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로마서 14:1-12 /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전봉석 2018. 10. 25. 13:40

20181028 주일



로마서 14:1-12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14: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14: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4: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반드시, 어느 훗날 주 앞에 서서 자기의 일을 직고해야 한다. 신학자 프란시스 쉐퍼는 그래서 우리 목에는 안 보이는 녹음기가 달려있다고 했다. 이는 평생 남을 비판하였던 그 말들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궁싯거렸던 말들이 녹음된 녹취록을 틀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안 믿는 자들은 안 믿는 고로 자신들의 말로 심판을 받을 것이고, 믿는 자들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음으로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럼 우리의 비판은?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살아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성도이면서도 성도답지 못하게 시달리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모두 구원의 방주를 탔다. 그런데 누구는 영원한 본향의 항구에 도착하기까지 내내 폭풍에 시달리고 멀미로 고생하고 그 고달픔에 신음하는 꼴이 안 믿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에 성도의 비결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곧 우리가 이해하고 배려하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채워주실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에 따른 우리의 그릇된 자세를 일깨우신다. 곧 1절에서부터 5절까지의 말씀은 그러므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각 구절마다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6절부터 9절까지는 우리가 ‘구별된 자들’임을 상기시킨다. 마지막으로 12절까지의 말씀은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우리는 모두 주 앞에 설 것이고 이때 ‘모두가 자기의 일을 하나님 앞에 직고할 것’이라는 걸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1. 비판하지 말라(1-5)


오늘 본문은 단도직입적으로 믿음이 있다면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저들을 받는다는 그 명확한 대답은 다음 장인 15장 1절에 다시 나온다. 즉 우리가 저들을 담당하는 게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5:1).” 결코 우리의 선행이나 의로움을 부추기는 게 아니다. 저마다 갖는 자부심이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결국 믿는다고 하면서 나름 자부심을 갖고 의로 여기며 추진하였던 그 모든 증언들이 주 앞에서는 다만 부끄럽고 송구할 따름이다. 그래서 기억조차 못한다. 선을 행한다고 여기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게 결코 아니다.


그런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경우는,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막 13:26-27).” 곧 얼마나 우리는 자주 종교적인 삶에 스스로 젖곤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어떤 당위성에 쫓기듯 목사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니까, 티내고 생색내고 마치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는 것을 떠벌리듯 하는 모든 의는 옳지 않다.


오히려 우린 송구할 따름이다. 하는 것도 없이, 너무 보잘것없어 민망해한다.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실제 본인도 잘 모르게 한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하는 일이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눅 9:41).” 누구를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생각해서 동정하는 정도를 그리 선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그 속에 모시기를 싫어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훨씬 더 의롭고 선할 수 있다. 우리의 의롭고 선함으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다. 다만 천국에서 큰 자가 의롭고 선하다.


1) 약한 자를 용납하는 용기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1).”


좀 더 구체적으로 그럼 우린 어찌 해야 할까? 믿음이 약한 자를 주의 마음으로 위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이것이 성장하는 믿음의 기본적인 사역이다. 교회를 오래 다녔으면서도 누구의 약점을 담당하고 있지 않다면 한 번쯤 심각하게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곧 이것으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곧 우리 곁에 두시는, 저 아이, 저 사람, 저 지경의 난처한 사람들, 믿음이 약한 이들로 인하여 내가 도리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이룬다. 이를 힘써 지켜야 한다. 곧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때론 답답하고 가소롭다. 심지어 한심하고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주의 사랑을 더해야 한다. 그 사랑은 ‘바로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신 그 사랑이다.


2) 신앙의 배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2).”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신앙의 첫 걸음은 배려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믿음이 연약하여 채소만 먹는다.’ 이를 마치 신앙의 정도로 여겨 누군 으스대고 누군 주눅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 목사는 고상하고 여느 신자는 그만하지 못한 자로 여겨질 때도 있다. 누군 부러워하고 누군 과시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 먹는 자나 못 먹는 자나, 그렇지 못한 이를 담당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기본 사역이다.


이에 예수님은 엄중히 가르치셨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막 9:42).” 그러니 함부로 굴지 말자. 내가 옳은 게 아니다. 누구를 선입견으로 대하지 말자. 저가 나보다 못한 게 아니다. 뭐라 판단하지 말자. 그 판단이 나를 판단할 것이다. 세상은 늘 남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게 관대하다. 그래서 싸움은 그칠 줄 모른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


3) 종교적 행위가 기준이 아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3).”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두 형제 이야기는 단지 탕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다(11-32). 오히려 더 큰 문제는 늘 집안에 있으면서도 정작 아버지의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큰 아들의 경우였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28).” 저는 나름 한다고 했다. 결코 불순종한 동생과는 다르다. 그리 여기는 한 저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면서도,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경우이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이는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실제 보면 저들은 늘 교회에서도 말썽이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요 9:16).” 모든 불평과 갈등은 나름 열심을 다하는 자들에게서 나왔다.


4) 너는 누구냐?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4).”


누가 누굴 능멸할까? 여전히 교회를 다니면서도 술이니 담배니, 동성애니 이성애니, 성경의 오류가 어떠니 교리가 어떠니 하고 논하는 자들의 경우 대부분은 저들의 열심이 저들을 단호하게 한다. 그리하여 저들의 신념은 투철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이를 믿음의 행위로 삼는다. 한데 말씀의 키워드는 ‘오래 참으라’는 것이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저들 특징은 먼저 권계를 잘한다. 권계란 잘못을 지적하고, 이르고, 주의를 주는 일이다. 그런 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요즘 세대들을’ 나무란다. 격려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이다. 좋게는 서로 보듬고 용기를 더해주는 일이지만, 나쁘게는 참견하고 꾸짖고 수시로 간섭하는 일의 다른 표현이 되었다. 이 일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는 ‘오래 참아야 한다.’ 살다 보면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 저를 붙들어주려면 먼저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그러므로 우리는 알되 더욱 열심을 다해 주를 알아야 한다. 그 뜻을 바라야 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러기 위해 마태복음 5장에 말씀하신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5) 성도의 하루하루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5).”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유익하다. 기쁜 날 뿐 아니라 슬픈 날도, 형통한 날 뿐 아니라 자주 꼬이고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는 날에도,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다시 말해 우리의 종교심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우리의 온유함이 우리의 지경을 넓힌다. 심령이 가난하면 그 마음이 천국이다. 남을 위해 우리는 애통해한다. 그 위로가 사는 날 동안 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곧 ‘어떤 날’이 우리를 은혜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인해 ‘어떤 날이어도’ 주 앞에서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 바라고 구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만 주의 은혜가 아니라, 나의 기도와는 다르게 현실이 펼쳐진다 해도 이 또한 주의 응답이고 은혜이다. 기본 명제는 단언컨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4).” 이와 같은 대명제 아래 우리의 평생은 보장되었다.


나를 죽이신다 해도 주는 선하십니다, 하는 욥의 고백처럼.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실 지라도 주는 선하십니다, 하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고백처럼, 나의 생명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귀합니다, 하는 다윗의 고백처럼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2. 우리는 구별된 자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6-9).”


이로써 우리는 구별된 자로 산다. 세상의 기준이 우리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 어떤 사역을 중히 여기는 것은 주를 위해서이다. 먹고 사는 일도 주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제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값을 주고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자녀다. 존귀한 존재이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에 우리의 즐거움은 이제 다르다. 세상의 기준이 그 값을 매길 수 없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 58:2).” 이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곧 오늘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다. 왜냐하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6:19-20).” 이 영광스런 말씀 앞에 송구하고 부끄러우나 주께 영광을 올릴 수 있는 자는 복되다. 똥 싸고 온 아이의 똥꼬를 닦아주는 일이, 싫증나고 역겨운 사람을 주의 마음으로 참고 마주대하는 일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0:31).”


그리하여 우리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


3.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0-12).”


우리도 어느 가까운 훗날 주 앞에 설 것이다. 내가 누굴 업신여겼던가? 그것으로 온전히 감사하지 못했던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내가 누굴 비판하였던가? 그것 때문에 살면서 사는 날 동안 아등바등 고생스러워 했던 수고의 날들이 부끄러울 것이다. 이내 우리는 모두 주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 앞에서 자백해야 한다. 마땅히 우리도 저들처럼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일이지만,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 1:14).”


곧 우리의 담대함은 주의 보혈의 피 값으로 이미 지불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한술 더 떠서 우리는 이제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그러므로 세상이 어쩔 것인가? 고작 죽이기밖에 더하겠나? 본디 영원한 것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참 지혜였다.



나오는 말


오늘 우리의 비판은 그 비판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의 헤아리지 못하는 그 헤아림의 정도에서 나는 헤아림을 받는 것이다. 늘 야박하고 속상한가? 수고하고 애쓰는데 비해 너무 어렵기만 한가? 그렇다면 자기 목구멍에 걸린 비판의 소리를 다시 들어보라. 누구를 판단하고 헤아리지 못하는 말들을 다시 틀어보자. 우리의 비판하는 그 비판이 성도인 우리 생활을 여전히 팍팍하게 한다. 어쩔 땐 예수를 그 마음에 모시기 싫어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사는 게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결국 자신의 고달픔은 그런 이유였다. 우리의 고난이 우리의 헤아림의 정도 때문이라면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기껏 구원의 방주를 타고도 왜 그처럼 고통으로 일그러져 사는가?


그 고통은 하나님의 신호다.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큰 소리로 우리를 외쳐 부르시는 소리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결국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그러므로 우린 비판하지 말자. 저들을 헤아리자. 우리가 받은 헤아림으로 저들을 위해 기도하자. 우리 안엔 주의 사랑이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이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