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엘 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31:14
지금 처한 상황은 내 탓이 아니다. 외부적인 요인에 대해서는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것으로 나를 못 살게 굴어도 소용이 없다. 다만 ‘그러하여도’ 나는 주를 신뢰하는지의 문제다. 삶은 때로 잔인하여서,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욜 1:4).” 이렇듯 몰아붙일 때는 정신이 없다. 사는 게 더러 그렇기도 하여서 어디가 아픈데 일은 안 풀리고, 애들은 말썽인데 돈은 없고, 하는 일마다 꼬이고 틀어져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주를 신뢰하는 수밖에.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2:25).” 반드시 그러하심을 붙드는 일이다. 그 이유와 목적은 언제나 선명하여 주님과의 관계다. 나와 주님의 문제다. “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9).”
그러하였을 때 나는 그럼 어떠하였는지. 참 사람 미련하여서 말로는 안 된다. 팥중이로도 안 되고 메뚜기로도 안 되고 느치와 황충이 연이어 먹어치우는 데도, 기어이 누군 돌아오지 못하나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그렇다면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기고 계시다는.
이 확신을 오늘 시편은 일깨우고 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 31:14).” 그럴 수 있기를. 그게 아니면 과연 나는 무얼 붙들고 살 것인지.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해야 할 의무가 내게 있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차원 높은 비결은 그런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곧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명해야 한다. 본래 그렇게 지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그렇게 되도록 주가 오셨다. 그러므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그럴 수 있으려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수밖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주가 나를 이끄시도록 나는 나의 주장과 생각을 거두어내는 일. 내 판단과 기준을 물리치는 일. 앞서 판단하고 비난하지 말 것이며 섣불리 외면하고 등을 돌리지 말 것은 주가 행하심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시 33:4).”
초등학교 2학년 아이 셋과 3학년 아이 하나가 왔다. 나는 혼자 감당이 안 돼 아내가 뒤에 앉아 있었다. 앞서 아이들의 일기를 일주일에 한 번씩 교정을 봐준 터라 내 짐작과 각각의 아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둘이 견주어 경쟁하며 시샘하고 하나는 수줍어서 말도 잘 못한다. 한 녀석은 엉뚱하여 자꾸 객쩍은 소릴 해대고, 저마다 길들여지지 않은 모습은 천방지축이었다. 한 시간 반 수업을 하면서 진이 쏙 빠졌다. 아내는 내가 너무 물렁해서 그렇다지만 큰소리를 쳐서 아이들을 휘어잡는 건 옳지 않다.
허물없이 다가오고 기어오를 수 있는 게 글쓰기여서 아이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게 글짓기여야 한다. 이를 막으면 도식적인 글을 쓰고 구획된 생각만으로만 지어낸다. 한 아이는 매사가 억울하다. 먼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누구에겐 질문하고 자신에겐 하지 않았다고, 누가 먼저 답했다고… 사사건건 그런 데 마음이 먼저 걸렸다. 아이엄마의 극성이 유별나다는 걸 뒤에야 알았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곧이어 또 4학년 아이들이 몰려왔을 때도, 그동안 고상을 떨며 고등학교 대학교 애들만 가르치다 이게 뭔가 싶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주의 일이란 그런 것이구나. 내가 임의로 글방을 운영할 때는 선별하였고 추려서 될성부른 나무만 고른다고 골라서 해왔는데. 오죽하니 그래서 소문이 나기를 ‘저 글방은 아무나 안 받아줘.’ 하는 따위의 평가로 우쭐해하기도 했었고, 나는 그것이 옳다고 여겼었다. 신기한 건 그럴 때마다 또 아이들이 상을 휩쓸곤 하였으니.
그러니 수십 명 수백 명은 될 텐데, 다들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그런 거 보면 평생을 아이들을 상대하며 살아온 셈이다. 제도권 밖에서도 얼마나 우쭐하고 지냈던지. 그런데 이제야 볼 수 있고 보이게 되었고 보고 있다. 어린아이 하나가 왜 저처럼 세상을 오해하며 살아낼까? 졸지에 모두가 적이었다가 혼자서 외톨이가 되었다가 반짝 또 긴장을 하면서, 책을 소리 내어 읽혀보면 안다. 영락없이 아이는 떠듬거린다. 또 한 아이는 앞뒤에 자꾸 자기 말을 더한다. 없는 내용을 읽는 것이다. 또는 줄줄 읽으면서 읽고 난 내용을 알지 못한다.
먼저는 저 어린 영혼을 위해 기도하라고. 다음은 그 안 믿는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그 다음은 부모의 왜곡된 사랑에 대신하여 주의 마음으로 품으라고. 신기하게도 처음 본 나를 아이들은 허물없이 대한다. 전에 같으면 그럴 기회조차 어렵게 만들었을 텐데, 그래놓고는 내가 기진하는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소파에 널브러졌다가 깜빡 졸았다. 내가 영혼 구원에 너무 사로잡히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주께서 이뤄놓으신 일을, 나는 그저 그 곁에 있을 뿐이다.
부르면 대답할 수 있는 거리,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사람으로. 외부적인 요인에 대해서는 내 책임이 아니지만 그것으로 나는 무엇을 씨름하는지는 내 몫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분명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 두시고, 두신 이가 다스리시고, 다스리시는 이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할 때 나는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곧 나 때문에 주가 일하지 못하시는 경우도 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한다는 게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하필이면 ‘저런 사람을’ 내 곁에 두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곧 다른 사람에게 주의 말씀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곁에 계시다는 걸 알려줄 수 있는 구조 신호 같은 역할이다. 그러자니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쳐 복종시키기까지 굴복하였던 것이구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두려운 말씀이다. 내가 아니어도 하나님은 일하신다. 하지만 나이어야 하나님은 일하신다. 그런 아이들, 그런 사람들 곁에 두심이었다.
여기서 ‘그런’은 그러하다의 어떤 상태나 모양, 성질 따위를 구분하는 일이다. 이제 그냥 아이가 아닌 것이다. 한 번을 만나도 줄레줄레 가벼이 굴 수 있는 대상은 없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새삼 알게 하신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15:46).” 내가 어찌 저의 영혼을 다룰 수 있겠나. 먼저는 육의 사람이라. 아이의 억눌린 말투와 심사와 고약을 떠는 심보를 파악하고, 저의 ‘따귀 맞은 영혼’을 달래야 한다.
존중하고 위하고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누구도 들어주지 않던, 자기편이 되어주어야 한다. 주님이 하신 일이다. 가난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고아나 과부나 세리나 창기와 같이 스스럼없이 어울리신 데는, 저들의 따귀 맞은 영혼을 돌보심이다. 귀하고 천한 영혼이 다로 있지 않다. 한데 육에 속한 우리는 아이라서, 가난해서, 못 배워서, 또는 잘나거나 못나서 서로에게서 나뉜다. 아이들은 귀신 같이 더 잘 안다. 누가 자기편인지 누가 자기를 해코지할지, 본능적으로 알고 본능적으로 대처하느라 되바라질 대로 되바라졌다.
그러니 내가 어찌 해야 할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2:14-15).” 나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는 자이다. 그것이 귀한 것을 이제는 안다. 영적으로 분별한다는 것은 말씀으로 완성하신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걸 판단할 수 있으나 누구에게도 판단 받지는 않는다.
누가 뭐라 하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단 하나 뿐이다. 주님과 나의 문제다. 아이와 아이엄마의 문제가 아이와 주님과의 문제이고, 아이와 주님과의 문제가 나와 주님과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건 거기 있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들 뭐라 하든, 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주님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그러할 때 나는 이제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막 8:29).”
오늘 시편은 이를 분명히 하신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 31:14).” ‘그러하여도’ 곧 어떠하든지, 외부적인 것에 연연해하지 않게 하시기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힘겨워하기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21).” 이를 알게 하신 이가 나로 하여금 무엇이 더 중요한지, 그 선택에서 주저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23).”
그러므로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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