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전봉석 2018. 1. 3. 07:00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호세아 14:2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시편 30:4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올라가 ‘또박또박 소리 내어’ 성경을 읽었다. 아침에 쓴 묵상글을 다시 읽으며 바둑에서 복기를 하듯 다시 메모를 하며 읽는 게 나의 오전 일과이다. 그러고 있는데 옆 사무실의 이모님이 오셨다. 신년 새해 첫날이니까 같이 모여 기도로 시작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마침 사장과 아버님도 일찍 나와 계셨다. 다들 우리 글방으로 모시고 나는 커피를 한 잔씩 대접했다.

 

서로에게 덕담을 주고받다, 나는 축복기도를 하였다. 우리에게 맡기신 사업이 번창하기를, 서로들 건강하기를, 가정마다 행복이 가득하기를 그러나 이는 짧은 인생길 너머의 영생을 사모하는 데 소용되기를, 안 믿는 부친과 사장을 위하여. 얼떨결에 이루어진 일이라 나는 기꺼운 마음이었다. 어느 일정 기간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좋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의 명령이시기도 하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그러라고 나를 오늘 여기에 두신 데 대해 확신하였다. 결국은 십자가다. 다른 더 좋은 소식을 나는 알지 못한다. 주를 바라는 삶이 은연중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전달되어지는 것이다. 의도한 바 없고 인위적으로 무엇을 수고하여 이루어가는 게 아니었다.

 

가만히 그대로 읽혀지는, 그리스도의 편지 같은 삶.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3).” 나는 이를 날마다 의식하려고 나의 의지를 재촉한다. 그러자니 매순간이 다툼이다. 좀 더 바르게 믿으려는 의지, 온전히 알고자 하는 의지, 순종하려는 의지, 주의 공급하심으로만 살려는 의지, 모든 상황들을 주께 의탁하려는 의지.

 

늘 그렇지 못한 자신을 채근하여 다독이고 건사하는 일이다. 의심이 들고 근심과 걱정이 수시로 나를 쥐고 흔드는 데 따른 저항이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머뭇거리다 볼 일 다 볼 수 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한탄하며 죽어간 영국의 희극배우 버나드 쇼처럼 허망한 생이 될 수도 있다. 누가 나를 읽을 수 있게, 그 의미가 뚜렷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십자가의 도를 나타낼 수 있도록. 문장은 다듬고 어휘는 선별되고, 마디마디 그 의미는 뚜렷하여, 주께 순종하려는 나의 의지가 분명하게 담겨질 수 있도록. 


그 첫째가 말씀으로 씨름하는 일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말씀 없는 열심과 헌신은 반드시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수고와 애씀을 두둔하는 자리에 빠진다. 또는 열심에 삼킨 바 되어 기진하기 일쑤다. 녹초가 된 영혼들이 교회 밖을 떠도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23).”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새삼 나의 존재의 의미가 분명하였다.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된다. 뭘 그렇게 대단해서 놀라운 게 아니었다. 모 교회 송구영신예배에 갔던 이야기, 일찍 간다고 갔는데 성전 안에 벌써 사람들로 꽉 찼더라는 이야기, 원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이니 그렇겠다 싶은. 실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별로 감흥이 없었다. 마치 일출봉에 몰려 해돋이를 보며 소원을 빌려는 수많은 인파를 연상케 할 뿐. 과연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자신의 위안을 삼으려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다만 주께 의지하려는, 순종하려는 나의 의지를 격려할 뿐이다. 거룩은 채워지는 것이지 비워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깨끗이 비워진 마음이 더 위험하다. 그 사정이 전에만 못하게 될 때는 열심을 다한 뒤였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으면 주의 도우심만 바라게 돼 있다. 죄는 내가 씻을 수 없다. 엄밀하게 죄와 출생은 내 탓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도 아담을 본 적이 없다. 다만 저의 성향을 안고 태어났다는 사실. 죄는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그 본질이다. 내 안에 이는 온갖 부정의 바탕이 그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주께 의뢰하는 것과 이를 부정하고 (또는 가벼이 여기며) 자신이 알아서 하려는 것의 차이다.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 중 하나가 나름의 수고와 헌신이 될 때 저의 열심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축복을 빌었다. 하시는 사업들이 잘 되기를, 건강하기를, 행복하기를 그러나 이 모두는 주를 바라는 데 유용하기를. 단지 소원을 빌고 새로운 기운을 얻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고 만사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면 동해 쪽으로 달려간 이들이나 큰 교회당 안을 인산인해로 가득 채운 발길이나.

 

난 잘 모르겠다. 새 이레 특별 새벽기도 중에 주일학교 아이들 특송이라, 전도사를 맡은 딸애가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준비해서 교회로 갔다. 그런저런 열심이 수고롭고 안타깝게 여겨지는 건 나의 모자란 영성 탓이겠으나, 것 또한 그와 같은 마음을 허락하시고 그 일에 뛰어드는 열심을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겠으니. 힘내라. 함 해봐라. 응원하는 마음뿐이다. 어찌됐든,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자기를 부인하는 일. 그리 옳다고 여기는 것들의 함정에 대하여, 자기 수고와 애씀보다 위태로운 게 또 있을까? 주어진 상황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 하는 삶이 경이롭다. 아침에 일찍 글방으로 가다보면 떡집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며 새로 나온 떡을 진열하는 노인 내외의 꾸준함이나 대형 빵집을 길 건너에 두고도 매일매일 무던히 빵을 굽는 젊은 제빵사의 손길을 나는 존경한다. 요란스레 해돋이를 보러 산을 오르고 소원을 빌러 멀리 동해로 빠져나가는 인파보다, 큰 교회로 몰려 신년 송구영신예배에서 복을 구하는 많은 신도들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시 8:6).” 이 사명을 다하는 삶이란 요란스러운 게 아니라 무던함일 거였다. 어찌됐든 우리는 모두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이를 인정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랄 줄 아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4-5).”

 

이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삶이란 순복이다. 순복은 나의 주장을 주께 내어드리는 일. 나에 대한 의지와 수고와 애씀도 모두 주께 맡기는 것. 그러려는 의지, 그리하려는 애씀과 수고여야 한다. 나는 다만 여기 있사오니 주여 나를 받아주소서. 내 의지나 내 수고나 내 애씀이 아니라, 그리하게 하시는 이의 의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가장 쉽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후가 가장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요약하면 회개와 순종이다. 내가 뭘 더 해내는 게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잠잠히 주만 바라는 일. 오후께 한 아이가 약속 시간을 한참 넘겨서 왔다. 그리곤 구구절절 핑계다. 변명이 앞서면 반성은 없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는 억울함만 있을 뿐이다. 아이에게 이를 말해주다 내 영혼에게 들려주는 말이 되었다.

 

뭐 그리 핑계가 많은지. 나름 가장 올바르고 경건하였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나야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나름 그만하면 훌륭한 인물인데, 그 대답은 앞서 제시하신 논거에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내 수고와 애씀으로가 아니다. 성령으로 나지 않고는 어떤 열심도 모두 허사라.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일은 ‘칼이 내 마음을 찌르는 듯한 일’이다. 청천병력 같은 말이다. 어떻게 나를 포기한단 말인가?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사업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데, 올해가 절호의 기회인데 하는 따위들의 자기권리 주장이 깡그리 도전 받는 일이다. 그걸 다 내어놓으라니! 그럴 수 없어서 그럴 바엔 내가 더 수고한다. 애쓴다. 열심을 다함으로 위로를 삼는다. 그래야 할 말이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35).”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자중함이다. 나는 없고 말씀만 있기를, 내 주장은 모두 소멸되고 주의 권능만이 나타나기를.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으로.

 

이것이 주께서 바라시는, 심령이 가난한 삶이지 않을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그러니 생각보다 천국에 있는 자가 극히 적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말씀에서 이를 읽는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 14:2).”

 

불의는 나에 대한 나의 권리다. 이를 제거하고 주께 내어드리는 날. 나로 하여금, 입술의 열매로 주께 드리리이다. 곧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시 30:4).” 그러니 감사다. 후회가 회개일 수 없는 것처럼 자기만족이 감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후회하는 사람을 동정해선 안 된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하고 저를 두둔해서도 안 된다. 회개만이 답이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그에 따른 모범적인 사례가 삭개오 이야기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누가 하니까, 그러는데, 시켜서 그리하는 게 아니었다. 회개가 아니면 자기연민에 빠진 또 다른 교만이 사로잡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어! 하는 핑계들. 후회가 위험하다. 깨끗이 자신을 소지한다. 비워놓은 채 있으면 위험하다.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눅 11:25-26).” 그래서 오늘 말씀은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제시한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시 30:4).” 찬송과 감사다. 거룩함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일,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호 14:9).”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시 30: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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