여 네, 하고 답하는 것이 예배다.
불순종은 우상숭배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23).”
임의로 내 수고와 애씀으로 드려지는 모든 것에 대하여,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암 5:21-22).” 왜 그러실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우린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곧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시 40:6).” 그러니까 제사와 예물은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이뤄지는 자연적인 현상이지 그것으로 순종을 가늠하려 들면 외식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바람은 오직 하나뿐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19:18).”
그러므로 말씀을 듣기보다 앞서는 모든 것은 우상숭배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23).”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은연중에 우상숭배를 일삼는다. 점치는 자와 다를 바 없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이루어주실 거야, 하면서 앞서 생각한다. 그래서 완고해지는 것이니, 완고함은 우상에 절하는 것이다. 굴복이다. 자기 나름의 신념에 말이다. 그러나 말씀은 단호하시다.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욥 36:12).”
나오는 말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24).”
여기서도 보자. 결코 후회는 회개가 아니다. 후회나 반성은 변명과 핑계가 앞설 뿐이다. 억울할 뿐이다. 할 말이 많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울 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인정했다. 그리고 고백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이는 회개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 ‘말씀을 어긴 것은 사실이지만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을 뿐입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다. 그래서 순종은 할 말이 없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마 1:38).” 말이 많으면 다 그만한 이유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신다.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시 51:17).” 그때란 언젠가? 순종이 앞선 때이다. 그런데 순종보다 앞서는 것이 있을 때,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그래서 예수님은 엄히 말씀하시며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경고하셨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두려워할 걸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릴 버리신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4).” 두려워할 줄 알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우리 행위에는 항상 누구의 이목을 먼저 의식하는 본능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주만 바란다는 것, 이는 말씀만 붙들고 사는 일이다.
말씀만 의지한다는 것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주 앞에서 정직하게 입을 여는 일이다. 말씀만으로 온전함을 얻자. 참 진리는 변개하심이 없다. 누가 뭐래도 말씀뿐이다. 그 안에만 자유가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그래서 믿음은 곧 들음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말씀을 듣자. 들음으로 순종하자. 순종은 곧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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