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호세아 13: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29:11
언제부턴가 새해에 대한 감흥이 적다. 그저 어제에 이은 오늘이다. 바뀌는 연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기념하고, 해돋이를 보러 가고, 소원을 빌고 하는 것들이 호들갑스럽다. 나의 이런 무덤덤함이 나이가 들어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그저 평상시대로 움직였다. 딸애가 송구영신예배로 새벽 세 시에나 들어와서 오후 두 시에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엊그제부터 붙들린 말씀을 본문으로 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그 값어치를 잃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저 천국인 것을. 많은 이들이 인생을 ‘순례자의 길’로 비유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이 땅에 영원히 머무는 것은 없다. 주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무엇을 최고의 값으로 삼고 살 것인지. 그러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던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영생이란 주를 아는 것.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우리에게 새로 허락하신 날에 우리가 그 값어치를 잃지 말기를. 기뻐할 수 있는 건 아는 힘이다. 그게 뭔지 모를 때, 천국은 그저 막연하여서 데면데면할 뿐일 것이니. 알자, 힘써 알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또한 나는 가족들에게 전하여 주고 싶은 말씀을 건넸다. 아내에게는 심음과 거둠의 원리를.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이제 막 사명의 길에 첫 발을 내딛는 딸애에게는 씨 뿌림의 원리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잘 견디는 게 신앙이고 복일 거였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그리고 한참 진로에 대해, 그 갈 길을 염두에 두고 생각이 많은 아들에게는 주의 인도함에 대하여.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면서 목표를 이루어가는 것 같으나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부디 주께 그 걸음을 맡기고 묵묵히 주어진 상황에서 성실함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이기를.
모두 감기가 심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예배를 드리고 같이 어딜 가서 밥을 먹고 영화라도 한 편 볼 거였는데, 일찍 들어와 쉬었다. 나는 주신 말씀을 전할 뿐, 그 가치의 값어치는 각자의 몫일 거였다. 내가 일러 다스릴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파스칼도 말한 것처럼 복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누가 대신 행하여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게 아내라 해도, 자식이라 해도. 단번의 구속은 모두에게 공평하였으나 중생을 이뤄가는 일은 각각의 길이다. 길 위에서 길을 연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일.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19:30).” 이미 확정된 일에 대하여, 나는 불가항력적임을 확신한다. 돌이켜 나를 오늘 여기에 두신 것이 창세 전부터 이미 예정하신 일이었으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모든 것을, 다 이루시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 그 길은 같이 걸으면서도 따로 딛는 길이다. 각자의 걸음이면서 동행을 이루는 여정이기를. 나는 다만 기도할 뿐이라.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아직 귀가 열리지 않아 듣지 않는, 내 곁의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아내에게 말해주었다. 전날 나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은 데 대한 늦은 대답이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나의 남은 생애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어떤 포부를 다지며 인생에서 활력을 불러일으키려는 그런 다짐이 아니었다. 나이가 몇 살이니, 제2의 인생이 어떠니, 중년이 어떻고 노년이 어떠니, 하는 말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새로 허락하신 새해에 나는 나를 위하여, 우리 가족들을 위하여 말씀을 준비하면서 새삼 지금의 내 역할이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졌다. 별 볼일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나, 나는 누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명과 그에 맞는 말씀을 붙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호 13:4).”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을 때에도, 세상과 짝하여 갈대 지팡이로 삼고 살아가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한 번도 나의 하나님이 아니신 적이 없었다. 내가 외면하고 내가 뿌리쳐 멀리 도망쳐 갔을 때에도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주는 내 곁을 지키셨다.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주가 확인하셨다. ‘나 외에 구원자가 없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이를 오늘 내게 알게 하심이 귀하였다. 비록 아무 것도 하는 게 없고, 남부럽지 않게 보란 듯 내세울 수 있는 공로가 없다 해도, 주는 나의 주님이시라. 나의 구원자. 내게 새 힘을 주시며 평강의 복을 더하시는 이시다. 이를 붙들고 내가 아는 그리스도를 다른 이에게 증거 하는 삶을 살게 하셨으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아멘.
그 성과는 내가 이루는 게 아니었다.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가 그 길 끝에 있는 주의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심이었다. 나는 그래서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비록 아무도 오지 않고, 가족들과만 둘러앉아 각자의 말씀을 건네며 권하며 증거 하다, 내가 이러고 있을 줄이야! 나에게 이와 같은 영광을 허락하실 줄이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그렇구나. 내 임의로 되는 게 아니라,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심이구나.
그 배란 어떤 배였나?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26:22).” 무엇으로 가득하였던 배인지 상상이 간다. 누구와 견주어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쟁하고 화내고 다투고 모함하던 것으로 가득하였던 배이다. 늘 누구를 부러워하고 또는 저를 헐뜯으면서도 시샘하던 배였다. 한데 이제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었으니. 이 복음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렇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그러므로 끔찍한 죄란 주의 구속의 은총을 한사코 외면하고 멀리하는 것이다. 기어이 거절하여 자기 고집대로 사는 일이다. 구속은 모두에게 열린 것이나 중생은 이를 바라고 구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곧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
더는 나이 듦에 대하여 연연하여 재차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었다. 더는 사람에게 이끌려 누구를 바라고 저의 사랑을 희구하며 그 무리 가운데서 살아남고자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아! 이 값지고 소중한 보물을 발견하였는데, 내가 그 밭을 사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인들 아까울 게 있을까?
내 죄를 내게 돌리지 않으시고 내가 주와 화목하게 하셨고, 화목하게 하는 이 말씀을 내게 부탁하신 것이니. 그렇지, 그렇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4:16).” 중생이라. 성화라. 영생에 들어가 살 나의 날들이 날로 새로워짐이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5:21).”
나의 남은 모든 것으로 보물이 감추어진 이 밭을 삼이라. 그러므로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시 29:1).” 곧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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