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전봉석 2018. 11. 13. 07:1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편 38:15

 

 

시어(詩語)는 문법적인 구속을 받지 않는다. 사전적인 의미를 따르지 않는다. 언어이지만 일반 언어의 틀을 넘어서는 허용이 가능하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우리의 이성적인 논리 언어로는 감당이 안 되는 허용의 체계이다. 시편을 묵상할 때 그와 같은 자유로운 세계는 여실히 드러난다. 가령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시 114:3-4).”

 

애굽에서 나올 때, 산과 언덕이 뛰어놀았다. 걸어서 홍해를 건너고 요단을 건널 때 바다가 도망가고 물러났으며 산들이 뛰놀고 뛰었다. 우리가 애굽살이를 할 때, 천지는 몸살을 앓고 그 괴로움을 탄식하였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2-23).”

 

말씀은 우리의 기도를 시어로 바꾸어 그 자유함을 보장한다. 성경의 언어는 시어를 포괄한다. 우리를 이끌어 맛보아 알지 못하는 세계를 맞이하게 하신다. 모든 자연이 신음하고 있는 때에 나의 영혼은 잠깐씩 그 맛을 느낀다. 아이가 아침에 오면 먼저 일기를 쓴다. 전날에 있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한동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설명에만 치중하다 어느 순간부터 어휘는 묘사와 진술을 가지기 시작했다. 묘사와 진술은 시어에 가깝다.

 

성경 언어와 기도 언어다. 아이의 일기를 같이 읽고 아이가 기도를 하고 성경을 묵상한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지나 시편을 읽고 있다. 사실적인 서술을 지나 창조의 언어인 시어를 묵상하는 일이다. 실은 아이의 글이 난해할 정도로 이해가 어려울 때가 있다. 어떤 느낌인지,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한참을 읽어도 잘 알지 못하겠다. 그러니 그의 기도는 간절함과 정직함을 빼면 우왕좌왕하다. 무엇을 아뢰고 구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아이 옆에서 가만히 숨을 고르고 듣는다. 읽고 듣는 행위야 말로 성경 언어와 기도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여백이다.

 

때론 두렵고 떨린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7-8).” 여기서 떪은 경외다. 경배다. 쉽게 말하면 낯설고 모르는 것 앞에서는 두려움이 가장 앞서는 감정이다. 이때의 두려움은 어떤 억압에 의한 게 아니라 새로움에 대한 환희에 가깝다. 그럴 때 이어지는 마음은 간절함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때론 이성의 세계를 초월하는 세계다. 분명히 더 어렵고 괴롭고 피곤하고 고통스러울 따름인데 그 안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니라.’ 하는 단순명료한 진리가 담겨진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없었던 게 있고 있었던 게 더욱 풍성해지는 세계다. 거기엔 혼돈과 흑암이 있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그것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것으로도 선을 이루신다. 모든 게 합력하는 세계다.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세계다. 그러할 때 우리는 기다린다. 읽고 듣는 시간이다. 고대하고 바라는 때에,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나는 아침마다 아이가 오는 게 힘들면서 유익하다.

 

점심을 먹고 아이가 돌아가면 무슨 대단한 일을 치른 사람처럼 녹초가 되면서도 때론 아이의 글을 읽다가, 때로는 아이의 기도를 듣다가 울컥, 하면서 이는 환희를 나는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가슴이 뭉클한 것 같다가도 어떤 부끄러움인 것도 같다가 안타까움인지 답답함인지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가 그런 가운데서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아이의 간절함이어서, 그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20).”

 

멀쩡하다고 여기는 이들과 달리 아이의 언어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은 굴복함이라 경이롭다. 나의 느낌은 과장되고 너무 감정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경탄하지 않는 영혼이 어찌 하나님과 상관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만드셨다. 심지어 우리의 혼탁한 감정과 느낌과 그 뜻 모를 깊이의 언어까지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고 시어를 사랑하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시를 잘 모른다. 시집을 한 권 읽는 게 여느 산문을 여러 권 읽는 일보다 피로하다. 한 장의 시를 놓고는 몇 날 며칠 같은 맥락을 짚어가느라 제자리걸음일 때도 많다. 가령 시편 23편이나 1편의 성경은 내가 어릴 때 암송하였던 것으로 누구라도 사랑하고 널리 알려진 유명한 시어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가장 친밀하나 가장 위협적인 경고의 말씀이다.

 

죽음의 골짜기를 가는 게 인생이다. 내게 부족함이 없는 목자와 함께 가는 길이면서 저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아니면 번번이 샛길로 접어들고 엉뚱한 데서 지체하기 일쑤다. 그럴 때 등짝에 날아오는 막대기는 중의적이다. 고통이면서 사랑이다. 괴로움이면서 천만다행한 것이다.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라는 건 들을 때마다 황홀하고 행복하다. 그런데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음으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오직’ 성경을 즐거워한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못할 때 바람에 나는 겨나 시냇가에 심겨진 나뭇가지나 요동하기는 매한가지다. 죽겠다. 뭐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저나 나나 똑같이 지랄이라. 죽을 것처럼 힘들다. 오히려 믿는다고 믿는 우리의 얄팍한 믿음 때문에 더 큰 소외와 공허가 밀려들기도 한다. 차라리 겨는 바람에 날려 자유롭게 날아가 버리기라도 하지, 이건 뿌리에 붙들린 나무나 그 줄기에 붙어 요동하는 가지나 오히려 더 죽을 맛이다.

 

그럼에도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우리의 결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1:5).” 그럴 수 있는 특권이 시어(詩語)다. 성경 언어이고 기도 언어이다. 나는 아이보다 간절하게 글을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고작 바로 전날의 일을 떠올리며 그 사건과 상황을, 감정과 묘사를 끌어내는 데 있어 진을 뺀다.

 

또한 나는 아이의 기도보다 간절한 바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나 역시 늘 꿍꿍이가 있어서 무얼 바라고 구할 때 마치 그래 주어야 하는 상대에게 그래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처럼 무례하기 짝이 없는데, 아이는 그저 송구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자간과 행간이 서로 엉겨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종종 까먹어 버리는 간구지만, 그래도 주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바란다. 다만 우리는 주의 영이 운행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9).” 나를 창조하시고 조성하시며 주인이신 이가 언제든 깨뜨리고 부수실 수도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그 앞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은 우선 떪이다. 우리가 떠는 것은 경배와 영광이다.

 

그 안에서 간절하여진다. 기다림은 신뢰함으로 이어진다. 내가 아이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은 그러해서다. 내가 무얼 가르치고 훈계하여 붙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선한 마음을 두신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리하시는 동안 바람이 불고 폭우에 휩쓸려 당장 끝장이 날 것처럼 괴롭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

 

아이의 병명이 거론되면서 또 사건 사고가 터졌다. 그럴 때면 덩달아 마음을 졸인다. 행여 아이가 자기 병명으로 사회가 인식하는 것을 느낄까봐. 또는 그 엄마가 애태우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점점 더 우울과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까봐.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38:15).” 나는 다만 주께 바랄 뿐이다. 응답은 주의 것이라. 아무리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안도한다. 하나님이 이르셨다. 나누셨다.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물과 물을 나누어 하늘과 땅을 두셨다.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그대로 되어 보시기에 좋았다. 이루게 하라. 비추라. 그대로 되니라. 만드시고 비추게 하시며 나뉘게 하셨다. 번성하게 하라. 날으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충만하라. 번성하라. 그대로 되니라. 그 종류대로, 그 종류대로,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성경의 언어는 시어의 세계 그 이상의 말 밖의 말의 세계이다. 말로써 어찌 형용할 수 없는, 그러나 엄연한 말의 세계다. 하나님은 스스로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오늘 우리를 여기에 두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그대로 되니라.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하나님의 세계다. 감히 내가 아는 말로 말 안에 둘 수 있는 이성의 언어로 세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런 주 앞에서 나는 자유로이 소통한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아이의 말이 횡설수설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무논리의 언어 세계로 체계 밖의 말들 같지만, 그래서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14).” 그리하여 할 수 있는 게 하나뿐이어서 오히려 선명한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15).”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심이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아이의 주절주절 뭔 소린지 모를 일기를 읽으며, 저의 기도를 들으며 주께 감사와 영광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혼란 위에 운행하신다.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시 38:17-18).”

 

주께 아뢰고 고할 수 있는 언어는 시적 허용 그 이상의 자유함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경계하고 어떻다 해도, 심지어 “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으며 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19-20).” 그러할 때 고할 수 있는 언어여서,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21).” 나는 마음껏 바란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