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전봉석 2018. 11. 14. 07:28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세기 2:1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시편 39:5

 

 

 

기필코 다 이루어질 것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 말씀 앞에서 더욱 확신한다. 일생을 사는 것이고 사는 날 동안 주가 이루시는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시 39:5).”

 

오십 줄을 훌쩍 넘긴 동기들이 날짜를 정하고 서로 만나기로 하면서 활기차다. 예전에 찍었던 사진들을 올리고 누가 어찌 지내는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리움에 젖어 서로를 찾는 것이었는데. 젊을 땐 밖에서 찾고 나이가 들면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어서. 끼어들 자리가 없어진 사람처럼 나는 ‘눈팅’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폴 투르니에의 <노년의 의미>를 주문했다. 늙음도 공부가 필요하다.

 

다 이루어질 것인데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 안식! 누구나 여가를 필요로 하고 쉼을 바라지만 정작 이어지는 여가는 난감할 수 있다. 자칫 퇴행이 이루어져 옛 사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들기 일쑤다. 또는 불안과 우울을 동반한 막연함이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3).” 안식의 연습이 매주 돌아오는 주일이겠다. 쉼이야말로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익숙하게 다루지 못할 때 늙음은 난처할 뿐이다. 내가 아는 누구는 곧 정년퇴직을 앞두고 책을 모은다. 직장생활에 쪼들려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퇴임하고 여유로울 때 읽겠다는 것이다. 그 생각이 갸륵하나 그게 과연 될까?

 

늘 규격화된 삶을 살았다. 집단생활을 하였고, 조직문화에 길들여져 있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사색을 즐기며 독서를 하겠다고 책장을 먼저 채우고 있으니. 왠지 씁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외롭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겠나? 혼자 진득하니 들어앉아 있는 게 익숙하지 않은데 책이 과연 손에 잡히겠나? 누구는 결국 월급이 반에 반 토막이 나고 전에 같으면 허드렛일이라 거들떠도 안 보던 일거리를 얻어서 임시 계약직으로 도로 출근을 한다. 평생 무언가에 길들여진 대로 사는 것이다.

 

나이 든다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서 누군 젊게 살려고 기를 쓰고 자신을 꾸며 멋을 부리고 청년 때처럼 살려고 하는데 이는 더욱 난감할 뿐이다. 더욱 볼썽사나울뿐더러 스스로 낙망함이 짙게 물든다. 고독하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표현들이 실은 안식의 본래 주인이 아닐까? 마치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기계처럼 살아왔으니 일이 멈출 때 순간 당황스러운 것이다.

 

대학 때 동기들이 단체 카톡방을 만들고 서로들 안부를 물으며 옛 얘기를 하고, 만날 날을 정하고 서로 들떠서 와글거리는 게시판의 글들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카톡 사진에 올라온 저들의 현재 모습과 내 기억 속의 모습과 저들을 지칭하던 이름과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아 난감하기도 하였다. 누구에게 나 역시 그럴 것이어서, 하얗게 흰머리가 성긴 나의 모습은 또 어떨 것인가? 늙어간다는 일은 참 쉼에 가까워지는 일인데 그것을 서글프게 여겨서야 어디!

 

비로소 바라던 안식에 익숙해지려면 늙음도 준비가 필요하다. 원론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대비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복되고 거룩한 것을 누리고 참여할 수 있는 내실을 다져야 하는 것이겠다.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3).” 그저 사느라 정신이 팔려 일에 쫓기듯 살던 사람이 곧 정년퇴임을 앞두고 책장부터 채워가는 꼴이라니! 과연 그때에 그 책이 여유롭게 읽히겠나?

 

우리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도 결국은 다 우리들을 위한 거였다. 안식에 들어간들, 그 안식이 불편하기만 하다면? 심심하고 무력하여 처음 취하게 되는 여가로 난감하기만 하다면? 이에 주일을 두셨다. 그럼에도 그날을 쪼개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늘어져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안식은 아무래도 익숙해지기 쉬운 게 아닌듯해 보인다. 먼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에 그 엄연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권세다. 부과된 일이 아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는 엄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이다. 그런데 자유를 누릴 수 없다면?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 2:19).” 저절로 늙었다고 그 늙음이 저절로 익숙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 너머의 세계도 같다. 평생을 준비하며 산다고 사는데 늘 보면 익숙하지는 않다.

 

은퇴는 후퇴가 아니다. 새로운 전진이다. 친구 누가 명퇴를 하고 어디 아파트 관리직원으로 일자리를 구해서 격일로 일을 하는가 보다. 벌써 우리 나이가 그럴 때가 됐다니. 자영업을 하는 친구는 그래서 바쁘고 아직 직장에 매여 있는 친구는 그래서 또 마음대로 어쩔 수 없고 그래서 만나는 날짜를 이 날로 했다가 저 날로 했다가. 나는 그러는 친구들의 대화 내용을 보며 새삼 우리가 중년이라는 사실에 놀라웠다. 곧 우리의 노년이 코앞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세계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우리로 경작하고 지키게 하신 날들이었다. 아침과 달리 이제 정오를 지나 오후께로 접어들면서 아침나절처럼 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때 생각하고 계획했던 것을 새삼 끌어다 할 수도 없다. 곧 날이 저물어 어두워질 것이다.

 

중3 소녀가 말했다. 저는 늙기 전에 일찍 죽을 거예요. 마치 장담하듯, 저는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한참 그 나이 땐 그럴 수 있다. 그와 같은 무모함이 사치스럽지도 않다. 빨리 어른이 되고는 싶지만 늙지는 않을 것이라는 비논리의 논리 앞에서 나는 뭐라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어디 중3 소녀와 다를 게 있던가? 종교적으로 열심인데 도덕적으로 해이하고, 도덕적으로 철저한데 종교적으로 문란한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어느 목사의 성추행 사건이 교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이슈로 떠오른 요즘 안팎이 같은 사람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지 새삼 느낀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 2:21).” 더욱이 남 앞에 서야 하는 사역은 두려울 따름이다. 내가 말한 말대로만 살아도 모자랄 판에 말 밖의 세상을 서성거리는 꼴이라니. 나 또한 다를 바 없을 거여서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저런 기사를 읽는다.

 

나 들으라고 하시는 소리다. 자칫 행여 방심하였다가는 난들 다를 게 있을까? 특히 남의 인생에 뿐 아니라 그 영혼을 두고 씨름하는 사역이라면, 그 일이 주의 일인데 밖으로만 드러나는 게 아니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내가 전한 말씀을 내가 갚으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처럼 글로 쓰는 표현의 반에 반만이라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

 

하루 중 내가 이 아침의 묵상 글 쓰는 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까닭은, 최소한 이 말들의 반에 반만이라도 돌아보고 지키고 주를 의지하며 사는 날이 되기를 바라서이다. 전날에 있었던 어떤 일, 사색, 만남, 생각 따위를 뒤져보며 내게 허락하신 날에서 주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일생에 사소한 순간은 없다. 어리면 어려서 중요하고 늙으면 늙어서 중요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그러므로 가장 잘 사는 방법은 생령을 느끼고 누리고 참여하는 바,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10).” 그런데 왜 자꾸 비루하게 종노릇하며 사는 것인지!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나는 이미 나의 삶 가운데 주께서 어찌 나를 인도하셨는가를 보았다. 안다. 하면 하나님 앞에서 왕 노릇 하여야 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5-6).” 알고 본 것을 전하여야 하는 게 내 일이었다.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을 위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저 아이들의 이런저런 난처한 상황에 대하여 주의 마음으로. 아내는 요즘 부쩍 한 아이를 두고 마음이 쓰여 안타까움으로 자주 주의 이름을 부른다.

 

언제부턴가 우린 잘나고 반듯하고 모자랄 것 없는 아이들보다 늘 치이고 도태되고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간다. 확연히 달라진 마음이다. 전엔 그냥 예쁘고 말 잘 듣고 좋은 성과를 내며 낄낄 깔깔 호흡이 잘 맞는 아이들이 좋았었다. 그런데 이젠 이상하다. 아내는 며칠째 아이의 거짓말을 신경 쓰더니 아이엄마의 폭압적인 자세에서 단서를 찾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열 살 아이의 뺨을 그렇듯 효자손으로 갈겨버리다니!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서 주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묵묵히 주를 바라는 게 우리의 일이라. 늙음도 일이다. 늙는다는 건 관조적인 인간이 된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려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참된 안식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늙음도 젊음도 없다. 그러니 고작 한 뼘 길이만큼의 인생에서 무슨 수로 주의 뜻을 바라고 구할 수 있을까?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