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로마서 5:1-10 / 구원의 ‘이미’와 ‘아직’ 사이

전봉석 2018. 6. 8. 10:51

20180610 주일 

 

로마서 5:1-10

구원의 ‘이미’와 ‘아직’ 사이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한 의

오늘 본문의 기본 전제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한 의로 인한 것이다(롬 1:17). 즉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그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으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 곧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실 이는 하나님 한 분이시다(30). 우리는 일한 게 없이 의로 여기시는 바가 되었다(4:4-8).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는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면서 의무이다(5:1). 오늘 본문은 이를 주목하게 하신다. 이는 “또한”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게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이룬 게 아니다. 그리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의의 일이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2).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구별됨이다.


-소망의 의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다(3).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은 ‘위선적이거나, 실제 그렇거나’ 둘 중에 하나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4-6).” 이와 같은 단계적인 성장을 이루는 게 믿음이다. 인내는 이론이 아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설명으로 알 수 있지 않다. 직접 겪어야 안다. 호언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신앙은 시련이 닥쳐봐야 안다. 평온할 땐 다들 좋아 보인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 거기서 끝내 참거나 죽거나, 이겨내거나 무너지거나, 견디거나 포기하거나! 그러는 중에 인내를 이룬다. 이는 연단을 통해서이다. 한두 번 잠깐 그러다마는 정도의 게 연단이 아니다. 연단이란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두드려서 더욱 단단하게 하는 일이다. 쓸모없던 것에서 이물질을 태워내고 다지고 벼려 쓸모 있게 만드는 일이다. 한두 번 그러다 마는 것으로는 어림없는 게 연단이다. 귀찮고 견디기 어려운 일로 시달리는 게 연단이다. 인내는 그와 같이 연단을 통해 이루어져 간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어찌 인내할 수 있나? 연단으로 비로소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녹슬고 쓸모없어 버려진 쇠붙이였는데, 이를 불에 담갔다가 두드리고 펴서 다시 두드리기를 거듭하면서, 어떤 형태가 나오고, 이는 주인이 바라던 도구로써의 모양을 갖춰가는 것이다. 이에 그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이 결국은 믿는 자의 특권이다. 곧 우리는 ‘어쩌다 어른’이 된 게 아니다. 어쩌다 이 땅을 살게 된 것도 아니다. 어쩌다 저 아이를 맡은 것도 아니고, 어쩌다 이런 육체로 사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다(5).


-연약함의 의

이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이루어진 일로,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그러니까 우리가 그만한 능력이 되어서가 아니다.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을 가져서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 이 황당한 사실이 은혜다. 즉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7).” 주님이 전혀 그럴 가치도 없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죄악 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된 일이다. 의가 있고 어떤 선이 있어서 그럴 만한 가치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 죽으신 게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의 일이다. 저들과 다를 바 없이 주를 배척하고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살던 때이다. 그 이전에 이미 날 때부터, 그 모태에서 죄인 되었을 때부터이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우리를 위해서, 그러하심으로 하나님은 그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는 연약할 따름의 의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이 일은 전적으로 우리가 한 일이 아니다.


-구원의 의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여기서 문득, 이미 이루어진 과거형시제 구원에서 미래형시제 구원으로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놓으신다(9). 왜 그럴까?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10).” 과거는 현재를 지나 미래로 향한다. 우리의 시간에 대한 이해다.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알고 있는데, 구원을 받을 것이라니!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논리 앞에서 우리는 당혹스럽다.


우리의 오늘은 구원에서의 ‘이미’ 와 ‘아직’의 사이다. 이를 바울 사도의 멋진 표현으로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자.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 그래서 우리는 확신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구원의 의는 우리의 기꺼운 고난의 의로 내 육체를 채우는 의다.


우리 오늘은 구원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다


분명한 건, 구원은 ‘이미’ 과거완료형이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우리의 구원은 ‘이미’ 얻은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미’ 주신 것이지 앞으로 주실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이처럼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 그 받은 구원을 굳이 명명하자면, ‘기본구원’이다. 천국에 가고 못 가고의 구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는 미래형시제형을 동시에 사용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9-10).”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소리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과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데서 그 의미가 갈린다.


우리 육신의 죽음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를 돌이킬 수는 없다. 모든 죽는다. 죽음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은 심판이다. 안 믿는 자는 안 믿은 자신의 기준과 양심과 그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믿는 자는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육신의 죽음 너머 영벌의 문제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그러니까 섣불리 이 땅에서의 희로애락을 상벌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자칫 그것이 걸림이 될 수 있다.


성경의 원리는 간단하다. 기쁠 땐 찬송하고 슬픈 땐 기도하는 것이다. 잘해서 상 받고 못해서 벌 받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자칫 자신의 헌신과 봉사를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그래서 우리는 사모한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우리의 희로애락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 우리는 마땅히 즐거워할 책임이 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이는 막연한 주장이 아니라 당연한 이치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사랑하는 자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왜냐하면 우리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43:4).”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 가운데서도 주를 신뢰하고 찬양하는 신뢰가 주께 영광이 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


이 모든 게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알기 때문이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7).” 곧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하신,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신 이가 오늘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는 화평이다. 곧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0-21).”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이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는 그 사랑의 원동력이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곧 이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이것이 천국에 대한 우리의 소망으로 입증된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 73:24).”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 생명의 화목이 하나님의 의다.


우리의 즐거움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아이러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그 소망으로 우리는 지금의 환난을 견딘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우리는 영광의 중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곧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인내를 이루라는 말씀의 의미는 날마다 새롭다. 사는 게 고역이라, 다들 살면서 어려움을 회피한다. 행복하기를 추구한다. 이 땅의 단적이고 얄팍한 즐거움으로 만족하려 한다. 다 잘 될 거야, 하고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우리의 고난은 언제나 역설적인 소망을 안겨준다. 이를 즐거워할 수 있는 일은 아이러니다.


오늘 우리의 환난은 우리 신앙의 시금석이 된다


어려움이 없으면 신앙의 정도를 알 수 없다. 좋을 땐 누구라도 괜찮은 것 같다.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성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오히려 지난날을 돌아보며 성도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모든 게 은혜였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우리는 낙심하다가도 주의 영광을 본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곧 그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십자가보다 더욱 결정적인 사랑의 증표는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십자가는 곧 우리의 천국, 하나님의 나라, 그 사랑의 보장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나오는 말


우리의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 인내는 연단을 통해 더욱 강건하여진 소망을 가진다. 이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소망로 믿음 안에서 성장하게 한다. 곧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9-20).” 이는 이제 우리의 길이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7:25).”


믿는 우리들에게 오늘은 언제나 구원의 ‘이미’와 ‘아직’ 사이이다. 기본구원으로 만족한다고 하면 심각하게 다시 점검해봐야 한다. 생명이 있으면 자라고 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기본구원은 성화구원으로 날마다 연단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이를 멈추었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고 여기는 그 믿음이 가짜이거나, 심각한 영혼의 질병을 앓고 있거나. 곧 우리가 오늘을 산다는 일은 ‘이미’에 의해 ‘아직’을 바라는 구원의 여정이다.


이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