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27 주일
롬 4:25, 요 11:1-44
부활을 사는 삶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11: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1: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1: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11: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1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11: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11: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11: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먼저 지난 몇 주에 걸쳐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다. 로마서 3장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것이 무엇인가? 곧이어 23-24절에 이어지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곧 아무도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속량하셨다. 이 은혜로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한 의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의는 우리의 어떤 선행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성경의 키워드는 바로 이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곧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시는 의로움인데, 이와 같은 믿음을 막는 것이 있었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8-19).”
우리 안에 죄의 형질은 진리를 막는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를 기도하셨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다른 수가 없다. 곧 우리가 진리를 막는 것은 첫째는 경건하지 않음이다. 이는 주를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늘로부터 나타난 불의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의도적인 불신앙이다. 세상에 무신론자는 없다. 다만 하나님을 믿느냐, 다른 신을 믿느냐 하는 것뿐이다. 셋째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분명히 있다는 소리다.
종교를 운운하고 하나님을 배척할 뿐이지, 저마다 나름의 신을 섬긴다. 하다못해 무슨 일에 앞서 고사를 지내고, 일견 배웠다고 하고 스스로를 무신론자라 하는 이들이 더욱 위선적이게도 운을 따지고, 행운을 빌며, 우리 힘으로 미치지 못할 그 너머의 힘을 바라는 법이다. 곧 자신을 숭배하는 시대다. 나름의 소신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춰보면 그 소신이란 게 결국 하나님만 아니면 되는, 하나님 외의 다른 걸 믿는 것이다. 친구와의 의리를 믿고 자신의 수고와 열심을 믿는다. 이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그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가른다. 곧 자신의 양심을 신의 자리에 놓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자기 신념을 하나님보다 우위에 놓은 것으로, 이 또한 신이 된다. 자식이, 돈이, 학벌이, 학연과 인연이 우선하여 신적인 존재로 삼는 일이다.
이로써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생겨나는 오늘날의 현상을 성경은 나열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18).” 오늘 우리 사회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그러한 사회를 살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니라고 한다. 설마, 한다. 상대적으로 낫다고 여긴다. 이는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그렇다면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저들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첫째, 우리는 말씀을 가졌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2).”
둘째, 우리는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것을 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4).”
셋째, 우리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이 참되심이 풍성함을 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7).”
바울의 아름다운 고백을 들어보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전에는 숨기고, 아닌 척 하며, 남들이 알까 더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살았던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제 자유하다. 심리학적인 용어로 페르소나를 벗는다. 고대 연극에 쓰이던 가면을 일컫는 말인데, 과연 우리는 순수하게 자신의 자신됨을 감추지 않고 살고 있는가? 우리 안의 믿음의 증거는 이것이다. 나의 연약함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신다.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힘이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말씀 앞에 서고 주님 앞에 나올 때면 우리는 다만 송구하고 부끄러워 주의 긍휼하심만 바랄 뿐이다. 왜 그런가? 로마서 4장 4절부터 8절까지 보자.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는 더욱 주의 긍휼하심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서 내가 무엇을 잘해서, 안 믿는 저들보다 조금은 나은 게 있어서 오늘 이와 같은 은혜 아래에 사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다만 우리의 지난날의 죄를 간과하심으로, 죄 없다 하심을 입은 것이지, 과연 우리는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누가 고개를 들 수 있겠나?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3:25).”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선명해졌다. 곧 저의 죽음과 함께 부활을 살아야 한다. 거듭남이란 개선하여 뜯어고친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삶, 부활을 사는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부활의 기쁨을 자주 상실하는 것일까?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 여전하여서 안 믿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 근심 걱정에 눌려 ‘상실한 마음’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일련의 예를 위해 요한복음의 한 이야기를 본문 속에 본문으로 가져왔다.
※ 부활의 삶을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은 저들 남매를 남달리 사랑하셨다. 그런데 저들 오라비 나사로가 병에 걸렸다. 두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는 다급하였다. 빨리 예수님께 알려 오시라 해야 한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의 삶도 다를 바 없다. 어느 날 문득 어떤 일이 터진다. 사랑하는 이가 다치거나 죽는다. 평생을 바쳐 쌓아온 일이 무너진다. 믿었던 이로부터 배신도 당한다. 좀 살만하다 싶어 평안한 노후를 꿈꾸었는데 덜컥, 시한부 인생에 놓이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린 다급하게 주님을 찾는다. 도우심을 바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좀 이상하다.
첫째,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지체하신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 11:6).”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정황상 서둘러 가셔야 맞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늑장을 부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뜻하지 않은 어떤 일이 터지면 무엇보다 그 일에 전념한다. 그 문제에 몰두한다. 그런데 주님은 그 상황, 바로 그 문제 너머의 하나님의 섭리를 보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
단언하건대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다. 그 답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이다. 구약의 다니엘과 그 친구들 사드락과 메삭과 아멧느고가 말했다. ‘우리를 죽이시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당장 저들은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을 판이다. 그런데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단 3:17).”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8).”
시편에서 다윗은 노래하였다.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낫습니다.’ 시편 63편 3절,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 예수님은 한술 더 떠 말씀하신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요 11:15).”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더는 힘에 겨워 견딜 수 없을 때, 그저 죽고 싶을 정도로 암담하기만 한데,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관심은 딱 하나,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바라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일이다. 당장 그 문제를 해결하여 행복해지기를 바라시는 게 아니다. 삶의 질을 개선하여 몇 년 더 잘 살다 오기를 바라시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한 생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이다. 좀 더 쉽게 이해하자면, 의사는 환자의 고통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둘째,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기다리신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30).”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마르다는 급히 나갔다. 그런데 마리아는 마음이 상했는지, 그대로 집에 남아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20).” 그럴 수 있다. 다급한 심정에 마르다는 헐레벌떡 주를 맞으러 나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뒤라, 체념하여 상심한 마음으로 뭉그적거리는 마리아 같은 이도 있을 수 있다. 이제 오셔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은 것이다.
벌써 나사로가 죽어 장사된 지 사흘임을 알리면서 마르다가 항변하자 주님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이 귀한 진리의 말씀을 우리들로 하여금 체념하고, 더는 어찌 손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주님은 들려주신다. 즉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때, ‘네가 믿느냐?’ 물으신다.
믿음의 특징은 그런 것이다. 믿을 수 있을 때 충분히 잘 믿어져서 자의적으로 믿는 게 무슨 믿음이겠나? 우리가 아는 믿음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과는 다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럼 그게 어떻게 생겨나는가? 어떻게 우리 안에 더하시는가? 그 통로는 하나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다른 길 없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 네가 믿느냐?’ 그럴 때 과연 우리는 무어라 대답할까? 마르다는 답하였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그런 그의 고백은 바로 행동으로 나타났다. 여전히 뭉그적대고 있는 동생 마리아에게 달려가 그 소식, 복음을 알리었다. 이는 공식이다. 믿는다는 사람이 살면서 그저 여느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태평하다면 이는 어딘가 문제가 있다. 믿음이 실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가만히 더 기다리신다. 결코 강제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이내 마리아가 지신의 결단으로 예수께 나아오기까지,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니라(30).”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가정법(假定法)을 허무신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21, 32).”
우린 늘 이런 식이다. 두 자매가 똑같다. ‘만일 ~하셨더라면’ 하는 식의 발상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무뎌지게 한다. 내가 좀 더 공부를 했더라면, 좀 더 능력을 주신다면, 어디 큰 교회에서 무슨 훈련을 받았더라면, 누구처럼 무얼 했더라면 하는 식의 논리는 우리 신앙을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주의 일을 미루게 하는 것이다. 본문을 보자. 저들 앞에 예수께서 찾아와 계신다. 우리가 지금 주 앞에 나왔다. 주가 부르셨다. 그런데 가정법을 동원하여 주의 뜻을 외면한다. 자신의 사정에만 국한지어 생각한다. 한 마디로 불신앙이다. 이제 오셨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가정법을 동원하는 어법은 실은 그게 싫다는 소리다. 하기 싫은 걸 그렇게 바꿔 안타까움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이와 같은 가정법이 얼마나 득시글거리는지 모른다. 거리가 조금만 가까웠더라면, 어른 성도가 한둘만 더 있었다면, 누가 나를 조금만 더 이끌어주었다면, 하는 식으로 이와 같은 타령은 끝이 없다. 이는 곧 그러지 못한 데 따른 원망이다. 부모를 향해서 또는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그 원망의 정도는 확대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으로까지 이어진다. 결국은 하나님이 잘못했다는 소리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이와 같은 가정법으로는 온전히 주를 맞이할 수 없다.
넷째, 예수님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지 못하게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다. 그 막힌 무덤 문을 치워야 한다. ‘돌을 옮겨 놓으라.’ 어쩌면 이때 예수님이 말씀으로 그 돌문을 옮기셨다면 훨씬 더 극적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왜 그럴까?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우리 안에는 벌써 속단하고 예단한 자기 판단 기준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망이 없다는 소리다. 헛수고하는 것이란 말이다. 벌써 냄새가 난다고 항변하는 까닭은 늦었다는 자기 판단에 의한 것이다. 이제와 우리의 ‘그 문제’를 들추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경의 아주 재미난 직면의 사례가 있다. 바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다. 저는 누구보다 열심을 다해 주를 따랐다. 우리는 저를 수제자라고 여긴다. 그런 그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멀찍이 서서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막 14:54).”가만히 생각해보자. 결국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시고, 흔히 말하는 그 트라우마가 어땠을까? 자책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상실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후에 부활의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실 때 저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신 곳이 그래서 모닥불 앞에서였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 21:9).” 그리고 저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상기시키며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저에게 물어보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17)?” 곧 저에게 ‘내 양을 먹이라.’ 하는 사명을 맡기시면서 세 번씩이나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직접, 무덤 앞의 돌을 치우게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39).” 이는 죽은 나사로가 할 수 없다. 곁에 있는 우리가 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43).” 그가 일어나 나오는 일은 저의 몫이다. 누가 들어가 끌어안고 나온 게 아니다. 다만 저의 순종으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사역을 맡기신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 죽은 저를 싸매고 있는 것을 풀어주어야 한다.
나오는 말
‘부활을 산다.’는 일은 막연히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간다는 추상적인 개념의 확신이 아니다. 마치 죽은 자에게 ‘좋은 곳’에 갔을 거라 말하는 것이나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더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넓은 길로 갈 땐 몰랐다. 멀찍이 떨어져서 휘리릭, 지나치는 고속도로 같은 길에서는 알 수 없다. 물론 누구나 넓고 편한 문으로 해서 그 길을 가고 싶어 한다. 이는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러니까 넓은 길로 갈 때는 모른다. 다들 그럭저럭 괜찮은 줄 알았다. 한데 좁은 길로 들어서보면 안다. 싫든 좋든 다 들린다. 다 보인다. 서로가 으르렁거리고, 아등바등 그 삶이 얼마나 구질구질한지. 그런 꼴 보이기 싫어서 큰 교회를 다닌다. 또는 남의 인생에 괜히 끼어들기 싫어서도 적당한 거리를 둔다.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서로는 같은 교회를 다니고 적당히 성도로 묶여져 있다.
옛 말에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동네 사람들의 발품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 개인은 교회다. 개개의 가정은 교회다. 이처럼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우리들의 모임도 교회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좁은 문으로 그 길이 협착한 길로 걸어가고 있는가? 죽어 있는 저이의 무덤 문을 옮겨줄 수 있나? 저를 싸매고 있는 이미 벌써 썩어서 냄새나고 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풀어줄 수 있나? 부활을 사는 믿음이란 이와 같이 실전이다. 저이의 썩어가는 냄새 때문에 내가 죽겠다. 내가 살 수가 없어 주의 도우심을 대신 구한다. 저이 대신 아뢰고 구하는 중보가 끊이지 않는다.
다 같이 오늘 본문, 로마서 말씀을 읽고 마치자.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날 위해 기꺼이 바로 그 좁은 문으로 먼저 들어가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이 협착한 좁은 길을 같이 걸어가신다. 이는 곧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우린 어찌 살아야 할까?
첫째, 하나님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8).”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심각하게 여기자.
둘째, 우리는 우리 곁의 너와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셋째, 이는 곧 교회의 사명이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곧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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