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사무엘상 21:10-15 / 항상 송축함이여

전봉석 2018. 1. 12. 13:28

20180114 주일

 

 

사무엘상 21:10-15

항상 송축함이여

 

 

 

21: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21: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21: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21: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21: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21: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들어가는 말

 

어쩌면 사울은 이스라엘이 낳은, 하나님을 버린 데 따른 괴물이 되었다. 저의 속에 악령이 주장하였고 그럴 때면 다윗이 그 희생을 치렀다. 사무엘에게 일러 저들이 너를 버린 게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덴, 사울의 강퍅함과 잔혹함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는 데 따른, 우리가 원한 왕이었다. 물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주변국들도 다 그러고 살던 거였다. , “이제 너희가 구한 왕, 너희가 택한 왕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왕을 세우셨느니라(삼상 12:13).”

 

하나님 아닌 것으로 왕 노릇하면서 우리의 자식들이 저의 어거를 몰며 노역을 한다. 저의 군병이 되어 저의 성을 호위한다. 딸들은 팔려가 저의 시중을 들고 노예로 전락하였다. 돈이 왕이 되어버린 세성에서 지위와 출세와 성공이 우리를 지배한다. 명예가 권력의 종이 되었고, 권력은 돈의 노예가 되었다. 무질만능주의 세상에서 돈이 갑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들이 우리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4:8).”

 

그러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9).” 답답한 노릇이다. 우린 모두 자유자로우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았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5:13).” 이스라엘이 원했던 왕, 사울을 통해 저가 괴물이 되는 과정을 목격하였다.

 

저는 스스로 경건을 이익으로 삼았고(나서서 제사를 드림, 삼상 13:3-18), 나름의 거룩을 미신적으로 신봉하였으며(하나님의 궤를 전쟁터로 가져감, 14:16-23),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음에도 장담하였고(전쟁 가운데 병사들의 금식을 선언함, 24-30), 이를 올무로 삼았다(맹세시켜 벌을 돌림, 36-42). 누가 봐도 저는 훌륭한, 나름의 경건자이다. 옳았다. 보기에도 승승장구하였다(51). 다시 한 번 읽어보자.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사울은 괴물이 되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다윗은 주의 이름으로 무찔렀다. 저는 평소 익숙하였던 물맷돌과 지팡이뿐이었다. 사울의 갑옷은 거추장스러웠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갔다. 골리앗은 저의 물맷돌에 맞아 죽었다. 백성들은 다윗을 칭송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삼상 18:7).” 순간 시기와 질투가 사울을 덮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8).” 그리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9).”

 

실은 시기와 질투의 바탕은 두려움이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12).” 그래서 갖은 술책을 동원하여, 심지어 저의 딸의 사위로까지 삼아보았지만 그와 같은 마음 저간에는 악령이 있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다. 창을 던져 저를 죽이려 했고, 도망 다니는 다윗을 추격하였다. 그러다 선지생도 여든다섯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와 같은 역사의 현장에는 극악무도한 인물이 등장하였으니, 도엑이라.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22:18-19).”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다윗이 가드왕 아기스게에게로 숨어든 이야기다. 저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였다.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입니다. 그 백성이 춤을 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는 저들의 보고에 다윗은 두려웠다. 실제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면 오히려 아기스의 손에 죽게 생겼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 앞에서 미친 체한다. 대문짝에 몸을 그적거리고, 침을 질질 흘려 수염을 적셨다.

 

아기스 왕은 이를 보고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은 미치광이로다.” 얼마나 처절했을까?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억울했을까? 우리는 그때의 다윗의 심정을 알기 위해 시편 34편을 같이 보아야 한다. 저가 미친 체 하고 나와서 적은 시이다.

 

송축함이란 노래한다, 찬송한다, 영예롭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 저는 막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체 하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나왔다. 그 모멸감이나 억울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한데,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이는 주를 원망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오히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자랑하는 것이 곤고한 자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그래서 화자는 더욱 적극적으로 권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방관자로 구경만 하지 말고 같이 참여 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뭐를 응답하신 것일까? 당장은 적의 손에 죽을 뻔하였는데 이를 살리신 데 대한 감사다. 나아가 주의 원대하신 계획하심을 아는 자의 노래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역사 속에서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빛도 없이 스러져가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오늘 날 우리나라가 이만큼 은혜의 복음을 누리고 있는 것도 저들이 주를 앙망함으로 죽기까지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당장은 처한 현실에서고 나아가서는 주께 향한 비전의 목소리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저는 이를 확신하였던 것이다. 이 맛은 말 그대로 아는 사람만 아는 맛이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주께 피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보다 값진 은총이 또 어디 있겠나?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저는 단언하는 것이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이들도 궁핍함에 주릴지라도 우리는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배우라는 것이다. 저의 삶이 곧 증거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그런 사람들은 오라.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안다고, 잘 알아서 한다고 말하는 것을 주의하라는 소리다.

 

그것은 자칫 악으로 이어진다. 곧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확신하는 것은 말이다. 그러므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왜 그런가?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의인은 저가 남다른 의를 행하여서가 아니라 의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함이다.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하지만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악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는 것이다. 저를 왕으로 모시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바라고 구한다고 여기는 신념이다. 세상 기준이다. 하지만 의인은 애통한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내가 나를 어쩔 수 없다는 데 대한, 주 앞에서 두 손 두 발 다든 자가 의인이다. 그의 마음은 늘 상한 영혼이라.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다윗은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저는 주께 부르짖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주께서만이 우리를 우리의 고난에서 구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주 앞에 바로 설 수 있게 하시려고.

 

하지만 제 꾀에 제가 넘어가듯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겉으로 보이는 승전보는 하나님 없이, 적당한 수고와 애씀이 인정받고 우리의 성실함으로 승패가 갈리는 것 같지만,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속량은 주의 것으로 우리는 다만 주께 피할 뿐이다.

 

 

첫째, 우리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수 있다.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삼상 21:10).”

 

이때 말씀은 강력히 우리를 붙드신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12:2).” 원래 모든 사람은 넘어진다. 의인도 넘어진다. 그러나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24:16).” 그 차이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8:25).”

 

둘째, 우리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삼상 21:12-13).”

 

고작 우리가 임기웅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미친 짓일 뿐이다. 별 수 없다. 우리는 구해야 한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60:11).” 그래서 우린 주께 엎드린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1-12).” 그러므로 박해당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세상에서 환영받는 교회와 성도와 잘 어울리는 신자는 좀 의심해봐야 한다. 분명한 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것이다. 먼저는 우리가 곧 연약함이고, 다음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담고 보배로운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셋째.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가 된다.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삼상 21:14-15).”

 

결국 저가 숨어들어 사람들 속에서 저를 두려워할 때, 저들이 저의 올무가 되었다. 본래 그렇다.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신다. “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106:36).” 하나님 아닌 것으로 하나님을 삼아 왕으로 통치 받고 사는 이들에게 우리가 속한다면, 당연히 그 사는 날 동안 올무가 될 수밖에 없다. 직장생활이 그렇고, 사회생활이 그렇고, 장사하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면서 한 발 물러서서 타협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우린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세상에 볶이는 것은 물론 자기 안의 신령한 영이 또한 고달플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29:25).”

 

 

나오는 말

 

살다보면 별 수 없는 때가 수두룩하다. 내가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순간들이 널렸다. 이때 세상 그 무엇으로 위로를 삼고 그 가운데 숨으려 할 때, 그 신세가 참 처량해진다. 영락없이 올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다윗이 이방 나라에 숨어들었다. 호랑이를 피하려다 곰을 만난 셈이다. 미친 체 하여 벽에 몸을 비벼대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살기 위해 처참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서 산 자의 하나님을 송축하였다. 때론 비참하고 처절하고 더욱 자존심 상해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빠져들어도 우리는 이내 주를 송축함이라.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중략)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중략)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34편 중에서

 

그러므로 누가 주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