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12 주일
로마서 9:14-24
하나님의 주권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9: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우리는 우리 불의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말하진 않는가?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때론 억울하다. 너무하시다. 왜 내게만 이러시는가, 답답하다. 나만 안 풀리는 것 같고, 나름은 열심을 다해 산다고 살았는데 다들 잘 되는 일이 왜 나에게만 이처럼 어려운가 싶다. 이제는 조금 살만하다 싶으니까 부모님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기껏 잘 될 줄 알았던 일이 곤두박질쳐 어려움에 봉착한다. 이제 노년을 평안히 보내려 평생 애써 모은 돈을 투자했는데 졸지에 망하고, 도리어 큰 빚을 지고 밤까지 일을 해야 하는 처지의 사람을 우린 주변에서 흔하게 본다.
그럴 때,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가? 어떻게 이러실 수 있나? 그럴 때 성경은 가르치신다. 과연 우리는 어떤 말을 심었던가?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잠 12:14).” 가만히 돌이켜 그동안 나는 주 앞에서 어떤 말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던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곧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우리의 특별함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4).”
오늘 본문은 일갈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내 건강을 해치고, 사업을 망하게 하시고, 나름 애써 수고한 노력이 보람도 없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불의하신가? 앞서도 밝혔듯이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8).” 때로는 이 말씀이 어렵다.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다.’ 저들 삶을 보면 에서가 오히려 야곱보다 훨씬 열심을 다한 삶이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마엘은 무슨 죄인가? 이삭은 또 상대적으로 뭐가 그리 대단하였나?
이는 우리 이해와 상식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기본 명제를 받아들이는 게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를 선포한다.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시 92:15).” 여전히 고통스러운 육신과 안 풀리는 인생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시 145:17).” 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특별함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하나님이 임의로 그러시는 데 있어 이를 믿음으로 수긍하고 인정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값진 신앙이다. 이를 이성적인 판단으로 설득할 수 없으니, 때론 여느 종교와 같이 믿으면 잘 되고, 복 받아서, 자기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 본문은 이 모든 게 주의 긍휼하심으로 전적인 주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를 아는 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자신은 이미 죽어 마땅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런 자신을 살리신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고로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기본 전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것이다. 누가 임의로 주를 바라고 구해서 얻을 수 있는 은혜가 아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이 모든 일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긍휼하심이다.
강퍅한 불신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심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롬 9:17).”
주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데 있어 때론 세상을 동원하신다. 안 믿는 이의 불순종도 사용하신다. 바로에 대한 이해로 한결 선명해진다. 곧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우리는 종종 누구를 보며,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저렇게 잘도 사나 싶을 때가 있다. 이를 시편에서는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시 73:4-9).”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저들을 세워 믿는 자를 단련하신다. 시련을 더하심으로 주께 나아오게 하신다.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렘 25:11-12).” 하나님 앞에서는 그 모든 게 도구일 뿐이다. 주의 자녀를 이뤄 가시는 데 있어 필요로 사용하신다. 주의 관심은 오로지 주의 자녀에게 있다.
우리를 강퍅한 자로 내버려두지 않으심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때론 믿는다는 사람이 악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할 때도 있다. 바울이 바울 되기 전의 사울이었던 때를 보면 안다. 한데 그것까지도 하나님은 긍휼하심으로 돌이켜 세우신다. 그리하여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 우리들로 하여금 악함의 최종적인 결과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렘 11:7-8).”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오늘 우리의 삶의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 저들은 살만하면 악으로 결탁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이에 하나님이 진노하사 주변을 동원하셔서 징계하셨다. 그럼 또 저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긍휼하심 앞에 나왔다. 하나님은 그런 저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평안을 허락하셨다. 하면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타락한다. 이처럼 타락과 징계와 회개와 용서가 반복되는 것을 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어쩌면 주의 자녀들의 특혜는 언제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한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와 같은 담대함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 우리에게 주어진 담대함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그러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음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19-20).”
종종 우리가 가장 쉽게 범하는 죄가 하나님을 판단하는 일이다. 이럴 때 요나가 생각난다. 저는 자신의 판단으로 니느웨로 가라 하시는데 다시스로 갔다. 이에 붙들려 물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갔다 나온 뒤 다시 니느웨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저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용서를 받은 것이다. 사역에 성공을 거둔 셈인데 저는 성이 났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1-2).” 하나님을 판단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피고인석에 앉히고 판단을 일삼는지 모른다. 사사건건 어떤 일을 두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속단하고 판단하고 심지어 비난한다. 그러니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욥 36:23).”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그저 우리는 지음을 받은 그릇에 불과하다. 한데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 45:9).” 이는 스스로의 본분을 잊을 때 감히 하나님을 판단하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
우리는 주인 앞에 내세울 게 없는 그릇과 같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우리의 쓰임은 전적으로 쓰시는 이의 주권 아래 있다. 내가 주의 권한을 대신하여 설 수는 없다.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 소용에 맞는 자리에다 쓰시는 일이다. 그런데 종종 주인을 타박하는 그릇 같다. 자기 임의로 자기 쓰임을 규정하려든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 90:3-4).” 언제든 주가 부르시면 가야 할 인생이면서, 입김의 무게만도 안 되는 생을 두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굴 때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주 앞에 고개 숙여야 한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그 쓰시는 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내 주장 내 의지가 꺾여야 비로소 온전한 쓰임을 받는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곧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나님이 쓰심으로 귀하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2-23).”
스스로 쓰임을 구하는 쓰임은 결국 거짓되다. 나름의 판단과 기준은 종당에 자신을 드러내게 돼 있다. 가령 어느 가난한 나라를 동정해서 선교를 떠나거나 약하고 힘든 이들에 대한 측은지심으로는 스스로 의를 감당하려 할 때, 이는 선한 만큼 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항시 우리가 담고 있는 것이 악하고 추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누구도 백 프로 순수할 수 없다. 남을 의식한다. 알아주길 원하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 14:13-14).” 우리 의지로 되는 게 아니다. 언제든 우리 안에 우리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같이 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는 따위의 마음이다. 심지어 스스로 말하길 하나님 앞에 꺼릴 게 없다는 소리까지 서슴지 않는다. 우리가 귀한 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곧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하나님의 영광을 채우려면 자신을 비워야 한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23-24).”
주님은 우리를 그 쓰임에 맞는 자리에 놓으신다. 예를 들어 이방 나라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데 있어, 일찍이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소녀가 있었다. 또한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7).” 하는 말씀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주가 오늘 우리를 여기에 두신 까닭은 주의 영광을 우리 안에 채우시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비워야 한다. 비워내신다. 끊어버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1-5).”
이로써 주의 영광이 우리 안에 채워져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사는 동안 살면서 쓰이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읽힌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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