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26 주일
로마서 10:1-15
우리는 일상이 사역이다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10: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들어가는 말
우리의 일상은 사역이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우리는 살면서 사는 동안 그 살아가는 일상이 곧 주를 영화롭게 하고 주의 살아계심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자로서 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란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곧 우리의 일상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자취’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논리는 다르다. 점점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나아지면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그럼 더욱 살기 좋은 사회, 사람다운 사회로 변화되어 갈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악랄해지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풍조는 점점 교묘해진다. 동성애는 물론 소아성애자의 논리도 도를 넘어섰고, 동물과의 교감을 사람과의 관계 이상으로 보는 문화도 극심하다. 근친상간은 여전하며 온갖 미신적인 행위도 점점 득세한다. 오만잡것에 소원을 빌고, 점괘를 상술로 하여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타로카페’나 ‘사주관상풀이’가 성행하고 있다.
하다못해 영화나 드라마를 찍기 전에 고사를 지내고 산악회나 낚시, 자전거 등 어떤 행사나 모임에 앞서 어김없이 ‘산신제’니 ‘진정맞이굿’이니 하는 의식으로 무사안일을 기원한다. 말 그대로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운운하며 저마다 종교를 무슨 심약한 이들의 위안 정도로 매도하면서 사업이나 장사에 앞서 굿을 하고, 어떤 기원을 하고, 온갖 액운을 막는 따위의 의식을 서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교육열이 높아진 것과 무관하게 부모와 자식의 반목의 정도는 도를 넘어섰고, 살아 있는 부모의 유산을 두고 소송하고, 자식에게 물려준 유산을 도로 반환하는 소송도 끊이지 않는다.
성경은 이를 우리의 엄연한 죄성으로 본다. 사람들은 한사코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그건 그렇지 않다. 가령 1912년 2200명을 태웠던 타이타닉 호는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을 비롯해 1500명이 4천 미터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당시 타이타닉 호는 모든 과학을 집대성한 결과물이었다. 이에 각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가 싶더니, 그 다음 이듬해인 1914년에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였고, 그 뒤 20여년 후인 1939년에는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이는 결코 사람이 사람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음을 반증하는 예이다.
우리의 사명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1-2).”
우리의 사명은 저들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다. 나름 정화와 자정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우리의 열심으로는 올바른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여기서 지식은 헬라어로 ‘에피그노시스’인데, ‘그노시스’는 앎을 의미하고 그 앞에 ‘위에 것’을 뜻하는 ‘에피’를 붙여 쓰인다. 즉 우리의 이 지식은 ‘위에 것을 앎’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누구는 사후 세계가 있다하고 누구는 없다 하고, 종교마다 누구는 이렇게 구도하고 저렇게 찾아 각자의 신에게로 간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고 찾아오셨고 열어 보여(계시) 알게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그러니까 사람이 애써 수고하여 얻는 열심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지식’에 대하여, 우리는 그 앎의 가치를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면서 귀히 삼는다는 것이다. 이를 저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로 하나님의 의를 감당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없고, 바로 알 수도 없다. 가령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선교사를 보자. 저는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폐렴으로 죽었다. 당시 영국 국교회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를 다니다가 나름의 정의감으로 관료주의적인 학장과 교수진을 비판하다 퇴학당했다. 저는 공교회에서 목사가 되는 길이 막히자 기회를 얻기까지 선교사로 나갔다. 그래서 이동하며 사는 인디언들과 함께 생활하다 5년 만에 폐렴에 걸렸다. 그런 그를 받아 병간호를 맡은 사람은 당시 친분이 있던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였다. 그의 딸 제루사는 브레이너드를 극진히 간호하다 그녀 또한 폐렴에 걸렸다. 1747년 10월, 데이비드는 숨을 거두었고 그를 간호하던 에드워즈의 딸 제루사도 폐렴을 이기지 못하고 숨졌다.
어떤 상황 앞에서 우린 어리둥절하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러실 수 있나?’ 하는 반문이 저절로 들 정도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 앞에서 당황스럽다. 십대 후반의 한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그녀의 꿈은 의사가 되는 거였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에게 봉사하고 싶었다. 한데 소녀의 병명은 희귀한 골근육질환이었다. 몸은 굳어지고 심한 통증은 그녀를 억눌렀다. 그녀의 나날은 피폐해져갔고 고통 가운데 휩싸여 십 수 년을 치료에만 전념했다. 이내 나이 삼십이 되던 어느 날, 그녀는 주의 뜻을 두 손을 들었다. 아무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언제까지 선하지 않다고 등을 돌리고 살 수는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수잔 훠쉬’이다.
골결핵(척추결핵)으로 무려 20여 년간 병상에서 씨름하다 ‘있는 그대로’ 지금 거기에 두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순응하며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녀는 멋지게 남은 삶을 새로 채웠다. 그녀는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하는 구호로 자신에게 먼저 감사로 격려했다. 그녀의 변화는 같은 병상에 누운 환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이 되었다. 침울하고 침통한 가운데서 하루하루를 간신히 견뎌내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그녀의 끔찍한 현실은 오히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걸 해!’ 하는 충성으로 ‘주의 일’을 전파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그런 소문은 ‘수잔 훠쉬 연합’이 생겨나게 하였고 동조하는 병원과 환자들이 늘어나서 프랑스 전역에 30여 개의 지구가 생겼다. 그녀는 일생동안 의사가 된 것보다 더 많은 환자를 돌본 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우리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보다 자신의 의를 더욱 붙들기 십상이다. 곧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곧 우리의 어떤 행위가 구원을 도모하려 하면 구원은 묘연하다. 율법으로는 어림없다. 누구도 율법을 충족시킬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의로 인하여 인치심을 얻는다. 곧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율법의 마침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
그러니 우리의 어떤 수고와 애씀으로도, 그 열심이 자신을 삼킬 수는 있겠으나 누구도 구원할 수는 없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곧 우리를 대신하여 그 계명을 완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죄로 얼룩진 사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계명이다. 한데 그와 같이 율법에 완전한 자이어야 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합당하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이다. 죽어라 하고 율법에 충실하며 율법으로 완전한 자로 살다 죽던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수 없음을 고백하고 이에 율법의 완성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거나!
주님이 오신 이유는 그것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그러자면 율법으로도 완전하여야 하는데 아담 이래로 그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5-18)."
구원으로 가는 길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5-8).”
1) 구원은 투쟁이다
다시 말해 누구도 자신의 열심으로는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릴 수도, 무저갱으로 내릴 수도 없다. 우리에겐 다만 말씀만 있다. 이 말씀이 내 입에 있어 말로 시인하게 하고, 마음에 있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 이를 앎으로 우리는 믿음의 말씀을 주신 바 그 삶으로 살아서 전파하게 되는 것이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그러니까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이와 같은 의로움으로 증명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얼마나 그 싸움이 치열한가? 우리 기독교사의 거목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와 칼빈도 그러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자신들이 바라는 하나님과 사뭇 다른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끌려야 했다. 가령 아우구스티누스는 19세부터 마니교에 심취해 있어 구약성경을 세속적으로 여겼다. 저는 이원론자로 그리스도는 구약의 어떤 예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8세에 그는 마니교의 환상에서 깨어나 철학적인 논쟁으로 마니교와 싸웠다. 또한 정욕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기에 그로부터 1세기 후에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이 가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합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착각하는 가장 달콤한 유혹에 빠져 있다. 하지만 앞선 믿음의 거장들의 발자취를 보더라도,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인의 삶은 논쟁을 위해 삶이다. 사는 날 동안 투쟁이다. 곧 우리는 이를 증명하는 자세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 곧 각자의 일상은 안 믿는 이들에게 세상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는 사역의 길이다.
2) 구원은 실현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우리가 죄를 깨달음으로 주 앞에 나아와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구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는 안일한 판단이 신념을 낳고, 우리의 신념은 자기 아집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을 조롱거리가 되게 한다. 언제부턴가 교회가 세상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근심하는 처지에 놓였다. 목사가 성추행에 휘말리고 공금을 횡령하여 구설수에 오르고, 대형 교회는 세습이나 온갖 부의 축적으로 기독교를 ‘개독교’로 전락시키고 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구원은 거저 받았으나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하는 일이다. 이에 대하여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그러므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고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그러므로 구원은 날마다 매순간 우리의 일상으로 드러나는 실현이 된다.
일상이 고백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9-10).”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하는 고백은 마음의 다짐을 붙든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마음으로 믿었고 입으로 시인하였다. 곧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 이는 저절로 벌어지는 탄성과 같다. 찬송이란 거듭 자랑하는 것이다. 장엄한 산에 올라 와, 하는 타성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받았다고 하면서 남들 앞에서 자랑 한 번 하지 못하고, 그를 구주로 시인하여 칭송할 줄 모른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다. 그러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오늘 말씀은 이와 같이 선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곧 우리가 사는 일은 구원을 실현하는 일이며, 이를 두고 투쟁하는 현장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세상과 하나도 부대끼는 게 없고 안 믿는 자들과 사업을 도모하면서도 어떤 어려움이 없다면 이는 우리의 믿음이 변질되었거나 아니면 믿는다고 여기는 우리의 믿음이 실제로는 믿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을 성경은 분명히 한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31).”
성경은 입장은 분명하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이에 말씀이 걸림이 되어 교회를 떠나고 말씀을 등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는 적당히 타협하여 함께 고사도 지내고 운수도 따지면서 나름의 사업을 확장하고 이를 축복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과연 그 믿음이 그 믿음이겠나?
결국 믿음은 마음의 문제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그 속을 누가 알까? 저의 믿음을 어찌 볼 수 있겠나? 먼저는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듣고 아는 일이며, 이를 선포하듯이 사는 일상을 보고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일상이 고백이 되는 것이다.
성도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11)."
우리가 주저하는 까닭은 대부분이 부끄러움 때문이다. 수치를 감추고 잘못을 덮으려 드는 것은 ‘처음 사람 아담의 나무 그늘’과 같다. 저는 선악과를 먹은 뒤 하나님의 음성을 피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9-10).” 숨는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 34:5).”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일은 다른 그 무엇에도 부끄러울 게 없다는 소리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10).”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도 공언하는 것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땅에서 벗어나 저 천국에 이르렀을 때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차별이 없는 구원의 은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2).”
곧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7-10).” 구원에는 차별이 없으나 믿음에는 차등이 있다. 이 땅에 살면서도 누구는 저 천국의 항구에 닿기까지 여유로우나 누구는 내내 멀미와 두려움에 떤다.
또한 같은 천국이나 각자가 다른 구원으로 이루어진다. 곧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그곳은 주의 성품으로 만족하는 나라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특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3-14).”
곧 우리가 이 땅을 살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아무나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것 같지만, 믿음은 너무 쉬워서 가장 어렵다. 구원은 거저여서 가장 받지 않는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 4:29).” 우리가 저들과 다른 점은 같은 세상에서도 다른 것을 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 무엇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찾는 삶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곧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시 119:145).” 우리는 그 부르짖음의 대상이 다른 것이다.
그 까닭은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 이를 알기 때문이다. 이를 성도는 일상에서 느낀다. 입에 달고 산다. 마음에 새겼다. 기회를 얻든 못 얻든 전파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가장 쉬운 일이다. 그런데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믿을 수 없으니 저들은 우리처럼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들으려하지 않으니 어찌 믿겠나?
모든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이에 따른 다음 수순은 전파하는 일이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누가 시켜서, 어디서 배워서, 그리 행해야 하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랑 같은 것이다. 저절로 자꾸 입만 열면 말하게 되는 증거다. 온통 사로잡힌 생각이다. 끊임없이 갈구하는 소망을 이룬다. 이 전도는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
우리 일상의 근거는 성경이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5).”
증명돼야 한다. 나타내야 한다. 아기 얼굴을 보면 저절로 배시시 웃음이 번지듯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설레듯이 우리의 일상은 보내심을 받은 자리에서 저들에게 들려지고 맡아지고 느껴져야 한다. 오늘 우리 곁에 붙이시는 사람들, 아이들은 하나님이 내게 보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하신 바로 그 대상으로 하나님의 양들이다. 우린 우리의 일상으로 저들을 양육하고 건사하고 다스릴 사명을 가진다.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사건이나 상황은 모두 하나님이 그리 이루시고자 하는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이것이 성경의 확고한 의지다.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우리는 이 땅을 이롭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도모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게 아니다.
우리에겐 말씀을 두셨다. 성경이 모든 기준이다. 말씀으로 살고 말씀으로 죽는다. 말씀에 의해 여기서 살고 말씀으로 오늘의 일상을 맡은 자이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나오는 말
우리의 일상은 아름다운 발걸음이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40:9).”
때론 우리의 기대와 희망과 어떤 의지와도 상관없는 듯하나, 하나님의 의는 선하시다. 이를 알게 하시는 게 우리 안에 두시는 영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그러므로 매일 매순간 우리의 일상이 사역으로써 하나님이 맡기신 생명이다. 자식도 기업이다. 건강도 시간도 모든 순간의 찰나 찰나가 하나님의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사명을 맡았다. 일상이 사역이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데, 우리 삶의 목적이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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