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기뻐하리로다

전봉석 2018. 1. 7. 07:3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아모스 1:2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시편 34:2

 

 

 

햇살고운 주말이었다. 창으로 듣는 따사로움이 눈이 부셨다. 오전에 일찍 올라와 췌장암 진단을 받은 동기 목사의 안부 글에 위로의 말을 남겼다. 안양에 있는 모 병원으로 옮겼다는데, 친구 동생이 위암으로 하나님께 간 그곳이었다. 나는 혼자 여러 생각이 많았다. 점심나절에 아들이 아내와 트렁크를 끌고 나왔다. 내려가 설렁탕을 먹였다. 감기기운이 남은 데다 가기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하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올라와 잠깐 말씀을 들고 앉았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어쨌든 산 자들은 살아서 생을 다하기까지 나름의 가치를 붙들고 산다. 나는 이를 세 종류로 나누어 들려주었다. 나름의 경건을 사모하며 성실과 담력으로 용기를 잃지 않고 사는 무리가 있다. 저들은 바울 시대에도 있었던 스토아주의자들이다. 생각이 온건하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 인생을 나그네로, 오늘의 여인숙으로 삼고, 한 번 사는 생을 값지게 삶으로 가치를 둔다. 또 다른 한 무리는 즐거움과 쾌락을 좇아 자기만족을 우선으로 하여 산다. 낙천적이며 흥이 많고 뭘 하든 진취적이다. 이들도 바울 시대에 같이 했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다. 딱히 어느 쪽이냐를 떠나 둘 다 자신의 주인을 자신으로 두고 산다.

 

그럼 우리는 저들 둘과 어찌 다른가. 우리에겐 영생이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지금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영생이다. 영생을 사모함으로 보면 잠시 받는 지금의 환난은 가볍다. 왜냐하면 지극히 큰 영원한 영광에 비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 운전사로 누구는 사업가로 누군 장사꾼으로 누군 의사로 교사로 나름의 열심을 다해 산다고 할 때, 주신 삶에 최선을 다해 감사함으로 사는 게 제일 아름다운 것이겠으나, 그렇다면 나는 네가 평생을 말씀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며 한 영혼을 향해 씨름하며 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직설적으로 권하였다.

 

둘러 서로 손을 잡고 기도해주었다. 석별의 정은 언제나 어렵다. 나는 교회 안에서 작별했다. 아내는 역전까지 내려가 배웅하였다.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고, 아내는 모정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와 맥이 풀렸다. 기침을 몰아댔고 천 근 같은 몸을 뉘어 끙끙 앓았다. 오후께 혼곤한 잠에 취했다가 일어나니 한결 몸이 나았다. 그러게.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 결국 나에게 향한 말씀이었다. 신앙고백은 삶으로 반응한다. 인생 안팎의 모든 일에서 얼마나 주를 신뢰하는지, 보이지 않는 영광을 바라며 보이는 잠깐의 고난을 어찌 잘 견뎌내는지. 누구나 제 몸 무게 이상의 고통을 지고 사는 게 세상이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다급하심을 느끼게 한다.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암 1:2).” 단순히 부르시는 게 아니라 부르짖음이시다. 시온에서부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신다. 옆에 누가 췌장암으로 누워 신음하고 있는데도, 어디서 불길에 휩싸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80년 만에 폭설이 일고 영하 50도까지 이르는 한파가 불어 닥쳤다는데도, 지구 곳곳에서 그 부르심이 다급하신데도 우린 어쩌면 너무나 태평하다.

 

고통은 늘 절대적인 것이라 누구 이야기를 백 번 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저들이 하나님의 것을 함부로 여기고 치부하면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이를 주목하며 주 앞에서 온전히 경계하며 살아가는 생이어야 하지 않겠나. 그때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 34:2).” 내가 주를 자랑할 때 곤고한 자를 주의 말씀으로 위로할 수 있겠고, 이를 듣는 이가 기쁨으로 화답할 수 있는 것이려니. 이는 결코 개인의 성향이 아니다. 기질에 따라 다른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예수의 생명이 내 몸에 나타나게 하려, 나에게 두시는 이런저런 마음의 곤고함에도 주목하는 것이다. 다들 자기 생각에 겨워 산다. 같은 목사도 붙들고 가는 게 다 다른 것 같다. 누구는 의를 구하고 누구는 선을 구하나 그것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 속빈강정이 너무 많다. 겉은 번드르르한데 든 게 없는, 사울 왕에 대해 전 주에 이어 이번 주일에도 본문으로 삼으면서 나는 결코 나의 경건이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닌 것을 확신하였다.

 

나 또한 다를 게 뭐 있겠나. 다 지 멋에 겨워 사는 것처럼, 나 역시 다를 게 없겠으니 주구장창 말씀 앞에 세우는 수밖에. 말씀은 언제나 내 허를 찌르신다. 아무도 모를 위선과 아집을 지목하신다. 그러니 내가 누굴 탓하랴. 기질적으로 따진다면 바울처럼 약골이 또 어디 있겠나.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10:10).” 그런 사람이 악으로 깡으로 선을 구하였으니, 예수를 잡으러 다녔겠다.

 

그래 맞다. 나야 말로 밖으론 다툼이고 안으로는 괴로움이구나.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7:5).”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이런 소릴 하는 게 민망한 일이기는 하겠으나, 각자 저마다 제 몸 무게 이상의 고난을 짊어지고 사는 게 인생이라.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아둔한지. 이를 내게 알게 하시려고 육체의 약함과 마음의 어눌함도 허락하시는 거였다. 그러니 늘 싸워봐야 지는 싸움일 텐데도 돌아보면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아들을 보내며 울컥하다, 어깨가 아파서 자판을 치기 괴로워하다, 외로움으로 또는 서글픔으로 쩔쩔매다 말씀 앞에 가만히 세워놓고 보면 다 지는 싸움이었는데 이기고 있었다. 그러니 놀랄밖에. 세상은 다 이긴 싸움에서 번번이 지는 판에 나야말로 하는 것도 없이 맥도 못 써보고 다 진 싸움이었는데 이기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오늘 시인은 그 답을 이렇게 제시한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시 34:7).” 다윗은 아멜렉 앞에서 미친 척하며 간신히 살아나서 고백하는 기도이다. 자존심이 상해서도, 억울하고 분해서 다 졌다고 포기해야 할 일이었는데,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1).”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저는 알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8).”

 

그러니 지금 잠깐 받은 고난이 가볍다는 걸, 나중에 받을 영광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임을. 나는 아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전하였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너무 애쓰지 마라. 우리를 주께 맡기자. 곽재구 시인의 동화 가운데 어린 참새가 멀리 나는 갈매기에게 물었다. 어떻게 당신은 그리 먼 길을 날 수 있지요? 그러자 갈매기가 말했다. 기류를 타야지, 우리의 날갯짓으로는 어림도 없어! 바람을 의지해야 해! 

 

펄떡거리며 날갯짓을 수만 번 해본들 대체 얼마나 멀리 더 높이 날다 지쳐 떨어져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자기만족을 위해 사는 게 아니었다. ‘기류를 타야지.’ 성령의 기류를 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야지. 나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8).” 그 비결은 주목하는 게 다른 것이었다. 갈매기가 말했다. 멀리 봐. 저기 창공 너머 미지의 세계를 봐. 그리고 바람에 몸을 맡기는 거야. 그때 너의 날갯짓이 훼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 자칫 바람에 오히려 네 날개가 꺾일 수도 있어!

 

아이들과 같이 읽었던 곽재구의 <아기 참새 찌꾸>가 생각난다. 이를 오늘 말씀으로 비춰보면,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 저는 지금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체 하고 살아난 사람이다.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고 열패감에 몸서리쳐질 지경이었을 텐데, 오히려 권하여 이른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18).”

 

누가 주인인지, 누가 진정한 승자인지, 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19).” 주를 바라며 산다는 일은 이성적으로 무모하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고, 당장에 처한 상황에선 적용이 안 되는 일 같다. 그래서 나이 들어 더는 기력을 다하지 못할 때 마음 둘 곳 없는 사람들이나 종교에 의지하며 말씀에 수긍하는 것이겠거니, 그리 여긴다면 뭐라 할 말이 있겠나.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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