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전봉석 2018. 1. 9. 07:05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아모스 3:7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시편 36:10

 

 

 

어쩌겠어요, 제가 선택한 건데! 하는 그이의 말에 그게 어찌 그런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일을! 하고 반박하였다. 모진 게 사는 일이다. 현실은 냉혹하리만치 실제이다. 그래서 자꾸 막연하고 낭만적인 생각 속으로 숨으려 든다. 그래서 선교를 떠나는가? 나는 좀 답답하였다. 마음이 부패하여서 경건으로 이익을 도모하려는 무리가 많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결혼을 후회하는 저이에게 나는 해줄 수 있는 말이 몇 개 없었다.

 

하늘이 낮아 종일 을씨년스런 날이었다. 햇살이 듣지 않는 글방은 추웠다. 저이는 돈을 벌려고 취직자리를 알아보며 동분서주하던 중에 나에게까지 왔다. 사모다.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사모들이 돈을 벌어 목회를 돕는 게 유행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다들 그래요. 마치 당연하다는 말에 그 인식의 얕음을 엿볼 수 있었다. 섣불리 말을 옮길 일이 아니어서, 나는 저들 부부의 이야기는 글로 가져올 수 없다. 다만 내가 친정오빠이거나 친청아빠라면 억장이 무너져 당장이라도 요절을 낼 판이었다. 그만큼 안 됐고 속상했다.

 

그게 참.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6).” 그렇다고 이혼이 흉이 아닌 세상이라 하여 못 견디겠으면 그리하라고 말해줄 수 없었다. 도리어 소나기를 피하려다 우박을 만나는 꼴이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주의 사랑으로 남편을 품으라, 누구와 비교하며 신랑에 대해 서러워하지 마라. 나의 말은 허공을 휘젓다 마는 듯 공허하였다. 오죽하니 저를 목사로 붙들어 세우셨겠나? 나는 그리 반문하였다.

 

아니었으면 자폐성 기질로 혼자 떠돌거나 강퍅함으로 남을 해코지 하는 사람으로나 살아갔을 터인데.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그의 유년시절에 대하여 또 그 부모의 막돼먹은 젊은 날의 그릇됨에 대하여 그것을 핑계 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덴 동의할 수 없었다. 저가 비로소 주를 만나야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나 변하여야지. 거듭나야지. 목사가 그래서 게임에 빠져 있다니, 그게 제정신인가! 주가 이뤄 가실 것을. 주께서 관여하여 통치하시기를. 안 사람인 그대가 더욱 기도로 주의 마음으로 다가가기를 말해주었다.

 

자꾸 울기만 해서 뭐라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련의 상황들을 고백하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과연 그럼에도 참고 살아라, 하고 말해주는 게 맞는 것인지. 그러니 당장 이혼하고 그만두라고 이르는 게 나은 것인지. 나는 저이가 울면서 말할 때면 할 말이 없어 주의 이름만 불러야했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가지고 주께 나아갈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돌아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읽은 말씀이다. 뭐라 할까? 그게 나인데. 나는 더했는데. 그런 나를 주께서 은총을 더하셔서 오늘에 부르신 것인데. 주의 긍휼하심만 바라고 주께 기도하자. 더 많이 위하고 사랑할 수 있게, 그 사랑이 내 수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기를. 그리 당부하며 돌려보내고는 마음이 어려웠다. 한데 가정예배가 끝나고 딸애가 지 사귀는 애와 통화를 하면서 설교원고를 피피티로 만들어서 보내라는 둥 어쩌고 하며 킥킥거렸다.

 

장난으로 하냐? 돈벌이로 삼으려나? 나는 다그쳐 야단을 쳤다. 거기다 누구 올 때까지만 임시로 대타 뛰는 것인 양 표현을 해서 참았던 욕을 퍼부었다. 사람 관계는 그리 다 망쳐도 괜찮고, 심지어 일처리가 엉성하여 성긴 데 없어도 그건 어쩔 수 없다. 한데 말씀을 전한다는 것들이 말씀으로 씨름할 생각은 않고! 어물쩍 어디서 프레젠테이션 하는 게 설교냐? 그렇게 보고 자랐냐? 그 자식은 그 정도도 안 되냐?

 

농담으로나 듣고 웃고 말려던 게 심각하게 되었다. 그럴 거면 사역을 한단 소릴 하지 말아야지! 어디서 돈벌이로 삼아 잠시 계약직처럼 굴려고 하나. 누가 어떠니 하는 따위는 관심없다. 다들 그런다는 둥 누구도 그런다는 둥 하는 소리에 더욱 언성을 높였다. 네가 그 말씀을 붙들고 씨름해야지. 그걸로 먼저 주 앞에 엎드려야지. 목사가, 전도사가 말씀 말고 도대체 다른 무엇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건지.

 

답답하였던 마음이 딸애에게 퍼부어 야단을 치게 된 꼴이다. 해이하면 안 된다. 그저 웃고 말 일이 아니다. 남이 쓴 설교 글을 가져다 그것도 피피티까지 다 해서 만들어준 걸 들고 아이들 앞에 서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그래서 애들이 좋아하면? 교사들 호응이 좋으면? 대체 누굴 보고 그 일을 하는 거냐? 눈물이 핑 돌게 야단을 쳤다. 오늘 아침, 그래서 말씀이 더욱 준엄하게 들린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어찌 주의 내밀한 말씀을 허투루 듣고 운운하며 말재간을 부릴 요령인지. 혹여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또한 재미난 것이 될지 모르겠으나, 그러는 거 아니다. 그럴 거면 당장 때려 쳐라. 뭐라 하고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는 물정을 몰라 하는 소리일까. 혼자 들어앉아 있으니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건가. 결국은 사람들인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옳지 않다고 본다. 설령 다 떨어져나가고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다 해도, 말 그대로 한 영혼을 붙들고 주의 사랑으로 대하고 귀히 여기는 데 있어  기어이 말씀이어야 하지 않겠나?

 

흥을 돋우어 사람을 끌어 모은들? 그래서 부흥하여 요란하고 화려한 교회를 이룬들? 목사가 게임에 빠져 있고, 어떻게 돈벌이에 연연해하며, 사람들 이목이나 끌려고 한다면 더는 희망이 없지 않겠나? 오늘 말씀을 좀 더 묵상한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3).” 그러니까 말이다.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4-5).”

 

말씀으로가 아닌데 어찌 한 영혼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람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6).”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을 빙자한 마음은 난무하다. 당최 왜 없는 형편에서도 150만원씩이나 들여 해외로 선교를 나가려고 하는지. 힐링이 목적인가? 문화체험인가? 선교관광인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논리 앞에 나는 속절없다. 뭐라 말을 하면 그게 들려져야 말이지. 주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자기를 위하는 데야 속수무책인 것이다.

 

나는 아침에 읽은 다윗 이야기를 생각하였다. 저의 무모함이 어디서 나오는가.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 17:26).” 저와 같은 분개가 우리 속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 세상을 향해서 뿐 아니라, 이제는 교회를 향해서도 말이다. 언제부터 돈이 말해주는 교회가 되었나?

 

사람 수가 곧 돈이다. 사람이 모이면 수익이 창출된다. 그러니 갖은 행사를 이끌어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다 좋다. 그럴 수 있고, 큰 교회니까 지역사회를 위해 그래야 하는 게 또 마땅하다고도 하겠다. 그런데 그게 목적인가? 그렇다면 최소한 목회자는 말씀으로 씨름해야지 행정이 아니지 않겠나? 저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선교라는 미명 아래 자기 취향을 선호하려 드는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32).”

 

저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다른 더 좋은 수를 찾는다면, 이는 사기꾼이다. 그러는 거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나는 마치 나에게 당부하듯 결연하여 딸에게 말하였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

 

오죽하니 목사로 세우셨을까? 이를 마치 대단한 특권인 양 구는 것도 어리석지만 대수롭지 않은 여느 직업군 가운데 하나로 삼는 것은 더욱 어리석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히 11:33).” 그 믿음이 어디서 나오나? 말씀이 들음이 없이 어찌 믿음이 생겨나겠으며, 말씀을 붙들지 않고 어찌 한 영혼을 마주대할 것인가. 우리가 뭐라고? 부디 정신 차리시길! 애는 커가고, 돈은 없고. 어쩌고저쩌고 이어지는 동기의 지청구에 나는 버럭 화를 했다.

 

살만하다. 자가 아파트에 고급 자가용을 몰면서 그런 소리가 나오나? 그게 우리 게 아니라 부모님 것이라 한탄하며 억울해하길래, 그럼 벗어야지. 홀가분하게 말씀만 들고 나서야지. 다윗이 사울의 갑옷을 입고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어쨌든 자기들에게 물려줄 것이라 여기고 사는 것 아닌가? 나는 다그쳐 야단을 쳤다. 마치 고급 세단을 몰면서 기름 값을 걱정하는 꼴이지 않나. 어디서 배부른 소릴. 신랑이 그러면 자네라도 정신 차려야지. 그걸 두둔하며 같이 투덜거리고 있으니, 사역이 무슨 돈벌이가 된다고 용이 차겠나? 답답하여, 저의 눈물이 철딱서니가 없어서 나는 자꾸 할 말을 놓쳤다.

 

중첩되는 게 나이어서 말이다. 내가 그러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아니 그런가.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8).” 그래서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시 36:10).” 아뢰고 구할 따름이다. 말하다 보니 나는 득도하여 다 이루었다 하는 소리로 들릴 것 같아서 그렇지 않음을. 여전하고 똑같아서 날마다 넘어지고 또 쓰러지는 빙충이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그래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가난한 마음 말고 뭘 더 주 앞에 내어드릴 수 있겠나. 주가 아니시면 살 수가 없겠는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인간이 나 자신인데. 정말 끔찍할 정도로 안 바뀌는 게 실은 나 자신인데.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나는 주 앞에 애통해하는 것임을.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주의 도우심만 바라고 또 구하는 것임을.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암 3:13).” 그래서 증언한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시 36:5-6).” 그러니 나를 붙드시고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좌절하고 실망하여 주 앞에 고꾸라진다. 그랬을 때 내 안에 이는 더욱 단단한 확신이 있었으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7).”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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