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로마서 8장 16-25 / 하나님의 상속자

전봉석 2018. 6. 22. 14:29

20180624 주일



로마서 8장 16-25

하나님의 상속자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의

로마서 6장에서부터 8장까지를 읽다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 삶에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는 ‘하나님의 의’로 이루어진 것이지 우리의 수고와 노력에 따른 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 하나님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의 권한이나 특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믿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빈손으로 주께 나아오는 신앙의 발판일 뿐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어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단이 믿음일 뿐이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자칫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로 구원을 받는데 있어 무슨 권리쯤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 건 사탄도 믿는다. 사울도 믿었다. 여러 재앙에 의해 애굽의 바로도 믿었다. 곧 믿음이 다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다. 의로울 수 없는데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하시는 법정용어이다.


그렇다면 그 공의가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그 어떤 죄도 용서하실 수 없다. 죄를 용서하신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에 스스로 위배된다. 죄의 삯은 엄연한 사망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게 죄다. 우리 육신의 죽음은 죄로 인한 결과다. 그렇게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속량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이다. 속량은 그 값을 대신 지불하는 것이다. 우리 죄를 예수께 전가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그 값이 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이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이는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따른 선언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없다. 다만 그 값을 물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속량하셨다.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정죄함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이는 확정된 일이지 조건에 따른 예측이 아니다. 곧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이에 대해서는 사탄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이룬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죄를 우리가 없앤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0-31).” 즉 이제 우리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사탄은 절대 믿는 자를 정죄할 수 없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이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결국 우린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13:5).” 우리는 이를 어찌 확신하는가? 신념을 믿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내 안에 믿음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얼마나 내 삶을 성령이 주도하시게 하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의를 구하고, 염려하고 근심함으로 주 앞에 오기를 꺼려한다면,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하여야 한다.’ 믿는 자에게 더는 정죄함이 없으나 믿는 자에게는 징계와 채찍이 따른다.


징계는 필수다

우리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나 징계는 있다.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 89:32).” 우리는 여전히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산다. 이를 통회한다. ‘오호라 이 곤고한 사람이다.’ 몸으로 사는 날 동안 우리는 한탄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래서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좀 더 부연하자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사랑이시다. 그 판단은 우리를 죽이시는 한이 있어도 영원히 살리셔야 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성경은,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5-8).” 그러므로 엄연히 정죄와 징계는 다르다.


여전히 우리를 속여 그릇된 길로 가게 하는 사탄이 나쁘다. 저는 정죄함을 받을 것이다. 한데 우리는 그것으로 꾸지람을 듣는다. 그게 마땅하다. 가령 보이스 피싱에 속아서 손해를 보았다고 하자. 우리를 속인 자들이 나쁘다. 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죄다. 이에 속았다고 우리가 벌을 받지는 않는다. 다만 훈계를 들어야 한다. 다시 또 그런 일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들어야 한다. 한데 아무도 주의를 주지 않고 심지어 내버려둔다면, 저는 최소한 남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면 혼을 내거나 주의를 주거나 같이 야단을 친다. 하나님께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우리가 주의 자녀라, 어떤 일은 징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이웃의 정죄를 주의해야 한다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이가 있다. 저는 안 믿는 이웃이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2).” 저들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본다. 우리로 인해 하나님을 안다. 그런데 우리로 인해 저들이 실족케 된다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저들은 훗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정죄할 것이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우리로 인해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그래서 우린 신경 쓴다. 의식한다. 안 믿는 사람들처럼 이익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출세와 성공을 꾀하지 않는다. 우리 믿는 자들의 잘못으로 교회가 욕먹고, 교회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한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3-16).”


하나님의 상속자


1. 성령이 이를 알게 하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이 모든 걸 알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누가 말하길 아이가 지능이 낮고 감정조절이 안 되는 상황인데, 과연 저가 하나님을 알까? 믿는다고 하는 게 과연 믿을만한 소리일까? 하고 물었다. 그런 소리하지 마라. 우리의 믿음도 결코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과 이해와 상식으로 얻어진 게 결코 아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우리는 누구도 이 복음을 자의적으로 받을 수 없다. 안 믿는 자는 죽었던 자가 살아나 증거 해도 안 믿는다.


우리는 다만 성령으로 인해 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도리어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명심하자. 결코 우리의 믿음은 특권이 아니다. 권리도 아니다.


이는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그 앎을 허락하시는 데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곧 우리는 주의 예정하시고 택하심을 입은 주의 백성인 것이다. ‘어쩌다 어른’이 아닌 것처럼 어쩌다 믿는 신자가 된 것도 결코 아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여기서 고난은 그저 사느라 애쓰는 ‘먹고 사는 문제’의 고난 정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주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는 단지 팔자소관으로, 사는 데 따른 각자의 기구한 생활을 의미하는 게 절대 아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4-25).”


곧 우리에게 맡기시는 자기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지고 가는 십자가다. 이것이 내적으로는 죄에 대한 우리 자신의 끝없는 다툼으로의 고난이고, 외적으로는 믿는 사람으로서 견뎌야 하는 세상 유혹과 멸시와 저들의 박해를 의미한다. 하나님 없이도 잘만 사는 세상인 것 같은데,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말씀을 의지하며 산다는 일은 역으로 불공평한 것 같기도 하다. 다 괜찮다고 여기는데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일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타협해도 되겠는데 우리만 아니라고 단호히 지켜야 하는 것들.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받아야 하는 불이익이 곧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가령 예수만 아니면, 내가 이런 사람을 안 보면 그만일 텐데, 그런 사람을 주의 이름으로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 일. 그럼에도 저를 주의 마음으로 대하는 일. 주의 사랑으로 대한다는 게 때론 얼마나 역겹고 속상하고 화딱지가 나는 일인지! 왜 그러고 사냐고? 세상 사람들도 한 푼 벌자고 간 쓸개 다 빼놓고 장사한다. 이 꼴 저 꼴 안 보면 그만인데 친절히 대한다. 하다못해 세상을 사는 사람들도 한 푼 이익을 구하고자 그리 산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느끼는 부당함에 대해 뭐 그리 예민하게 자유를 운운하곤 하는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이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3. 우리의 고난은 장차 누릴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앞서도 말한 것처럼 우리의 지금 고난은 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누릴 영광을 안다면 족히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가령 미국에 살 사람이면, 그 문화를 익힐 것이다. 언어를 배우고 생활 방식을 알아갈 것이다. 또는 우리가 어느 한 기업을 맡아 경영해야 하는 상속자라면 힘에 겨워도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후계자 수업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그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우리 곁에 두시는 이웃을 주의 마음을 마주하는 일이다. 주님은 우리를 주의 사랑이 필요한 자리에, 사람에게 우리를 보내셨다. 안 믿는 아이들과 그 가정의 부모를 대신하여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외면하는 저를 위해 우리가 대신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중보는 사명이다. 왜 그래야 하나? 이를 우리에게 맡기신 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주의 마지막 명령이며 다짐이시다. 때론 막연하여 자존심이 상한다. 그래봐야 소용도 없는 일 같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지금은 때로 ‘이 길이 맞나?’ 싶고,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희미하고, 불안하고, 회의도 들지만, 바울은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 장에서 이를 언급하였다. 우리의 그 사랑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것이 믿음의 실체다.


4. 우리는 다른 피조물을 건사해야 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19-20).”


더불어 우린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다스려야 한다. 건사해야 한다.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사 24:5-6).” 그와 같이 우리의 죄로 인해 자연의 모든 만물도 고초를 당한다. 미세먼지가 우리를 위협하지만 모든 생물을 위협한다. 생태계는 점점 파괴되고 바다 생물들은 플라스틱 가루를 섭취하고 죽어간다. 우리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건사해야 한다. 이는 마땅한 의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이를 우리에게 맡기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먼저는 흙으로 지음 바 된 우리 자신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 땅의 모든 생명을 건사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5. 천국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자유하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우리 믿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날을 고대한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이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계 21:5).” 오늘 우리가 살면서 환경을 생각하고, 생명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이 주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훗날 주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우리는 남을 위해 애통해한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그런 우리는 그 일을 척척 잘 해낼 수가 없어서 애통해한다. 애통해 하는 자로 우리는 주의 위로를 받는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그래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산다. 어떤 물질도, 어떤 보물도 채울 수 없는 우리 영혼의 결핍이 있다. 우리의 심령은 가난하여 주 앞에서 온유하다. 그러면 우리의 뜻과 의지는 온순하여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사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는데도 남을 긍휼히 여김으로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세상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은 청결하여진다. 이로써 모든 것으로 화평하게 한다. 이로써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 고난 중에도 기뻐한다(3-11).


예수님이 일러 주신 팔복의 교훈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절망감으로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게 하신다. 이는 예수님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에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2-4).” 곧 우리의 탄식은 한탄이 아니다. 주의 영광이 가리어지는 데 따른 탄식이다.


곧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1-24).” 바울만이 할 수 있던 고백이 아니라, 이제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고백이 된다.


7. 우리의 소망은 믿음의 얼굴이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의 얼굴은 소망이다. 남들은 이를 미쳤다 한다. 누구는 새 술에 취했다고도 한다. 또는 말쟁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러나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곧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 이에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슥 9:12).” 아무리 악조건 속이라 해도, 욥은 하나님이 죽이신다 해도 하나님이 선하시도 고백하였고,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을지도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하였다.


어떻게 그런 지경에서 그런 고백을 올려드릴 수 있었을까?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이제 우리는 보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5-6).” 우리에게는 성령이 알게 하시는 그와 같은 믿음이 있다. 우리의 믿음의 얼굴이 소망이다.


8. 우리의 신앙은 그 기다림이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그래서 우린 인내한다. 기다릴 줄 안다. 아무런 소득도 없고 소용도 없는 것 같은 이 일에서 우리는 우리의 전부를 바친다. 곧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그런데 힘에 부쳐 자주 쓰러진다. 회의가 든다. 또 갈등한다. 저 애가 싫다. 이 일이 마뜩치가 않다. 우리 안의 갈등이 우리를 숨 조이게 한다. 타협하고 싶어진다. 적당히 이 정도 선에서 그만두고 싶다. 그래서 황홀한 말씀에만 젖어 살고 싶다. 저런 사람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구질구질한 현실에 더는 얽매이기 싫다. 훌훌 털어버리고 어디, 낭만적인 신앙 생활을 꿈꾼다. 노후 생활을 설계하듯 우리의 남은 신앙생활도 멋지게 그려본다. 그런데 이는 모두 불신앙의 자기변명이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1-12).”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이 복이다. 이 갈등이 주의 영광을 더욱 사모하게 한다. 이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인내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주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나오는 말


종종 우리는 변화산에서의 베드로처럼 황홀경을 놓기 싫어한다. 하나님으로 족한 것 같으나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멋들어지게 고백한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찬양만 하고 기도만 하고 살고 싶다. 이 꼴 저 꼴 안 보고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 왠지 멋진 고백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다.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7).”


그리고 산을 내려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두신다. 하필 마주하는 인간이 간질이 들려 저도 어쩔 수 없어하는 위인 같은 부류 앞에 말이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15).”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좀 해보려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6).” 답답한 노릇이다. 예수님이 꾸짖으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17).” 종종 우리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 그 믿음은, 주께서 그 모두를 이루어가신다는 믿음이다.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은 자라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