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30 주일
로마서 12:3-13
우리의 마땅함에 대하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12: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들어가는 말
우리의 괴로움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들 때문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믿음 가운데 산다는 일은, 우리로 스스로 의연할 수 없고 느긋할 수 없으며 자기로 만족할 수 없다. 그럼에도 확신을 갖고 사는 의연한 삶이라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자족하며 사는 삶이거나 스스로 만족하여 ‘이만하면 됐지?’ 여기는 거짓 위안으로 사는 경우일 것이다. 한데 이는 둘 다 우리로는 감당할 수 없다.
명절을 보내며, 우리는 먼저 우리의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 되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7).” 곧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치르는 기일이니 추도예배니 하는 것까지도 실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24).” 이는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그 존귀하심 야훼 하나님 여호와를 대신하여, ‘아도니야’라 하여 ‘주’, ‘주님’이라 칭하며, 여호와는 나의 주시라, 고백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시 35:23).” 고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하나님이란 칭호는 직분적인 의미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의 호칭이다. 고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막 12:27).” 우리는 죽음으로써 영원하고 거룩하신 여호와의 성산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에 오늘 본문은 우리 성도들로의 마땅함에 대하여 일깨우신다. 이를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분명히 하신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15-16).”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하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모든 것이 그러하다. 물론 흔들림 없이 항해하는 배는 있을 수 없듯이 인생을 사는 동안 흔들리지 않고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믿는 자로 산다고 해서 모두 이룬 게 아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소망과 환난과 기도’라는 성도의 3원칙의 구조로 깨닫게 하신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긴다는 일이 세상의 출렁거림으로 일렁일 수밖에 없는 일이겠으나.
우선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분명한 것을 알게 한다. 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그 은혜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은혜로써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복음의 기본을 말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모두에게 동일하나 누구에겐 부끄러움이다. 구원이 거저 주시는 것이라는 게 부끄럽고, 자신이 구원 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는 게 부끄럽고, 그 구원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데 부끄럽고, 예수께서 이를 위해 죽어주셨다는 게 부끄럽다.
한데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우리가 이뤄 취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자 그럼 우리의 마땅함에 대하여 살펴보자.
1. 자기 분수에 맞게 생각하자.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는 늘 그럴 수 없어 고달픈 우리에게 더하시는 말씀이다. 왜 자꾸 견주나? 남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누구처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럼 오늘 우리에게 두신 일이 작은 일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셨거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민 16:9-10).”
아이 하나를 돌보는 일이 수천수만의 신도 수를 자랑하는 교회의 목회보다 못한가? 병들어 운신을 못하는 자로 사는 게 낙오인가? 하면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에 대하여 예수님의 비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눅 16:20).” 그가 한 일이 무언가? 어떤 업적을 이루고 무슨 위대한 일을 꿈꾸었는가? 저는 다만 주신 이의 뜻을 다하여 살았다. 살아서 주를 바라였다. 그 이름의 뜻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붙들고, 견디고 또 견디는 게 저의 사명이었다.
성경은 우리의 지나침에 대해 엄히 경고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여기서 지나치다는 것은 스스로 정한 기준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대신하려 드는 것이다. 그 기저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성경의 가르침은 엄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2. 하나님은 저마다에게 합당한 은사와 직분을 주셨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18-20).” 결국 내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신 바 그 생을 다하는 날까지 얼마나 주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무던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어느 무드장이가 있었다. 저는 가난하였고 늘 쪼들리는 형편이었다. 열 명의 자녀를 두었고 날마다 성실히 일하였다. 어느 날, 인근의 수도원에서 십년을 면벽 수행을 마친 이가 나름의 영성이 충만하여 마을로 내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낡은 샌들을 수선하기 위해 가난한 무드장이의 공방에 들렀다. 공간은 허름하고 협소하였고 한눈에 봐도 비루한 처지인 걸 알 수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던 수도사가 혀를 끌끌 차며 저를 나무랐다. 어찌 이 어려운 처지에 자녀를 열씩이나 두었는가, 하는 거였다. 그러자 무드장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걸 왜 저에게 물으십니까? 주신 이를 저보다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수도사는 도망치듯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 주신 바 그 일상에 성심을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마땅히’다.
3.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4-5).”
길은 같으나 서로의 역할이 다르고, 방향은 하나이나 그 쓰임은 여럿이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손은 손의 일을 하고 발은 발의 일을 하고 입은 입의 일을 하며 눈은 눈의 역할을 한다. 그럼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의 다양한 은사를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6-8).” 그런데 장로가 목사를, 목사가 어느 집사를 주관하려 든다면! 그런 경우 십중팔구 이는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온전히 하지 못할 때 남의 일을 간섭하게 돼 있다. 정작 자기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다른 이의 연약함을 동정할 줄 안다.
중국의 어느 학자가 있었다. 저는 덕망이 높아 많은 이의 스승으로 칭송을 받았다. 한데 그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품행이 엇대고 학식이 모자랐다. 하루는 그의 식탁에서 그의 처가 투정을 하듯 아들 교육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러자 학자는 말하였다. 제 아비가 사는 모습을 보고도 배우는 게 없다면 더 무얼 가르치겠소! 곧 하나님은 우리를 획일적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는 다만 서로를 돌볼 뿐이다.
곧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25-26).” 그러려면 그 중심이 분명해야 하는데,‘먼저’와 ‘나중’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 성경은 이를 일갈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 ‘저 아이’를 대하고 ‘저 한 사람’을 위하는 일이 우리의 선의로 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하는 일이다. 이에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저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저를 내 곁에 두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고 그 사랑으로 대하는 일이다. 곧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저 아이’의 몰상식과 그 아이엄마의 몰염치와 저들의 몰지각함을 이내 주의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것도 주신 바 그 은사에 따라서 하면 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안 되는 걸 억지로 할 수는 없겠으나, 안 되니까 더욱 주의 나라를 바라고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일이다. 결코 우리는 남을 위해 살지 못한다. 은혜는 오롯이 하나님만의 것이고,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인생은 오롯이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은사다. 살아 있는 동안 살아서 산 자의 하나님과의 관계다.
4. 인생은 결코 연극이 아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9-11).”
고대 연극에서는 가면을 썼다. 그 가면을 ‘페르소나’라 한다. 심리학에서 이를 가져다 남을 의식하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두 모습을 그리 표현한다. 결국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소위 말해 ‘빈말’이라는 말도 적당히 필요한 것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위로를 하고 친절을 행사하는 데 있어, ‘빈말이라도’ 감사를 표하고 걱정을 보태며 위로를 더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정직을 운운하는 일은 어리석다. 서로에 대한 예의란 그런 것이다. 한데 이게 또 지나쳐 마치 남의 인생을 대신 살듯 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 본문은 이에 우리의 마땅한 지침을 일깨운다. 첫째,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한다. 둘째, 서로 우애하고 존경해야 한다. 셋째,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넷째, 열심을 품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주를 섬기는 일로서 비롯되고 그리 준행하는 일이다. 사람에게 하듯 하면 위선을 떨 수밖에 없다. 빈말이 늘고 거짓된 위선이 주를 이룬다. 그럼 어찌 악한 세상에서 악을 미워할까? 그러자면 세상을 등지고 사는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우린 더욱 주를 바라는 것이다.
곧 악을 미워하는 일도 주를 섬기는 마음에서다. 선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공동체에 속하고 누구와 같이 뜻을 도모하는 일이 아니다.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는 이유도 가족이니까, 한 핏줄이니까,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왜 저런 사람을 마주대해야 하나? 이런 일을 해야 하나? 우리의 열심이 주를 섬기는 일이어서 그렇다. 고로 악을 미워하는 일도, 선에 속하는 일도 모두 주를 섬기는 일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그러므로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 119:104).”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이에 필수적인 것으로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암 5:15).”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는 기도가 성립된다.
5. 성도의 마땅함을 위한 트라이앵글: 소망, 환난, 기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2-13).”
어쩌면 성도로 사는 일은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일보다 괴롭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유독 우리들만 주의하고 또 조심하는 게 성도다. 그러자니 우리 안에 이는 회의와 갈등은 남들 보기에 어줍다. ‘뭘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하는 마음도 든다. 그러니 아예 세상을 등지고 살 수도 없고, 이에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다시 말해 우리의 기쁨과 평강은 우리가 마련한 보험이 아니다. 젊어서 열심히 모은 안락함이 아니다. ‘믿음 안에서 충만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다. 곧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곧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우리는 누구도 이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없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나오는 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는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말씀에 대한 소망이다.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이다. 우리의 믿음은 소망을 붙들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곧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어떤 어려움이나 난처한 상황들이 실은 우리의 인내를 만드는 것이었으니 무엇에 대한 인내인가?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 2:19).”
여기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뭘 꼭 그렇게까지 참고 견딜 필요가 있겠나?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우리의 소망은 주께 있다. 이 땅이 아니다. 사람에게 두는 게 아니다. 저들은 결코 우리의 소망이 아니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 55:16-17).”
고로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이것으로 우리는 환난을 이겨낸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후 1:18).” 곧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그리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오나?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결국 우리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데, 그 믿음은 소망을 품을 때 힘을 얻는다. 그 힘의 원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그 사랑을 ‘마땅히’ 여긴다. 하면 우리는 어찌 하나님을 사랑할까? 기도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기도도 연마다. 사랑도 무던히 더해지는 마음인 것이라면, 주께 바라고 구하는 기도는 그만큼 주께 향한 나의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그리고 성도로 살아가는 데 있어, 서로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이다. 곧 우리 성도들의 마땅함의 3원칙은 ‘소망과 환난과 기도’다. 우리의 환난이 기도하게 하고, 기도를 하는 것으로 소망은 더해진다. 소망을 가졌으면 환난도 이겨낼 수 있는데 그러기까지 우리는 기도를 쉬지 않는다. 기도는 주를 바라는 마음이고, 주를 사랑하는 표현이다. 기도와 소망과 환난은 어느 것이 먼저이든 항상 나란히 같이 간다.
그러므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이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곧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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