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8 주일
사무엘상 25장 23-31
아비가일에게 듣다
25: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25: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25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5: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5:27 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 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5: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5: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25: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25: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줄거리
사무엘이 죽었다.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었다.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하고,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 마온에 한 부자가 있었다. 그의 생업은 갈멜에서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로 심히 부자였다. 마침 양털을 깎는 날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다.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사람이었다.
다윗은 나발이 양 털을 깎는다는 소리를 광야에서 들었다. 다윗이 그의 소년 열 명을 보내며 말했다.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내 이름으로 문안하고, 그가 부하게 사는 자이니 음식을 좀 얻어오너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였다.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좋은 날에 왔으니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도 나누어주기를 원하노라 하라.” 소년들이 다윗의 이름으로 나발에게 말했다. 그러자 나발이 말했다.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주겠느냐?”
이에 다윗이 화가 났다. 자기 사람들에게 일러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사백 명 가량을 데리고 올라갔다. 그때 그 소식을 하인들 가운데 하나가 듣고 서둘러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전하였다.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전령들을 보냈거늘 주인이 그들을 모욕하였나이다.” 하고 덧붙여 말하길,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여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지를 알아서 생각하십시오.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어서 더불어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마중 나갔다. 남편 나발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호젓한 곳을 따라 내려가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마주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다윗은 이미 나발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하고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지 않겠다.’ 하고 산을 오르던 중이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댔다. 그리고 말했다.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세요.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세요.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입니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시려는 것입니다.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저도 원합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예물을 내어놓으며 말했다. “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 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세요.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세요.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실 것을 압니다.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입니다.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입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입니다.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실 것입니다.”
그녀는 이어서 말하길,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습니다. 그래야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실 것입니다.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해주세요.”
다윗은 아비가일을 보내 자신을 영접하게 하신 하나님께 찬송하였다. 또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다윗이 말했다.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하고 다윗은 그가 가져온 것을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아비가일이 나발에게 돌아왔다. 그는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크게 취해 있었다. 아비가일은 아침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 들었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같이 되었다. 한 열흘 후에 하나님이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었다. 나발이 죽고, 다윗이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았다.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말했다.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 아비가일에게서 듣다
1. 누가 진정한 주인인가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23).”
아비가일은 자신의 부와 권세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일시적인 것이며 유용한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다. 돈이 권력인 세상에서 진정한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은 매우 어렵다. 더 가지고 더 누리려 할 때, 무엇을 위해 누구 앞에 엎드려야 하는지를 잊는다. 특히 오늘처럼 자신의 꿈과 이상이 어느 우상숭배보다 우월한 것이 되어서는, 이와 같은 말씀이 거북하기 이를 데 없다. 자기 숭배의 시대다. 그럼 나의 주인은 나인가? 나는 나를 책임질 수 있는가? 돈과 명예와 쾌락의 노예로 살면서도 내가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만큼 우스운 꼴도 없다. 아비가일은 대신 엎드렸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2. 허물을 자신에게 돌린다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24).”
엄밀하게 저의 잘못도 아니다. 완고하고 악한 나발의 허물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우린 흔히 누구의 허물을 탓하고 뭐라 비판하기는 잘하면서 정작 그것을 자신의 허물로 돌리는 데는 의아해한다. 세상이 이 모양인 게 왜 나의 허물인가? 아내가 또는 남편이, 친구가 또는 연인이 그 모양인 게 어찌 나의 허물인가? 우선은 기도의 책임이 크고 다음은 암암리에 이를 묵인하였던 생활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가 이 모양이고 지구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나의 허물이 크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오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연상해보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3. 우리의 미련함을 일깨운다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25).”
나발이 그 모양인 건 그렇다 해도, 이에 발끈하여 앙갚음을 하려고 했던 다윗의 다윗답지 못함도 포함이 된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13).” 그만한 일로 나발의 일가를 몰수하려 했던 다윗의 혈기는 어떤 식으로든 옳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게 아님을 일깨운다. 다 좋다 해도 그 좋다는 것으로 매일 생각하고 열심을 다하느라 주를 바라지 못하는 모든 게 미련함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4.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에 합한 예물을 올리고 용서를 구한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 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26-28).”
모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한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시는 주의 섭리인 것을 말해준다. 때론 이해할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이 모든 역사의 주체이심을 알게 한다. 그래서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공식과 같은 반응을 더한다. 그에 합한 예물을 드리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주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주의 거룩하심과 우리의 허물만이 보인다. 이때 내가 가진 것을 주께 드리고, 주 앞에 용서를 구하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공식이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2).”
5. 정작 싸워야 할 싸움의 대상을 일깨운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28).”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엉뚱한 데서 싸우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 안의 혈기와 분냄은 고스란히 그 싸움의 기준이 잘못된 것을 일깨운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욱, 하고 감정이 일었다. 이는 내가 어찌 해보려고 할 때 드는 자기방어다. 내가 내 집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주의 교회를 이뤄가는 것도 아니다. 내가 내 생명을 연장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장래의 그 영원을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고후 10:4).”
그러므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6.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 싸개 속에 싸여있음을 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29).”
살고 죽는 모든 이치가 주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음이다. 우리는 늘 당장의 문제에 시달리며 너무 바짝 붙어 연연해하지만, 실은 우리를 구하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에 의한 게 아니다. 오늘 날 펼쳐지는 정치 상황을 봐도, 저보다 엄청난 힘과 권력을 가진 자가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속수무책이라. 자신이 에워싸서 감추고 포개 더욱 견고하게 한 줄 알지만 그 모든 게 모래성만도 못한 것이다. 한 줌도 안 되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쥐고 휘두르려고 할 때, 아뿔싸! 우리의 생명은 주의 생명 싸개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이는 주가 도우심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우리에게 물으신다.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7. 장래의 일을 살펴 오늘을 산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30-31).“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주인인 체 한다. 그래서 보험을 들고 저축을 하고 노후대비를 하고 기타 등등 할 수 있는 걸 다 갖추었다 해도, 모든 게 허망할 따름이다. 되레 우리가 잠시 저들보다 못한 것 같고, 어리석은 것 같으나 영원한 영광의 때가 되면 알 것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바보 같다. 때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과감히 증거한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우리에겐 이 땅 너머의 장래가 있다. 고작 몇 년의 노년을 위해서도 그처럼 대비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작 영생의 그 영원한 생을 위해서 우린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
오늘 아바가일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일깨운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가를 바로 알려준다. 저는 현숙한 여인이라.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첫째, “훈계에 착심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잠 23:12).” 이와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게 지혜다. 둘째,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31:30).” 이 땅의 모든 고운 것과 아름다운 것은 헛되다. 다 늙고 병들어 못 쓰게 되고 기어이 버려진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칭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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