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로마서 7:22-25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전봉석 2018. 7. 25. 16:41

20180729 주일



로마서 7:22-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 주간 한 사람의 허망한 생을 목격하였다. 더러는 저가 너무 지나치게 강직하여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 했다. 또 더러는 이와 견주어 누구를 지칭하며 너무 지나치게 자기논리에 능한 나머지 몇 배는 더 잘못하고도 양심에 거리낌 없이 잘만 살아간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하였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그럼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우리는 그저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더 나아서 율법에 가까운 생을 다하여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다.


곤고함이란, 어렵고 고생스럽다는 말이다. 그 형편이나 처지가 부자여서 좀 낫고 가난하여서 더 못난 게 아니다. 본문에 일러 사도 바울은 통탄해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일 앞에 번번이 걸려 넘어지는 게 그리스도인이다. 죄의 종이었을 땐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6:20)." 그러니 그때가 좋았는가?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21)." 이제는 그 끝을 안다. 앎으로 의를 구한다. 의를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의 죄 됨이 걸림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22)." 이를 앎으로 우리는 '여기고', '지배되어', '드리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11-13)." 이것이 성화의 길이다. 칭의는 거저 얻은 것이면 성화는 이를 두고 지키고 다투어 이겨내는 일이다. 칭의가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면 이와 같은 싸움도 은혜로써 넉넉히 이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7)."


먼저 오늘 본문에 앞서 '너무 쉬워서 가장 어려운 구원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하는 오늘 바울이 절규가 실은 우리로 맡기신 한 생을 다하는 동안 끊임없이 절규하고 애통해하는 것이 필연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이제는 참으로 우리를 곤고하게 한다.


나아만의 이야기


너무 쉬운 일이어서 가장 어려운 게 은혜다. 받는 자리에서는 거저인데, 주는 자리에서는 그 값이 대단하다. 열왕기하 5장에서 '나아만의 이야기'를 보자. 지금의 시리아인 아람은 이스라엘에게 위협적인 강국이었다. 아람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은 큰 용사였다. 저에겐 권세와 능력이 있었다. 한데 나병환자라.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1).” 보면 늘 아무리 센 척 해도 약점은 다 있다.


이 이야기 가운데 아무런 조명도 받지 않는 인물이 있었으니 이스라엘에서 사로잡아온 소녀다. 소녀는 나아만의 처를 시중드는 종이었다. 저가 주인의 나병을 두고 말하였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3).”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이는 부모와 떨어져 머나먼 타국으로 붙잡혀와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처럼 일어났다.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소녀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는 길이 구원의 척도인 것을 말이다.


나아만은 소녀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사마리아로 갔다. 그 권세와 위용은 이스라엘을 놀라게 하였다. 이 어떤 정치적인 음모인가 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아람 왕이 자신들의 용사 군대장관 나아만을 위해 글을 보낸 것이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7)." 어떤 일이 터지면 그 일을 마주하는 태도가 천태만상이다. 이에 선지자 엘리사가 듣고 자신에게 보내라고 한다(8).


그리고 저에게 처방을 내린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10)." 내다보지도 않고! 감히 그의 위용에 맞게 예우도 갖추지 않은 채! 나아만은 노여움에 그냥 돌아가려 한다. 그때 또한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름 없는 종들이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13)." 그 일은 너무 쉬워서 가장 어려웠다. 주 앞에 나오면 되고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믿으면 되는 일인데!


선을 원하나 악이 함께 있다


오늘 본문은 이 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선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고 악은 여전히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선은 어둠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일이고 악은 술 취함과 음란함이다. 선은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함이고 악은 방탕함이다(13:11-14). 그러므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랑하여 결혼을 하였다는 소리다. 결혼을 하였으니 더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나? 그럴 수 없다. 더욱 사랑함으로 열매를 맺는다. 오히려 결혼 전에 즐기던 것들을 끊는다. 삼가하여 스스로 더욱 결혼 생활을 값지게 유지할 의무를 갖는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가정을 지키고 사랑의 정결을 원하나 유혹이 늘 도처에 있다. 우리 안에 선을 원하는 만큼 악이 함께 있다.


자신을 경계하라


그러므로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여전한 우리의 죄성은 악을 부러워한다. 그래서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시 73:2)." 왜냐하면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3)." 때로는 이 얼마나 허망한가?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 7:15)."


우리는 그래서 말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눅 11:35)." 자칫 남들과 비교하고 어떤 이의 이런저런 경우를 살피면 우리만 바보 같다. 한데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주의 놀라운 섭리 앞에 우리는 붙들려야 한다. 나아만의 이야기에서 비록 노예로 끌려온 어린 소녀가 믿음으로 증거 할 때 나아만을 주 앞에 보낼 수 있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소녀는 맡은 바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이다.


은혜의 단절은 곧 사망이다


그러니 어쩔까? 우리의 곤고함에 대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 느끼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가슴으로는 느껴지는데 삶으로 실천하기가 왜 이토록 불가능하기만한지!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날마다 고하는 사람들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내가 알아서 할게요,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장담하는 자가 제자가 아니다. 베드로는 호언장담하였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이 얼마나 멋지고 결연한 모습인가?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 그러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 14:38)." 기도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약속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나오는 말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할 수 없는 데서 감사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비록 우리의 한계는 너무 빤하지만 그래서 주를 바람으로 주께서 우리를 책임지실 것을 말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때로는 암담하고, 때로는 어떤 가치관도 기준도 모호하여져 금세 쓰러질 것 같으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예수가 길이다. 그는 진리이다. 생명이시다.


곧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우리가 믿는다는 건 그와 같이 여기는 일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타동사 '여기다'는 그 목적이 뚜렷한 대상에 의해 한정된다.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으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 주의 자녀로 나를 여길 때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여기서도 타동사 '지배하다.'는 또한 그 대상에 의한 뚜렷한 목적을 향해 행하게 한다.


이에 우리는 날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 그러할 때, 주님은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그러므로 우리가 통회하는 것이다. 애통해함으로 심령이 가난하여 온유한 자로 주를 바란다. 긍휼히 여기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사는 이들은 절규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에 그럼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