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로마서 6:11-23 /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전봉석 2018. 7. 20. 15:10

20180722 주일



로마서 6:11-23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6: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에 대하여’와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오늘 본문 6장 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하여 그 구분을 뚜렷이 하고 있다. 결코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는 하나님의 은사로만 산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 구분은 분명하여서 죄의 값과 하나님의 은사의 값은 같을 수 없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곤고한 사람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는 이를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이 감사할 줄도 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그래서 우리의 애통함은 하나님의 은사로의 탄식이다.


이 일은 성령이 이루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 이는 자명하여 그 결과는 승리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이를 단지 구호나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다시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곧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 여김으로 바른 지배를 받고 온전히 드려지는 삶을 살 게 된다.


세 가지 타동사, ‘여기다’와 ‘지배하다’와 ‘드리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몸을 죄가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 이는 세상이 주는 즐거움으로 안식하려 할 때 그 고난은 가중되고 환난은 확대된다. 징계는 마다하고 교훈은 싫어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이 대목에서 주목하게 되는 세 가지 타동사 ‘여기다’와 ‘지배하다’와 ‘드리다’가 눈에 띈다(11, 12, 13절). 타동사란 그 자체로 움직일 수 없고 어떤 대상에 의해 목적어가 필요한 동사이다.


먼저 11절에 나오는 ‘여기다’는 ‘그리 앎으로 처신이 달라지는 행위’를 말하는 동사다. 이어서 12절에 나오는 ‘지배하다’는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에서처럼 ‘자신을 다스리려 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동사다. 다음 13절에 나오는 ‘드리다’는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는 곧 ‘행위로 드러나는 선택’을 바탕으로 하는 동사다.


곧 우리의 선택은 행동으로 이어져 결과를 좌우하게 된다. 다시 말해 여기 세 가지 타동사는 그 자체로는 움직일 수 없으나, 그 움직임은 대상에 의한 목적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즉 ‘여기고, 지배하고, 드리는’ 행위는 실제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한 목적을 분명히 할 때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무엇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무엇에 의해 규정된다. ‘무엇을 지배하는 일’ 또한 무엇이냐에 따라 그 쓰임은 달라진다. 그리고 ‘무엇에게(어디에) 드린다는 것’은 그게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다른 동작이 된다. 공통적으로 그 세 가지 타동사는 선택에 따른 결과를 규정한다. 곧 우리의 선택은 역사의 결말을 뒤바꿀 수도 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고 하셨을 때, 세 개의 선택 항목이 주어진 셈이었다. 먼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할 수 있었다. 다음은 ‘그런 일이라면 남편 될 요셉과 상의해서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는 선택으로 저는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었다. 말씀대로 ‘여기고’, 자신의 불가능한 환경을 ‘지배하여’, 그 몸을 성령에게 ‘내어드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선택은 ‘~라 여길 때’, ‘~을 지배할 수 있고’, 기어이 ‘자신을 드려’ 순종할 수 있다.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13절은 명확히 알려준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서 우리의 몸을 ‘무기’로 표현한다. 곧 우리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줄 것인지,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릴 것인지!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몸과 영을 따로 분리할 수는 없으나 그 몸으로 ‘무엇을’ 담는 도구나, ‘어떻게’ 쓰일 수 있는 무기로는 사용될 수 있다. 곧 우리 몸은 칭의와 동시에 주의 성전으로 쓰이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우리가 ‘어떻게’ 여기고, ‘무엇에’ 지배되어, ‘어디에’ 드려지는가 하는 문제는 타동사가 그 목적에 따라 그 대상의 쓰임에 의해 나타나는 동사인 것과 맥을 같이 헌다. ‘죄에 대하여’인지, ‘하나님에 대하여’인지! 마리아는 단지 관념적으로 그의 몸을 드린 게 아니다. 그의 뱃속에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 잉태하셨다. 곧 오늘 우리도 우리 몸을, 그 실체적으로 드려야 하는 일이다! 14절에서 그 이유를 강조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었다. 그 구원의 길은 둘 중 하나이다. 완벽하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다 지키든가, 아니면 철저히 은혜 아래에 거하든가!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이 우리의 전부이든가, 아니면 아예 아무 것도 아니었든가! 그 중간이란 없다. 아담 이래 모든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누구는 수도원 생활을 하고, 누구는 도를 닦고, 누구는 수련을 한다지만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성인(聖人)으로 추앙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99%의 죄나 1%의 죄나 어느 죄도 용인될 수 없다. 우리의 칭의는 100% 은혜로만 가능하듯 우리의 성화도 100% 은혜로만 가능하다.


오늘 말씀 15-16절에서 이를 추론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빛의 사명


우리의 최종적 목적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우리가 사는 본질적인 이유다. 우리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는 빛의 사명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그렇다면 어찌할까? 오늘 말씀 17-18절에서, 그래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를 논거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즉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세상의 위로와 격려로 위안을 삼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이를 부끄러워할 줄 안다. 그 덧없음에 대하여, 종교를 마치 심리적인 안정이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정도로 여긴다면 이는 그저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얼 얻어내기 위해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치유를 목적으로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이는 성경의 진리와 상관없다. 구원은 다만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진리는 말씀이다. 때론 거칠고 모질어서 말씀대로 살 수 없다 해도, 이를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는 산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바울 사도는 왜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켰는지 분명히 했다. 다윗은 한 술 더 떠서 우리는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러나간다고 하였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왜 그런가? 우리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찌 여기고, 무엇에 의해 지배되고, 왜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드려야 하는지, 우리 몸의 타동사 ‘여기다’와 ‘지배하다’와 ‘드리다’는 명확히 그 대상이 하나님이요, 목적은 영생함에 있다.


죄에 대한 자유, 의에 대한 자유


오늘 본문은 우리의 자유를 역설한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20).” 예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그래서 의를 알지 못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4-36).” 지금 우리가 얽매여 사는 게 무엇인가? 그게 우리의 대상이며 목적이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나님 아닌 모든 것은 우상이다.


이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우리는 주의 은혜가 고마워 기꺼이 자신을 내어드리는 사람들이다. 어떠하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이를 세상은 감당할 수 없어 때론 우리를 조롱하고 업신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9).” 이를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 6:21).” 죄의 종이었을 때 의에 대해 자유하였던 옛 사람을 부끄러워한다. 이제는 “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지므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렘 31:19).”


그러므로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12:13).” 이를 알기 때문에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말씀 앞에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죄의 종과 하나님의 종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22).” 곧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이 말씀의 의미 앞에 설렐 수 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선은 오로지 하나님이시다. 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그리 여기고, 그래서 자신의 사욕을 지배하여 우리 몸을 드리는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곧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7-8).” 우리가 이처럼 한 영혼으로 씨름한다는 일, 누구를 위해 무엇을 바라고 구하는 것에 대하여,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그래서 우리는 이제 확실히 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처럼 우리의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타동사 ‘여기다’, ‘지배하다’, ‘드리다’로 그 대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목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데 있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15: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