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01 주일
로마서 6:1-11
그리스도인의 삶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생을 누리는 일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길은 오직 하나이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엊그제 묵상하였던 말씀의 연결고리 선상에서 오늘 말씀을 설교 원고로 작성한다. 먼저 이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로 놓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을까?
저의 평생은 오직 그 아들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이는 말씀을 붙들고 인내한 결과다. 더는 희망도 없고, 아내 사라의 태는 죽었을 때 죽었던 저들을 살려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다. 기어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 결과인데, 그럼 말씀은 창세기 12장에서 21장까지로 그 이야기는 결말이 났어야 한다. 한데 하나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 말씀만 붙들고 의지하여 얻은 결실까지도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가, 저의 우상을 깨뜨리시는 것이다.
과연 저는 어찌 순종할 수 있었을까? ‘울며 겨자 먹기’로 저의 순종은 그저 ‘억지 춘향’이었을까? 이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쇠렌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나님의 명령은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우리는 종종 벽에 부딪친다. 이해가 안 간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따르기는 해야겠으나, 그야말로 내키지는 않는다.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만약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라를 바치라고 하셨다면 어땠을까? 저들 유대인들에게 있어 첫 아들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다. 저는 이제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모르지만, 약속으로 주신 데 따른 것을 하나님이 저버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래서 저는 주저하는 자신을 일찍이 일으켜 세웠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창 22:3).” 누구와 의논하지 않았다. 아내에게 묻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다. 이내 하나님의 약속의 결실이지만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 하나님보다 귀히 여기는 모든 건 우상이다. 저는 모리아 산에 이르러 종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곧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표현이다. 억지로 마지못해 준행하는 일이었다면 이런 확신은 없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다. 하나님의 것이다. 어떻게 하시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돌아오리라.’ 저는 바로 알고 있었다. 이내 ‘죽여야 산다는 것’을 저는 일생을 거쳐,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 되는 동안 알았다. 아들을 우상처럼 귀히 여기던 자신의 마음을 죽이고,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만 산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말이다.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적인 은혜의 삶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1).”
이미 앞서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한 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이 지불되어 이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선언적인 의미의 확정인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는 우리가 도로 죄에 빠지는 경우라면 이는 둘 중 하나다. 처음부터 저의 믿음은 그 자체로 우상이었거나,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미숙함으로 먼 길을 도는 것이었거나. 곧 우리는 우리에게 향하신 은혜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이는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먼 길을 돌아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평생을 소모하기도 한다.
곧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 2:20).” 우리는 지금 우리 곁에서 그와 같은 경우들을 주로 목격한다. 다들 잘 믿었노라, 하면서 이를 과거형으로 두는 경우를 말이다. 예전에 교회를 다녔고, 고등학교 때까지는 믿었고, 요즘은 안 믿는 자들과 전혀 다를 게 없이 ‘사는 게 우상이 되어버린 삶’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하는 시험이 없다면 저는 아마 이삭이 자신에게 얼마나 무서운 우상일 수도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 일 없이 직장을 다닐 땐 직장이 우상인 걸 모른다. 불현듯 고질적인 악습과 관행을 맞닥뜨리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리아 산으로 가야 할 때 비로소 안다. 건강을 잃어보면 안다. 물질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안다. 자녀 일로 고통당할 때 안다. 그것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숭배의 대상이었는가를 말이다. 은혜를 잃어버리는 원인들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상숭배를 끊는 삶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일갈한다. 그럴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우리는 죽는다! 더는 그것을 중심에 두고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보다 귀히 여기는 모든 건 우상이다. 사는 게 우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아를 숭배한다. 자신숭배의 날들이다. 기분을 중히 여긴다. 행복을 선호한다. 취향에 따라 교회도 정하고, 말씀을 접하고, 교리도 취한다. 무엇이든 우리에게 우상이 되는 것이다. 나의 열심이 우상이다. 나름 희생과 헌신이 숭배가 될 수 있다. ‘지나친’ 모든 것은 우상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7:16-17).”
나의 모든 지나친 나는 우상이다. 죽여야 산다. 내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로 살아야 한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목사로 누리는 이상과 포부가 주의 일이 될 수 없다. 나름의 가치와 기준이 주의 길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기다리다 다메섹에서 데려다 기른 종 엘리에셀을 후손으로 삼으려 했다.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을 약속의 씨로 삼으려고 했다. 현실적인 타당성이 우상이 될 수 있다. 합리적인 판단이 하나님보다 앞설 때, 바울 사도는 이 같이 되뇌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롬 6:14).”
3.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3-5).”
결론부터 말하면 그리스도와 합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그만한 노력이 아니라 주가 행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더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내가 죽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즉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다. 우리의 부활은 저 멀리 장래에 대한 죽음 너머의 육신의 부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오늘을 사는 일이다. 현재의 일이다. 지금, 여기부터가 천국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그 삶의 증거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이다. 그럼 그게 어떻게 나타날까?
4.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혀 새로운 삶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7).”
곧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아브라함은 더 이상 아브람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저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기는 했으나,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이는 기정사실이다. 누군 그렇고 누군 아닌 게 아니다. 하나님이 어찌 행하실 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삶’으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알기 때문에 견딘다.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더 낫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이로써 나를 ‘예수와 함께 살리신다.’는 것은 전에는 관심도 없던 저 아이들의 가정이 자꾸 신경이 쓰인다. 저의 상한 영혼이 눈에 밟힌다. 단지 동정하는 마음의 정도가 아니라 내가 그 곁을 지킨다. 떠나지 않는다. 핑계대지 않는다. 이쯤 되자, 아브라함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결코 이삭을 죽이지 않으실 거란 걸 말이다. 설령 죽이신다 해도 다른 복안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말이다. 곧 이삭을 죽이시려는 게 아니라,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자기 안의 우상이 될 수 있는 이삭을 죽이게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그러므로 이 일은 장래의 일로써만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면서 또한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일이기도 하다.
5.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다시 죽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8-9).”
이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렇지! 그러기 위해 내가 무얼 어떻게 얼마나 더 잘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 함께 죽었다. 내 아집과 욕심은, 날마다 죽었다. 그로 인해 더는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제 저들에게 나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녔었다’는 사람들에게 더욱 끔찍한 어려움이 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니 둘 중 하나다.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그리 된 고난이 있고, 하나님이 일부러 그리 되게 하시는 고난이 있다. 이 둘의 모양은 같으나 그 맛은 다르다. 그래서 누구는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잃었던 은혜를 찾아 나아간다. 그런데 누구는 더욱 완악하여져 하나님만 아니면 되는 일로 위로를 삼으려 한다. 그 차이는 확연하나 그 과정은 동일하여 우리는 감히 속단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면 반드시 산다. 살아서 주의 이름을 찾는다. 이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저의 고난 또한 우상이 되어 그것만 벗어나는 게 저의 목표가 된다.
6.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만찬의 삶이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0-11).”
‘모든 밥상 위의 음식은 죽음으로 새로 태어났다.’ 시금치가 시금치 그대로 살아서는 시금치가 아니다. 콩나물이 여전히 콩나물이어서는 콩나물이 아니다.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먹을 수가 없다. 배추가 죽어 김치가 되었다. 벼는 베어져 탈곡이 되어 쌀이 되었고, 쌀은 이내 죽어서 우리의 밥이 되었다. 온갖 재료는 찧고 빻고 전혀 별개의 존재가 되어 새로 태어났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롬 6:14).” 단순히 성격이나 취향이 바뀐 게 아니다. 전혀 별개의 사람이 되었다.
곧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만찬의 삶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우리는 죽어서 그리스도의 맛으로야 산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맛을 내신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오늘 나의 선행이 전에 나의 선행과 다르다. 나의 긍정적인 마음이 더는 나의 의가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환난으로 인내를 이루며 안다. 인내로 연단을 이루는 과정에서 순금 같이 나온다. 우리는 기어이 연단으로 소망을 이룬다. 곧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이젠 우린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우리는 이제 저들을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시 55:1).” 이는 내가 속상해서 살 수가 없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4-5).” 가끔은 우리가 왜 저런 사람 때문에, 이런 세상 때문에, 왜 이런 일을 가지고 괴로워하는지 본인도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때론 어디 멀리로 도망쳐서 나는 알지 못했다고 변명하며 살고 싶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6).” 아무도 없이 숨고 싶을 때도 있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7).” 그러나 그러는 동안 우리의 억척스럽던 순이 죽고 간이 배여 온갖 양념으로 버무려져 전혀 새로운 삶으로 맛을 낸다. 이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었다.
나오는 말
곧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1-3).” 저 밥상의 음식들처럼,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졌다. 이는 실패가 아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 같다. 공연한 일 같다. 결실도 없고, 너무 막연하여서 가면서도 이 길이 맞나? 싶다.
우리의 이런저런 모양이 나약하기만 한 것 같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무력하고 나약하기 이를 데 없으나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곧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2:9).” 어떻게 약한 걸 자랑할 수 있을까? 온통 강한 게 우상인 세상에서, 저마다 으뜸이 되고 나름의 만족과 기쁨을 숭배하는 땅에서!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날마다 기적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날들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두시는 이 모든 일들을 주의 이름으로 받아서 섬기는 일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식탁 위의 음식은 그 무엇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내가 힘에 겨워 주를 바랄 때, 잘 데쳐지고 버무려져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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