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03 주일
로마서 4:18-25
아브라함의 의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4: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4: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한 의’에 대하여,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그 의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25).” 곧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신 의다.
곧 우리는 어떤 수고와 애씀으로도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오직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데,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1).” 이는 곧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다. 곧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그 어떤 값을 주고 살 수 없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한 의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의를 의로 여겨주시는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데 주목할 수 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하는 말씀으로 부활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이 지긋지긋한 일상으로 우리의 삶을 구체화시키는 말씀으로 연결된다.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큰 길로 가고자 하는 삶은 실제 우리가 부활을 사는 데 적합하지가 않다. 크고 넓은 길에서는 집집마다 그 가정이 처한 상황과 여러 여건을 나눌 수 없다. 알고 싶지도 않고 알 수도 없다. 멀찍이 스치듯 지나는 길에서는 저만치 누가 사는 동네가 그저 보기 좋아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늘 보면 문제없는 가정 없고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협착한 길로 가면 서로가 시시콜콜, 미주알고주알, 사사로운 것들, 그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게 된다. 성경은 이를 살라는 것이다. 다만 그래보라는 게 아니라 힘쓰라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이게 곧 후에는,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들 타성에 젖고 안주하려 드는 관계로 의지가 없다. 적당히 친절한 타인의 정도로 족한 사이를 선호한다. 현대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를 그렇게 다니는 경우가 흔하다. 이러한 경우를 들어 요한복음 11장에서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를 통해 우리의 속성을 살펴보았다. 누구나 ‘~하였다면’ 하는 식이다(21, 32). 그러한 본질을 주님은 아시고 그래서 우리의 시련 앞에서 일부러 지체하신다((6). 기다리신다(30).
우리들로 하여금 서로의 가로막힌 무덤 문을 열어주게 하신다(39). 저를 동이고 있는 썩어 냄새나는 것을 벗겨주게 하신다(44). 저희로 하여금, ‘나사로야 나오라’ 하는 자리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43). 나사로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나올 수 있는 자는 한정되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즉 오늘 우리가 여기에 나온 것이 기적이다. 결국 우리의 구구한 사연과 문제를 내려놓게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우리의 불순종을 허무신다.
1.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그 무엇도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22).”
‘하나님의 한 의’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느닷없이 된 게 아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곧 주의 섭리다. 계획하심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7).” 다른 길은 없다. 어떤 선행도 의를 이룰 수 없다.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8-29).” 일부러 그러신다.
이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곧 우리들로 하여금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그런데도 자칫 자신을 누구와 견주어, 조금은 낫다고 여기거나 누구에 대해 자신의 기준으로 비난하려 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어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는 사람들이다.
2. 이신득의 원리는 창세 전부터 구원의 기본 진리였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위시하여 앞서 의인이라 하심을 받은 자들의 공통점은 믿음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첫째, 이신득의는 가장 복원적인 행복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다른 길 없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을 다한 바울도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 하였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4-15).” 우리가 지금 바라는 행복의 정체는 얼마나 유치한가? 좋은 집, 비싼 차, 어떤 소망 따위들이 참 행복일 수 없다.
둘째, 이신득의는 영원한 구원의 진리이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겔 16:60).” 어느 민족이라 그 기질이나 그 특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다. 어려서는 그렇고 나이 들어서는 다른 게 아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7).” 곧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이와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심으로 구원에 이르는 진리는 영원하다.
3. 믿음 외에는 다른 구원의 방법은 없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과연 오늘 나는 믿는다고 하면서 무얼 얼마나 어떻게 믿고 있나? 이는 어떤 기준이나 자격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그러므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첫째, 세례는 구원의 방법이 아닌 증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이것에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이 세례다.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 믿음의 확신과 고백으로 세례를 받고 이를 증표로 삼는 것이다. 곧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1).”
둘째, 성경은 우리 구원의 기준이 되어주신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8).” 곧 성경이 문자적으로 완전하냐? 아니냐? 하는 번역의 오류가 있어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못하고의 논리는 어리석다. 이는 곧 우리 인간의 이해와 지식으로 그 한계를 정립하려는 것과 같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말씀은 의미를 갖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에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셋째,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만일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면 그의 공의는 위협받는다.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본인의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그래서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 없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래서 다윗은 기도한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3-4).” 결국 죄는 용서가 아니라 그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죄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죄 없으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5).”
4. 아브라함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결코 저가 우리보다 어떤 나은 점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여호수아의 설명처럼 아브라함의 순종은 말씀을 따른 믿음에서였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수 24:2-3).”
곧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그러므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첫째, 경건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신다면, 누구도 그 죄의 값을 감당할 수 없다. 몇 억 겁의 삶을 윤회한다 해도, 몇 천 번을 다시 산다 해도 우리는 결코 스스로 의로울 수 없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이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다.
다른 어떤 경건의 결과가 아니다. 즉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둘째, 의롭다 하심은 외적 조건의 결과가 아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아무도 율법의 조건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이를 누누이 강조하는 까닭은 행위를 강조하는 우리 안의 엉뚱한 요구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셋째, 구원 언약은 일방적인 언약이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시 111:5).”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0).”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겔 37:26).”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히 6:13).” 이르셨다. 사람으로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구원은 없다.
넷째, 율법은 은혜 아래의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럼 마치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율법은 무시해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 율법을 더욱 굳건히 지키게 된다. 사랑함으로 혼례를 올리고 결혼서약을 지키며 귀히 여기는 것이지, 혼례를 했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곧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다섯째,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은 올바른 믿음에서 이루어진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내 의지나 노력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으로 견주어 자꾸 바꾸려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우리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곧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 26:8).”
5. 아브라함의 의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게 믿음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음의 정의를 드러내어준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이것이 아브라람의 의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 믿음이다. 뭐 딱히 붙들만한 게 없었다. 오히려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경의 여러 믿음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러하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며 저의 세 친구는 ‘오늘 나를 죽이시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한 욥과 같은 고백을 하였다. 이는 ‘주의 인자하심이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다.’는 다윗의 확신과도 같다. 믿음에 대한 성경의 정의는 이처럼 한결같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곧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첫째, 기독교 신앙은 아브라함의 정통성을 잇는 신앙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의 거울이다. 표본이 되었다. 예수님의 진리를 뒷받침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를 믿는 것,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둘째, 우리 신앙은 말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25).” 말도 안 되는 소리 같다 해도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다른 데 기웃거려 대신할 것을 찾는 노력은 엄밀하게 죄악 된 교만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선행은 어떤 악함과도 다를 게 없다. 우리의 신앙이란 다만 빈손 들고 주 앞에 서는 일이다. 내가 무얼 가져와 주 앞에 내어놓는 나의 공적이 아니다. 말씀으로 말씀에 이르는 일이다.
셋째, 어떤 악조건 속에서 믿음을 굳건하게 붙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불가능하고 오히려 불행을 초래하는 어리석은 일처럼 여겨져도, 그리 알고 붙드는 믿음이 주께 영광을 올리는 일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넷째, 예수의 부활을 믿고 우리도 부활을 사는 게 믿음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그리 사는 게 믿음이다. 그와 같은 행함이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그러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곧 우리가 부활을 산다는 건 날마다 내가 죽는 일이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다섯째,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의로움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이를 온전히 믿는 것이 그 어떤 선을 이루는 것보다 의롭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죄에 대하여 그 어떤 경우도 용서는 없다. 다만 대신 그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예수께서 우리의 죄 값이 되셨다. 우린 더 이상 죄책으로부터 자유하다. 이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영접하고 우리도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부활을 살아야 한다.
나오는 말
아브라함의 의는 “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8).” 우리도 그의 후손으로 그와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 믿음은 어떤가? 불가능한 것 같으나 말씀을 붙든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19).” 현실이 그렇지 않다 해도,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20).”
곧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상황, 그 어렵고 힘든 처지에서도 주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삶이다. 곧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21-22).” 설령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뜻하고 계획하는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23-24).” 우리를 살리신 주를 믿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5).”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우리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살아나신 예수의 부활을 사는 우리 믿음의 의다. 이는 곧 하나님의 한 의로부터 이루어진 의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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