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14 주일
로마서 13:8-10
사랑의 빚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여전하여서 육신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 땅의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1).” 물론 그 힘과 능력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나서 영적인 의미를 갖지만, 여기서는 세상을 통치하는 권세 잡은 자들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2).”
이에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선을 행함이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3).” 저들 또한 주가 세우신 사역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4).”
우리가 저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진노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5).” 우리는 이 세상의 법을 존중한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6).” 이는 세상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성도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우린 두려워할 걸 두려워하고 존경할 것을 존경한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7).” 즉 우리는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의 양심,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으로 부조리와 부패와 악한 것들까지도 하나님은 도구로 들어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안다. 가령 다윗과 시므이의 이야기를 보자.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삼하 16:13).”
그런데도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11).” 그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사랑의 빚진 자
1. 사랑은 우리 최고의 의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어떤 권세도 주장도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 이를 알기에 우리는 그 질서를 존중한다. 왜냐하면 그런 권세를 곧 하늘이 내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그래서 그들이 존귀한 게 아니라, 그런 자들까지도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존귀하심이다. 이 땅의 그 어떤 권세도 우리를 주도할 수 없음을 알기에 또한 우리는 세상의 것에 의연해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막 12:17).” 우리가 이처럼 세상의 것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우리에게 더하신 새 계명이 있기 때문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이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5:12).”
우리가 저 권세 잡은 자들을 존경하는 까닭은 저를 그리 세우신 이에 대한 경외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그러니 눈으로 안 보이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사랑할 수 있을까? 곧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데서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을 그럼에도 사랑으로 위하는 길은 곧 우리도 주체할 수 없는 자유함을 주셨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가령 두 아들을 잃고 오히려 저들을 양자로 들여 아들로 삼은 여수 애양원 교회의 손양원 목사는 이 자유, 그와 같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그 증거가 되어준다. 사랑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을 위한 게 아니다.
① 사랑은 모두를 향한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기준이나 잣대로 선별하는 사랑이 아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눅 6:32).” 그런 까닭은 우리도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돌이켜 누구도 ‘그만한 값’을 치르고 난 뒤에 얻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기도하지 않아서이다. 아니,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사랑할 수 있는 길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래서 기도할 줄 모르는 저들을 긍휼히 여기고, 주를 외면하고 부정하는 가정을 위해, 그 부모와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우리로 저 아이들을, 사람을, 상황을, 사건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환경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더하시는 것이다. 그 길이 곧 중보다. 저를 위한 기도다. 우리의 도고는 능력이 크다. 곧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2).”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곧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그리로 서로에게 그리할 수 있게 하신다.
②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이 사랑은 막연한 구호가 아니다. 매우 구체적인 실천이다. 똥 싼 아이의 똥꼬를 닦아주는 일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억지를 부리는 아이엄마의 고집을 당해내는 일이며, 이를 위하고 격려하느라 기꺼움으로 말품을 팔고 어르고 달래 위로하는 일이다. 때론 싫증이 나고 신물이 올라오고 낙심과 실망이 일어난다 해도 다시 또 주의 이름을, 저를 마주하며 저를 위하여 비는 일이다. 곧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그리하는 까닭은 우리가 보람을 얻고자 함도 아니고, 이에 따른 보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오직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을 가지고 말이나 생각으로만 그리하는 게 아니라 행함과 실천으로 일상 가운데서 그리 사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 믿음은 죽은 것이고, 주의 능력을 믿음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것으로 죽은 믿음이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즉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이는 우리가 빚진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보다 더 용기가 필요한 사랑이 또 있을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즉 사람이 되어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그 사랑으로 인해 오늘 우리가 산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2. 사랑은 율법의 기초이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9).”
우린 십계명의 첫 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신 것만 바로 지킨다면 나머지 아홉 개의 계명은 하나도 거역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곧 우리는 늘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이 우상이 되는 것을 본다. 자식이나 가족이, 돈이나 명예가, 꿈이나 어떤 낭만적인 생각이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잘난 외모가, 건강함이, 남들보다 좋은 여건이 어김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그에 따른 타협과 화해를 꾀한다. 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4).”
‘설마’ 하는 방심이 우리를 방심하게 하고, ‘다들 그런데 뭐’ 하는 나른한 시선이 우리를 안이 하게 하며, ‘까짓것’ 하는 자신감이 자신을 신으로 섬기게 하는 것이다. 물론 가족도 소중하고 자식도 귀하다. 우리에게 맡기신 건강도 필요하고 잘난 외모는 복되다. 좋은 조건도 남다른 재능도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달란트이다. 이는 맡기신 기업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3.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0).”
곧 말씀의 완성은 사랑이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우리가 주를 믿는다 하고, 주의 사랑을 받고 주의 사랑으로 산다고 하면서 우리 곁에 두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는 말도 안 된다. 곧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그럼 악이란 무엇일까?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시 34:21).”
악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하심을 거절하는 일이다. 자신의 주인을 자신으로 두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앎으로 선을 찾는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잠 11:27).” 악을 더듬어 찾는 것은 늘 세상의 보편성이다. 자아 성취다. 다들 그런다고 말한다. 까짓것, 하고 자만한다. 설마, 하면서 방심한다. 우리는 언제든 안이하고 방심하고 그릇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다. 이는 누구만 그런 게 아니라 전부다 그럴 수 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그러니 그러고 사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그냥 그러고 사는 게 쉽지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신을 두둔하느라 우린 늘 쉼 없이 남을 헐뜯는다. 저의 허물이 곧 나의 나음을 나태내기 때문이다. 이에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고로 사랑은 악을 행하지 않는 삶이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1).”
나오는 말
사랑은 무엇보다 적극적이다. 오늘 본문은 뒤에 이어 이를 일깨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 믿음은 처음일 뿐이지 나중은 사랑이다. 믿음이 결과가 아니라 시작이다. 믿음으로 시작하여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사랑을 이룬다. 그러므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빛의 갑옷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일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
이는 막연한 게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곧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13).” 여기서 우리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얻는다. 첫째, 단정히 행하자. 옷차림, 몸가짐, 마음가짐, 행동거지 모두 우리는 남들 모두에게 드러나는 삶이다. 우리의 삶은 감추어질 수 없다. 사생활의 문제가 아니다. 둘째, 방탕하지 않는다. 방탕은 분에 넘치는 생활이다. 믿음의 분량 그 이상의 생각이고 생활이다. 셋째, 술 취하지 않는다. 즉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술 문화’에서 놓여나지 못했다면 이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다.
넷째, 음란하지 않는다. 보면 모든 문화가 음란을 기반으로 그 기호를 따른다. 이를 패러디하고 각색하여 춤을 만들고 표현을 비틀어 요즘은 모든 게 선정적이다. 다섯째, 호색하지 않는다. 호색이란 음란보다 직접적이다. 음란은 모든 범주의 성적인 부분이라면 호색은 이를 찾고 즐기는 구체적인 행위다. 탐재와 호색은 그래서 같이 간다. 재물을 탐하는 탐재와 여색을 즐기는 호색은 그래서 뗄 수가 없다. 여섯째, 다투지 않는다. 시비는 늘 있으나 시시비비를 가려 우리는 우리가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일곱째, 시기하지 않는다. 시기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결점을 찾는 것이다. 저보다 못한 자신을 하나님 탓으로 여긴다.
우리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떠한 빚도 지지 말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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