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전봉석 2018. 1. 6. 07:30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요엘 3:18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시편 33:1

 

 

 

 

스무날이 금세 지나갔다. 이번 방학에 아이가 왔다가 앓기만 하다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딸애가 일찍 퇴근하여 온가족 저녁을 사주었다. 휴가 나왔다 복귀할 때 표정처럼 아들 녀석은 말이 없었다. 몸은 괜찮니? 약을 좀 더 지어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나란히 걸으며 묻다, 도대체 나의 부모는 어떻게 평생 나를 키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다 늙은 아들인데도 돈도 없는 양반들이 몸에 좋다는 숯 침대를 사주었을 때도, 먹먹하여서 뻐근한 것인지 고마움보다 죄송함이 더 크더니.

 

이삼일 끙끙거리며 감기를 앓더니 그래서 나갈 날이 다가오자 조금은 나은 듯하여 다행이긴 한데. 유난히 설교 원고가 써지지 않아 점심도 먹으러 가지 않고 끙끙거렸다. 마음은 겉돌아 자꾸 딴청이었다. 새로 6학년 아이가 중2 아이와 함께 와서 처음 수업을 가르치면서도 흥이 나지 않았다. 탈고를 하고, 주보까지 출력을 끝내놓으니 4시 반이 되었다. 공연한 서글픔에 자꾸 마음은 저 혼자 휘청거렸다. 5학년 아이와 약속한 대로 ‘걸쭉한 라면’을 끓여주어 수업을 다 마치고 걸레질을 하면서도. 나의 부모는 대체 나를 어떻게 키우셨을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어쩌면 이와 같은 체념이 주의 도우심만을 의뢰할 수 있게 하는 게 아니었을까?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7-8).” 그렇지. 그 값을 무슨 수로 감당하나. 주께 맡기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마음들에 대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견고한 의뢰만이 살 길이다. 그게 안 되니까 안달복달 내가 끌어안고 씨름하고 주춤하다 덩달아 주저앉아 갈 길을 미루고는 하는 것이겠으니. 살려도 주님이 하시고 죽여도 주님이 하실 것을.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특히 사명자로 산다는 일은 내 가족, 내 자식을 건사하느라 볼 일 다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참 모질고 야속하기도 했던 어린 날의 기억을 이제는 용서하고 축복할 수 있겠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운데 주렁주렁 가족들을 거느리고 나의 아버지는 어떻게 주의 길을 마다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삐악거리는 자식들 가운데서 늘 아픈 데 손이 가는 큰 자식과 시원찮던 막내 녀석을, 나의 어머니는 어떻게 안달부리지 않고 이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었을까? 무심히 둘러앉아 같이 식사를 하면서 나는 내 앞에 있는 두 아이를 보며 생각하였다. 하나님이셨구나! 우리가 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아내와 늘 동의하는 고백이다.

 

그리하여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4).” 나는 이를 상처받기 쉬운 영혼으로 이해하며 읽었다. 내 안에 여전히 어린아이를 생각하였다. ‘마음에 숨은 사람’을 자식으로 놓고 늘 애잔한 마음을 생각하였다. 또는 자꾸 눈에 밟히고 마음에 걸려,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듯 마음이 쓰이는 ‘누구’로 생각하였다. 어쩌면 말할 수 없는, 사람. 그를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않을 것으로 하라니?

 

자라가야 한다. 모든 생명은 죽는 날까지 자라가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여전히 그 답보 상태에 빠진 경우는 이를 우회하거나 멈추었기 때문이다. 한 5년만 돈을 좀 벌려고요. 나는 엊그제 저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사역은? 목회 안 하고? 저는 뒤이어 어쩔 수 없는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는데, 어쩌자고 그러는 것일까? 5년이면 될 거 같아? 그리고 돌아오면 좀 나아졌을 것 같아? 이제 아들애가 네 살이니까 오히려 그때는 돈이 많이 들어갈 텐데. 나는 다급한 심정으로 다음 주 초에 언제 직접 좀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였다.

 

그 마음을 백 번이고 이해한다. 천 번이고 안타깝다. 그러니 도대체 나의 부모는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우리 사남매를 다 키워내면서 목회를 접지 않을 수 있던 것일까? 오죽하니 어릴 때 난, 목사를 하려면 결혼을 해서는 안 돼! 자식을 낳으면 안 돼! 가족이나 자식들이 뭔 죄야? 하며 혀를 내찬 적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내가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온 것이 그 이유였겠구나. 언제 이렇게들 다 자라 장성하여 어른들이 되었나? 내 눈엔 여전히 콜록거리며 시무룩한 어린아이로밖에 안 보이는데.

 

‘마음에 숨은 사람’은 어느새 내 안에 성령이시었다. 내 자식인 줄 알았는데, 내 자신의 유약한 자아일 줄 알았는데, 그걸 돌보느라 그처럼 온전하고 안정된 심령으로, 곧 주께 의탁하면서부터 썩지 아니할 것으로 건사하는 일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이니라.’ 아! 그게 나의 약점이든, 또는 나의 못난 숨겨진 자이이든, 그것으로 주 앞에까지 이르게 하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구나! 우리의 찢어지듯 가난했던 날들이, 또 늘 생인손처럼 가슴을 절절하게 하기만 하던 자식들이, 혹은 어떤 눌린 자아가 역으로 주 앞에서 값지고 소중한 것이었구나.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날에 그 힘겨웠던 것들이 열매였음을 오늘 본문은 암시해주고 있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욜 3:18).” 이를 알 수 있는 게 의인들이라.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시 33:1).” 내 영혼의 즐거움이었다. 나의 약한 데서 강함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떠하든 그 은혜가 족하다는 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 말씀이었다. 내가 약하지 않았더라면 이 큰 은혜를 어찌 알까? 전에는 콤플렉스고 징크스고 약점이면서, 가는 걸음걸음마다 걸림돌이 되려는가 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안에서 머무시는 것이었다.

 

내가 아들에게 느끼는 안쓰러움, 미안함, 어떤 안타까움이 도리어 축복의 날에 단 포도주가 되고 흘러넘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왜 그런가 했더니, 나는 기도함이라. 그것으로 인해 더욱 주를 의뢰하고 바라기 때문이라. 나의 약함이 절대로 강한 게 되어 나를 이롭게 할 것이라는 게 아니었다. 그것으로 주를 부르고, 그것 때문에 더욱 주 앞에 겸손하여져서, 견고한 의뢰가 아니고는 살 수 없는! 주밖에 나의 마음을 뉘 알아주리오. 오직 주와 나의 문제였다.

 

아, 내 안에서 행하시는 이이셨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아픔인 줄 알았는데 즐거움이었고, 슬픔인 줄 알았는데 기쁨이었다.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결코 막연하여서 어쩌다가 이루어지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아픈데 아파서 자세히 본다. 슬픈데 슬퍼서 연거푸 되새긴다. 힘이 없으니 더욱 힘을 모아 선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이었다. 나의 약점인 줄 알았는데 나의 강함이 되었다.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래서 그 값이 그리하여 귀하고 컸던 것이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이었다. 미리 아시던 그때부터 나의 나 됨을 다 알고, 예비하고 책정하사 오늘에 두시는, 나의 ‘마음에 숨은 사람.’ 곧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어느 것도 허투루 뚝딱 생겨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다 오늘이 아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아, 그래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

 

그 다음이 신령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6).” 처음부터 신령한 사람을 어찌 알아볼까. 그래서 육의 사람으로 닳고 닳아 더는 힘에 겨워 못할 것 같을 때 두 손을 들게 하시더니, 이내 주께서 이루시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의 생에 달려 있었다. 나로 하여금 주를 영화롭게 하게 하시려고. 그래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게 하나도 없다고 하셨던 것이구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내 가난도 장애도 안고, 이고, 짊어지고 사는 내 안의 숨은 사람도 모두가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려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랬던 거였다. 말씀이 말씀으로 이어지면서 말씀하시는 데 놀랍다. 잠들기 전까지 꾸물거리며 우울하였던 마음이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이다.

 

하나님은 선이시라. 모든 게 주께 향할 때 선을 이룬다. 그러니 의인들아 찬송해라.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시 33:1).” 오늘 말씀은 그리 일깨우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21).” 그러니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욜 3:13).” 그날이 온다.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14).”

 

곧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18).” 이는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33:11).” 그러므로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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