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7 주일
로마서 12:14-21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들어가는 말
성경은 늘 우리의 상식을 비껴간다. 우리가 바라고 그리 여기는 것에 대해 제동을 건다. 어쩔 땐 사람으로 살면서 할 수 없는 일만 시키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이에 그 대표적인 성경을 예로 들자면 나는 마태복음 5장에 이르시는 산상수훈의 말씀 가운데서 팔복의 말씀을 들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심령이 가난할 수 없다. 더 나은 걸 바라고, 애통해하기보다 즐겁고 행복하기를 추구한다. 온유하면 무력한 자로 여기는 세상에서 오히려 강단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거 같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산다는 일은 낭만적인 생각으로밖에 실현 가능할 거 같지가 않다.
내가 누굴 긍휼히 여기면 꼭 저는 우리를 함부로 대하기 일쑤고, 마음이 청결한 자로 사는 일은 위선을 떨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굴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살려하면 저들은 갑질을 하듯 함부로 우리의 친절과 양보를 권리인 양 요구한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 그래봐야 나만 우스운 꼴이어서 광신자로 낙인이 찍히거나 그만큼 무능한 인간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가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나를 거슬러 악한 말을 할 때는 내가 지레 속이 볶여서 살 수가 없다.
이를 어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을까? 하늘의 상은 멀고 땅의 고달픔은 지척이어서 빛과 소금으로 살라는 말씀을 우리가 어찌 준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려면 철저한 위선자로 자기만족에 겨워 살거나, 아예 세상을 등지고 어디 수도원을 꾸려 살거나, 뜻 맞는 사람들끼리만 모여 살지 않는 이상 우리의 죄성으로는 도저히 그리 살 수 없음을 고백하게 하시려고, 주밖에 그리 완전한 자는 없음을 바로 알게 하시려고, 오늘 말씀은 우리를 굴복시키신다. 그 목적은 우리가 그리 살 수 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죽었다 깨어나도 주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두 손 들게 하신다.
축복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 달리 가져오면 오늘 주어진 우리의 어려움을 한탄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 수고와 애씀으로 오히려 감사하라는 소리다. 감사하고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런 논리를 가지고 어찌 세상을 이해하고 맞서 당당히 설 수 있을까?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2-13).”
그러니까 말이다. 억울할 따름이다. 사람이 싫다. ‘저런 아이를, 저런 사람을 나는 싫어한다.’고 말하면 그게 또 나라. 나 자신도 그러해서 다르지 않다는 데 좌절한다. 그러므로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 5:15).” 그러니 그게 어떻게 우리 의지대로 되는가 말이다. 보복까지는 아니어도 외면하는 게 당연하고, 저주까지는 아니어도 저가 망하면 그럴 줄 알았다는 정도는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두지 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출 23:5).” 오히려 그리하라신다. 외면하지 말고 또 내버려두지 말고 같이 도와주라고 하신다. 한술 더 떠서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 6:27).” 어떻게 나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하시는가? 그럴 수 없음을 아시면서도 그리 말씀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3).” 주의 마음이 나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면 된다. 그저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함께 울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 이처럼 함께 웃고 함께 울라는 말씀에서 문득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그냥 그러라는 말씀이 아니라, 힘쓰라고 하시니 난감하다. 힘쓴다는 건 안 되는 걸 되게 하려는 노력을 내포한다. 하기 싫은데,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리 하는 수고를 일깨우신다. 때론 우리의 무모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즉 그 좁은 문, 좁은 길은 서로 너무 잘 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안다. 또 저러는 게 어떤 꿍꿍이가 있어서이다. 저의 혐오스러움과 뻔뻔함을 잘 아는데 어떻게 저와 함께 울고 저와 함께 웃으라고 하시는가?
그랬던 그를 두고 함께 하였던 다윗은 시를 지었다.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시 35:13-14).” 저를 박해하고 멀리하였던 형제와 부모는 물론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몰골의 사람들이 저의 품으로 깃들었다. 그리하여 저들을 위한 기도가 우리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아, 어렵다. 성경이 어려운 까닭은 내가 내 의지로는 그리 살 수 없어서 어렵다. 말씀은 우리의 어떤 경건보다, 종교적인 모습보다 그리 저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그것으로 나는 할 수 없어서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저를 미워하고 비난하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없어서 말이다.
선한 일을 도모하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6-17).” 오늘 말씀은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 그 선을 도모하는 데 있어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것. 둘째는 높은 데 마음을 두기보다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는 것. 셋째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는 것. 넷째는 우리가 나서서 악을 갚지 말라는 것.
첫째,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17).”
우리 공동의 적은 마귀다. 사람이 아니다. 저도 어쩔 수 없어서 저리 매정한 것이다. 자신들도 상냥하고 친절하고 싶은데, 저도 그럴 수가 없어서 아이만 보면 참견하고 꾸짖고 간섭하려 드는 것이다. 인정하고 용서하고 기다려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저를 보면서 우리 안에 드는 판단이나 비난도 실은 마귀로 인한 것이다. 아버지 집을 떠나 탕자로 살았던 작은 아들이나 아버지 집에 머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큰 아들이나, 여기서는 오히려 종교적으로 더 낫다고 여기는 큰 아들 같은 우리의 마음이 더 큰 문제이다.
둘째는 높은 데 마음을 두기보다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
살면서 꿈이 없는 자를 우리는 무기력한 자 또는 무능자로 취급한다. 우리의 꿈이란 대체로 높은 데 마음을 두는 일인데, 그래서 요즘은 그 한 분야에 성공한 사람을 영웅처럼 여겨 삶의 멘토로 삼고 그의 살아온 삶을 본으로 삼으려 한다. 강연이 줄을 잇고 사람들은 몰두하여 저처럼 성공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를 악이라고 본다. 저는 우리가 따를 자가 아니다. 선은 무엇인가? 하나님 한 분이시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살다 가신 예수님 외에는 선한 분은 없다. 그럼 이 땅의 조명으로 예수의 삶은 어떠하신가? 망상에 빠진 젊은이의 부질없는 해프닝 같은 삶 아닌가?
바로 그 낮은 데 처하라는 말씀은 무얼까? 예수님의 관심은 우리의 구원이셨다. 영원한 주의 본향에서 하나님과 같이 영생을 누리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기 예수는 왕궁에서 나셨을 것이고,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당대의 악함과 맞서 싸우셨어야 한다. 그렇듯 무력하게 죽으시면 안 되는 일이었다. 병든 자와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시면 안 되었다. 한데 왜 그러셨을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셋째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욥 28:12, 20).”
마치 우리는 이 땅에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에 지혜를 두는 것 같다. 한데 앞서도 말하였듯이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보다 오히려 종교적이고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자의 문제가 더 고질적이다. 오늘 본문은 일깨우신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마라. 선을 도모하고 경건을 추구한다고 하여 지혜로운 자가 아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그 지혜는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미 6:9).”
넷째는 스스로 악을 갚지 말라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믿음의 관건은 기다림이다. 나서서 무얼 도모하는 일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들 주의 일을 운운하고 하나님의 뜻을 들어 자기의 일을 추진하곤 한다. 그리 생겨난 마음을 마치 하나님이 주신 마음인 것처럼 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는 그 바탕에 스스로 악을 갚으려 하는 망극 된 자기 확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설교처럼 살 수 있는 목사는 없고, 거룩을 도모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되는 성자도 없다. 되레 저들은 묵묵히 주신 날을 준행하는 것뿐이다. 기쁘면 찬송하고 슬프면 기도하면서 말이다.
더불어 화목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8).” 앞에 ‘할 수 있거든’이 붙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성경은 아신다.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살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기란 어렵다. 서로의 가치와 기준도 다르고 각자가 가지고 뛰는 목표도 다르다. 성경은 이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 그럴 수 없는 일임을 성경은 분명히 하신다. 그럼에도 화목하는 것은 혹시나 저를 돌이켜 주께 나아오게 할 수 있을까함인데 그러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우리는 주님의 멍에를 메야 한다. 주께 배워야 한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저를 보고 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대하고 되도 않는 말을 또 하고 또 하면서 늘 번번이 좌절하기 일쑤인데도 불구하고 다시 또 그 일을 되풀이하는 까닭은 지금 현재 저를 우리 곁에 두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줄 우리는 신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안 믿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는 것을 더불어 화목하는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저를 위해 죽을지언정 저의 일을 함께 도모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불의는 돌이켜도 불의다. 이를 알면서도 사랑을 운운하며 화합을 도모하는 일은 모두 정치적인 꿍꿍이가 있어서이다. 자기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지 이를 두고 주의 뜻을 운운하며 선을 이룬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린 다만 주의 멍에를 메고 주를 따르며 주께 배우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셨지 죄를 허용하신 게 아니다.
애써 수고하여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4-15).” 그래서 우리의 무기는 감사와 사랑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저들과 더불어 화목하는 까닭은 거룩을 위함이고 화평함을 따르는 길이며 주를 보는 자리이다.
내가 갚으리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9).” 주께서 하시게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이 필요하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시 94:1).” 우리의 원통함과 분함을 우리가 나서서 해결하려 할 때 주의 선하심은 가려지고 우리의 의와 기대만이 기준이 되어 돌아보면 모든 게 억울하다. 그저 원통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 35:4).” 어떻게든 하려 할 때 이를 오히려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 있었다. 주님은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59:18).” 왜냐하면 우리는 주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하는 걸 우리보다 주님이 더 못 참으실 일들이 많다.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0-21).”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무엇보다 불씨가 소중했다. 숯불을 그의 머리에 둔다는 것은 저들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저들은 우리를 어찌 대하든지 우리는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이는 받은 자로서의 의무다. 하여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잠 25:21).”
그러니 이게 어디 쉽나? 못하니까, 우리는 또한 저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4-45).” 그리하여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살전 5:15).”
나오는 말
우리는 전 주일에 이어 마땅히 생각할 것에 대하여,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다. 우리로 이 마땅함을 이루어가게 하시기 위해 우리로 환난 가운데 처하게 하신다. 이를 통해 기도하게 하신다. 기도함으로 소망을 붙들게 하신다. 우리는 종종 욱, 하여 우리가 어찌 감당하려 들지만 이는 자꾸 누구를 해하게 될 뿐이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 18:10-11).”
그래서 우리에게 ‘그 이름’을 주셨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곧 우리는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받으면 좌절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로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이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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