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전봉석 2018. 1. 8. 06:4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아모스 2:6-8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35:28

 

 

 

잊을만하면 내 안에 이는 말, 이래도 계속 할래? 이 길이 맞나? 과연 이대로 있어도 되나? 싶은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 일었다. 새해의 기도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 주세요, 하는 것이었는데 답은 없었다. 돌아서기도 물러서기도 어렵게 되었다. 아내와 둘이 예배를 드리며, 현상은 그러한데 마음은 평안하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내 평생에 가는 길>을 작시한 스패퍼드에 대한 일화를 알고 있다.

 

저는 성공한 변호사였다. 아내와 네 딸과 함께 유럽 여행을 계획하였고, 자신은 밀린 일처리 때문에 뒤따라 합류하기로 하고 보스턴에서 배에 올랐다. 그러나 그 배는 침몰하여 네 딸은 죽었고 아내만 간신히 구조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71년 시카고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저의 집과 사무실은 불에 탔다. 하루아침에 가난뱅이가 되고 사랑하는 네 딸을 잃은 슬픔으로 저는 주 앞에 앉았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던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 이론이나 상식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닌 것이다. 가시적으로 부흥을 놓고 기도하는데 도리어 감감무소식이었던 주일 날, 그러게! 신기하게도 나의 영혼은 평안하였다. 이래도 되나? 싶게 마음은 끌탕하지 않았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하던 저의 결연한 기도가 나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였다.

 

슬픔이 파도처럼 일렁일 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던지

주님은 내게

내 영혼 평안해

주님이 가르치시네

 

막연하여서 때론 목을 조이는 듯한 우울감에 사로잡혀 견딜 수가 없을 때에도, 내가 저를 어찌할 수 없어 속만 태우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에도, ‘내 영혼 평안해, 주님이 가르치시네.’ 저의 노래가 내 것이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상황은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나를 달라지게 하시는 것이다. 무엇도 주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확신.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주시는 대로 묵묵히 준행하며 걸어갈 수 있게 하실 것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는 데 대한 믿음이 어느 때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 눈보다 더 정하리라

 

문득 주시는 생각이, 너무 지나치게 가까워서도 안 된다. 교회니, 한 영혼이니, 주일이니, 마치 내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시지 못하시는 것처럼. 또는 어떤 상황이나 문제 앞에 너무 밀착하여 붙어버리면 동시에 문제는 내가 되어 헤어 나올 수가 없어진다. 나는 나고 저는 저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너무 가깝지도 또한 너무 멀지도 않게,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그 거리에 비례하는 것은 주를 신뢰함이었다. 어떠하든지 내 영혼은 평안하다는 것에 대하여, 그럴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값을 지불하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보다 그 문제에서 너무 밀착되어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거였다. 아무런 성과도 없는 듯한데 주님은 요단을 건너라고 하신다. 건너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벌일 전투를 설명하신다. 그런데 나는 요단을 마르게 해주면 건너겠다고 하는 꼴이었으니, 한 마디로 가기싫다는 소리였겠다. 실제 이건 문제도 아니었던 것을, 믿음으로 딛고 서면 그만이고 오히려 온갖 전투가 벌어지는 데 따른 전쟁과 전쟁의 치열함이 문제였을 것인데, 것도 실은 주가 다 치르시는 전투였으니.

 

하는 것도 없는 게 마땅하였다. 순종이란 그런 것이어서 뭘 꼭 이뤄내고 해야 하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가만히 또 가만히 주를 바라며 듣는 것이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인생 길 그 허망함에 대하여, 내가 뭘 대단히 일궈내야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겠나. 어쩌다 그리 대단하여서 처벌처벌 교회가 넘쳐나고 숱한 격무에 시달리고 고달파야 옳은 줄 알게 되었나. 이는 모두 수단에 불과하여, 설마 그것으로 사람을 끌어 모아 죽었다 살아났다는 나사로도 볼 겸 예수께로 가자하지 않겠나.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면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어떻게 모든 걸 잃고도 그리 평안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나는 논리적으로 서술할 수 없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준비한 말씀을 늘 하던 시간만큼 또는 더 열중하여 증거 할 수 있었으니, 이는 나를 위한 말씀이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고, 불순종은 우상숭배라. 순종은 듣는 것이고 불순종은 먼저 행함이었다. 이를 오늘 아침 말씀에서는 모압에 대해, 유다와 이스라엘과 아모리에 대해 예언으로 들려주신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암 2:6-8).”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돈을 받고 의인을 팔고 신 한 켤레에 가난한 자를 팔 정도였으니, 힘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으니, 함부로 굴던 것이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자에게 다니는 꼴이라. 주의 거룩을 더럽히는 이 땅의 온갖 사소함에 대하여.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6-7).”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아내와 둘이 내려가 쌀국수를 먹고 올라왔다. 아이들과 같이 먹으려던 빵은 신기하게도, 옆 사무실의 가족들이 무슨 물건을 나르느라 다 같이 나왔다가, 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주스도 만들어주었다. 아내의 잔기침은 여전하였고 나의 어깨 결림은 계속되었다. 아들은 무사히 들어가서 또 멀리 라구나에 있는 교회에까지 무사히 다녀왔고, 딸애는 교역자 회식까지 끝내고 밤 열 시나 되어서 귀가하였다. 일상은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무덤덤하니, 나는 주어진 바 한 날의 생을 다하는 것이 사명이었다.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35:28).” 새삼스러울 거 없다. 그런데도 이 길을 계속 갈래? 이대로 있어도 되나? 하는 따위의 속삭임에 대하여는 이제 묵살한다. 순종이란 듣는 것. 주가 내게 이르시는 말씀에 나를 올려놓는 일.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13).” 고로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온다. 누구를 위한 기도, 대중을 향한 설교, 만인을 위한 교회 등은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이지 내가 설쳐서 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다만 묵묵히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9).”

 

주님이 다 이루신다. 나는 다만 주가 두시는 데 있을 뿐이었다. 다 저녁에 모처럼 친구 전화가 들어왔다. 벌써 지난 해에 돌아가신 모친의 기일이었다. 그런데 문득 내 생각이 나더라나. 여전하여서 술을 한 잔 했는지 말이 횡설수설하였다. 어쩌겠나. 널 위해 기도하마. 내가 더할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는 없는 것인데, 것도 도로 내 품으로 돌아오니 내 영혼은 평안하다. 주가 다 하신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1).”

 

다만 나는,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달리 더 좋은 수가 내게는 없다. 늘 또 그 타령이어서 저는 비트코인을 얼마 때 더 샀어야 하는데, 얼마 때 팔지 못해 어땠다느니 하는. 서로는 이제 외계어로 말을 나누는가, 도무지 그 관점이 다른 것이다. 아,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13).” 차라리 저가 아플 적에 눈이 멀고 그대로 앉은뱅이가 되었으면 더 나았던 것일까? 기도를 부탁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던 게 고작 병이 낫고 보니 인생 다 대수롭지 않은 게 되었는가?

 

나는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9).” 서로의 길이 다른 것이면 더는 어쩌겠나.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염치없게도 나는 자꾸 받기만 하는데 내 것까지도 도로 내 것이 되는구나.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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