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요엘 2:23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는 의사의 말은 현실을 일깨운다. 빤히 알면서도, 몸의 고통은 관념적인 신앙과 낭만적인 믿음보다 실제적이다. 나는 이게 다다. 한계를 드러낸다. 며칠째 끙끙거리다 물리치료를 받고 왔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아프다는 건 참 교육적이다. 허황된 생각을 꾸짖는다. 속셈을 드러낸다. 나의 전부를 주께 맡기게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달리 더 좋은 길이 없다. 기껏 서둘러 돌아왔더니 아이가 못 온다고 연락이 왔다. 몸이 휘져 지쳤는데 것도 다행이었다. 누가 전화를 주었다. 돈 벌어 오래요! 다짜고짜 울음을 대신하여 깔깔거리며 말하였다. 일반 회사 경리나 어디, 이력서만 70통을 보냈고 면접만 수십 번을 보았다고. 나더러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냐 그러네요? 제가 그런가요? 두서없는 저의 말처럼 밑도 끝도 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떠들고 싶구나? 어딜 나가서 돈을 벌어와? 남편 목사가 복에 겨워 쪽박을 깨는구나? 나는 묻지 않았다.
죽음 너머는 생각해 보셨어요? 반평생을 장례차 운전을 한 이였다. 정작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고 말하였다. 아침에 마나님이 잠자리에서 운명하시고 점심께 바깥분이 오수에 들었다가 죽은, 복이 많은 두 늙은 내외의 죽음을 들려주어서 물어본 소리였다. 잘 죽는 게 복이겠으나 그 너머는 어쩔 것인지. 생각을 회피하는 데는 장사가 따로 없다. 일반화시켜서 자신을 비껴 세운다. 보편화하여 그 무게를 던다. 곧 닥치게 될 일인데도 한사코 태연한 척 멀리서 딴청을 군다. 말이 튕겨져 나오는 것 같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이처럼 어제 하루는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고, 한 사람의 방문과 한 사람의 통화가 전부였다. 그리고 아이가 못 온다고 하여, 설교 원고 초안을 작성하였다. 별 수 없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을 위로의 대상으로나 삼는 일도 오만함이다. 물론 이를 외면하고 한사코 자신의 합리적인 이성을 주장하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들을 털어내듯이 자판을 끌어다 본문을 옮겨오고 참고 할 성경 구절을 찾아 메모하였다. 성령이 두시는 그 이상의 생각이나 남의 고통을 짊어지려 드는 일이 헛되다. 이제는 알겠다.
그럴 때 오히려 기도도 안 된다. 도고기도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야 가능하다. 저의 슬픔에 나까지 매몰되면 곤란하다. 혹은 너무 멀찍이 떨어져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기도노트에 저의 이름을 적고 그 사연을 메모하였다. 물론 ‘나도 안 아프게 해주세요.’ 하고 빙충맞지만 단순명료하게 적어놓았다. 아픈 게 일인데 아픈 게 싫다. 앉기도 눕기도 누굴 생각하기도 무얼 바라기도 어려운, 아픔이 나는 두렵다. 의사는 엑스레이를 보며,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건. 하는 말에 나는 종종 절망하면서도 안도한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내 생각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주가 부르신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더 바라는 게 죄의 속성이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너머의 일을 꿈꾸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수시로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같았다.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니! 설마, 하고 같이 웃어넘기다가 내가 아는 저들의 형편이 그리 나쁘지 않은데? 하고 갸우뚱하였다. 복에 겨워 헐거운 마음이겠다.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 걸로는 충족이 안 되니까 돈도 필요하고 건강도 더 필요하다. 이번에 어디로 선교를 나간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왜? 하고 물었다. 150만원씩 자비를 들여서 며칠 다녀오는 것으로 무슨 선교를 꿈꾸는지. 문화체험인가? 힐링캠프인가? 덧붙여 물어보지는 못했다. 왜라니요? 오히려 내 질문에 어처구니없어하니까! 아이 낳고 3, 4년 동안 제가 얼마나 예배를 갈급 하는데요! 억울해하듯 항변했다. 그러니, 낭만적인 것이야 별 수 있겠나. 아무리 줘도 감사는 없는 것이다.
작위적인 하나님과 당위적인 예배는 모두 우상숭배다. 나름은 경건을 도모하나 그 이익을 구하는 것은 사탄의 일이다. 종교가 그런 것 아닙니까? 그게 불교가 됐든 기독교가 됐든 그게 다 사람 사는 데 이롭자고 하는 일이지, 안 그래요? 이 나이 되도록 살아보니까 정답은 없는 거예요. 각자 그냥 자기만족대로 사는 게 인생이지! 안 그래요? 하는 저의 말에 나는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억지로 열 수 있는 게 아닌 다음에야, 별 수 있겠나. 그러게. 다 자기만족에 겨워서 산다.
그렇듯 자기만족에 겨워 사는 걸 두고 오늘 말씀은 그게 아니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13).” 내가 알아서 두른 외투는 벗어버리기가 쉽지 않다. 켜켜이 덧대고 껴입고는 부대껴서 신음하면서도, 마음을 찢을 생각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으로 내 만족을 바라고 살려니까 말이다.
그런 거 보면 다들 참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이 보통이 아니다. 뭐라 하면 쳐내는 데는 말을 말자. 거기 서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님, 하고 부르며 나는 앞에 앉은 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주님, 하고 부르면서 전화 저편의 구구절절한 저의 사연을 들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18).”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답이 없겠다. 오래 참고 또 기다리시는 긍휼이시다. 공연히 두려워할 거 없다.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음이로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1-22)
묘연한데 확신하여서 입을 다물었다. 해결할 길이 없는 데서는 말씀을 붙든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다 자기 판단과 기준이 있는 것이니, 너무 멀어서 그윽하다. 어찌할 수 없다는 단호한 진단 앞에서 오히려 나는 의연하였다. 그래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도 있겠다. 주께서 큰일을 행하실 것이어서 말이다. 아니면 답이 없다. 사는 날 동안 살아서 사느라 이골이 나는 수밖에. 그러다 어느 길목에서 마주하게 될 회환과 후회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주가 갚아주시리니.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25).” 그렇지 않고는 답이 없는 세상이다. 주의 긍휼하심 앞에서,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26).” 하시는 말씀 앞에서나 위로를 얻는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24).”
까부라져 마음이 저 혼자 시무룩하였던 것이 말씀 앞에서 새 힘을 얻는다. 나야말로 복이 많은 사람이지 않나?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내가 누굴 나무라고 탓할 수 있을까. 그런 거 보면 멀어서 아득하기만 한 말씀을 두고 이처럼 확신을 더하시니 달리 복이 또 어디 있겠나!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40:6).” 내 수고와 애씀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말씀을 들이심으로 기뻐하신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19:18).” 본 것을 확신하게 하시고 확신하는 것을 순종하게 하소서.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11:4).”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데 달리 뭘 더 좋은 수를 바랄까!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7).”
사울 왕을 보면서 우리 안의 본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새삼 저보다 경건한 이는 또 없었던 것 같다. 나름 얼마나 애쓰나? 전쟁에 앞서 손수 제사를 치르고, 그 현장에 (미신적으로)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놓으며, 아무리 전장이라도 금식을 선포하고 맹세를 더하면서까지! 한데 말씀은 단호하시다. 순종이 어떤 값어치 있는 제사보다 낫다. 어떤 헌신보다 귀하다. 순종이라 하면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 주신 삶에서 두신 형편을 묵묵히 준행하는 것. 어쩔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무덤덤하니 받아들임으로 주가 이루시는 한 날의 삶으로 족한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 믿음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결국은 말씀을 붙들고 사는 일로써 더 나은 방도를 나는 이제 모른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 그렇지.
그리하여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11).” 나는 이를 붙들고 살자. 설령 가장 어리석은 삶이었다고 해도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주의 말씀대로, 그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아멘.
이에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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