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20 주일
로마서 3:19-31
하나님의 한 의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들어가는 말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롬 3:1).”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믿는다는 사람이 더 나은 게 무엇인가? 성경을 가졌고, 안다고 자부하는 우리의 삶에 그것이 어떤 유익이 있는가? 하고 물으신다.
※ 범사에 우리의 유익에 대하여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2).”
어떤 표준이 결여된 이 땅에서, 기준을 잃고 우왕좌왕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말씀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런 우리의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2-3),” 하는 기본 명제를 우리는 기준으로 삼는다. 저마다 자신의 이성과 또 학식으로, 양심과 또 그 신념으로 자기 기준을 삼고자 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
이에 어떠한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5).” 사람들은 이를 거절한다.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서,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우리들의 상실한 마음의 실태를 살펴본 바 있었다. 그럼 어떤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롬 1:18)? 첫째,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다. 둘째,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셋째, 불의가 하늘로부터 나타나는 사람들이다. 넷째,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미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는데도 말이다(19). 이를 어찌 아는가? 첫째, 최소한 남을 판단하는 우리의 양심이 안다. 둘째, 자연을 경탄할 줄 아는 마음으로 안다. 셋째, 자신과 남을 견주어 저들을 비판하고 판단할 줄 아는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죄를 모르고 짓는 게 아니다(21-23). 모든 죄는 고의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그저 허망하다. 우리의 마음은 어두워졌다. 왜냐하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며, 피조물을 조물주로 삼아 섬기며 살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를 그저 ‘내버려두심’으로 나타난다. 곧 그리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첫째,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한다. 둘째,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긴다. 셋째, 여자를 순리가 아닌 역리로 취한다. 넷째, 음욕이 불 일 듯 일어난다. 다섯째, 이에 따른 보응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다(24-27).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하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신 6:18).” 둘째, 주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그러므로 셋째, 주의하라 깨어 있어야 한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 13:33).” 넷째, 스스로 옳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8:32).”
왜냐하면 누구보다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니 스스로 조심하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그런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말씀은 이를 알게 하신다. 또한 주께서 이를 해결해주실 것이다.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습 3:11).”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단언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곧 스스로의 연약함을 숨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리를 여기에 두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2).” 오히려 우리에게 첫째,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게 하심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저들로 하나님의 이름을 의탁하고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저들 앞에서 증인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말이다. 남들보다 잘나고 뛰어난 어떤 능력을 가져서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를 자랑하였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예수님은 오히려 이를 감사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2. 우리는 거짓되되 오직 우리의 하나님은 참되시다 말할 줄 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3-4).”
믿는 자와 안 믿는 자가 확연히 다른 것은 자신이 어떠한가를 바로 안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넌 할 수 있어! 잘 될 거야! 파이팅!’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산상수훈만 봐도 우리는 결코 우리 의지로 팔복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데 좌절 한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음을, 그래서 믿는 자들은 항상 돌아보면 모든 게 다 주의 은혜였노라! 고백한다. 감사가 나온다. 곧 나의 거짓됨으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풍성하여지는 것이다(5-7).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5-7).”
우리는 우리가 100% 실천하는 것을 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저들보다 착하고 성실하여 얼마나 더 나은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도 다를 바 없음을, 아니 더 고약하고 추한 죄인들인 것을 말씀 앞에 설 때면 입증하게 되는 꼴이다. 감출 수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저들보다 나음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1).”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똑같다(8-20). 아니 더 나쁘다. 성경을 알면 그 아는 것으로 심판에 이를 것이다.
앞서 우리는 모두가 죄인인 것과 누구라도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 앞에 엎드렸다. 스스로 자신의 죄책을 메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 이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기독교인이나 이슬람교도나,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1:25).”
이를 비추어 스스로 온전한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그런 자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22)”서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 실제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와 같은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3. 우리는 어찌 살아야 하나?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맡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2).”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분간할 수 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2:18).” 셋째,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랑할 수 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17).”
곧 우리의 역할은 분명하다. 첫째, 저들을 인도하는 빛이 되어야 한다.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19).” 둘째, 우리는 곧 어린아이와 같은 저들의 선생이다.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20).”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첫째, 우리는 다른 사람은 가르치면서, 판단하고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21).” 둘째, 그러니까 자신이 말한 것을 자신이 도둑질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21-23).
그 결과는 엄연한 현실로 드러난다. 첫째, 우리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은 모독을 당한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4).” 둘째, 믿는 자가 안 믿는 자들보다 더 악하게 군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겔 5:5-6).”
4. 우리는 명심하자.
첫째는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8).” 살았다고 하면서 아무런 영적인 고통 없이 산다면 이는 두려운 일이다. 어찌 죄악된 세상을 살면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 둘째,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위해 중보해야 한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우리 안에 이는 어떤 불편함이 그 증거다. 교회로 모이는 이유다.
이는 또한 교회의 사명이다. 셋째, 교회의 사명도 기도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5. 하나님의 한 의
하나님의 한 의는 무엇인가? 믿는 자의 키워드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은 자유의지에 의한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리 더하시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한 의’였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2).” 차별이 없는 바로 그 믿음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3-24).” 이게 그렇게 어렵다. 우리로는 불가능하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않고는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살인자나 봉사자나,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5-26).” 오늘 말씀은 이를 엄중히 밝히신다.
이를 위해 첫째, 예수를 제물로 삼으셨다는 것. 둘째, 이것으로 의로움을 나타내신 것이라는 사실. 셋째, 이로써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임을.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는가? 저들보다 나은 게 무엇이어서, 대체 우리의 무엇을 가지고 저들을 비판하고 정죄할까?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 오직 믿음의 법, 곧 하나님의 한 의,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의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오직 믿음뿐이다. 우리가 의로울 수 있는 처음도 끝도 믿음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8).” 그 하나님이 특정한 누구의 하나님이신가? 유대인의 하나님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29).” 곧 혈통으로도 육정으로도 아니다. 나라나 역사로도 아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30).”
곧 우리는 우리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의나 결단이 아니다. 헌신이나 희생도 아니다. 선을 도모한다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한 의’ 곧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 의롭다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의다. 그런 우리가 그럼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무시할 수 있을까? 행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단 말인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1).” 곧 이 둘은 하나여서 율법으로는 죄를 알고, 죄를 앎으로 구원을 필요로 하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선한 삶이 믿음의 행위로 이를 뒷받침한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곧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다음 주일에는 우리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복음의 희망에 대하여 말씀을 나눌 것이다(3:21-4:25). 이는 그리스도 이후에 출생한 우리들에게도(3:21-30), 그 이전에 살다간 사람들에게도(31- 4:22), 곧 그리스도 이전세대나 이후세대나 모든 세대에 동일하심을 나타나는 하나님의 한 의다(4:23-25). 안 믿는 자들의 죄에 대하여든(1:18-2:16),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죄에 대하여든(2:17-3:8) 결코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한 의’가 아니고는 결단코 우리는 그 누구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한 의다. 구원이다.
곧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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