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18. 11. 15. 07:1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세기 3:3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40:4

 

 

한끝 차이다.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 하는 정도로 들을 때 설마, 하는 방심이 우리 안의 안이함을 해이함을 나태함을 작위적인 열심을 무작위로 퍼져나게 하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이를 어찌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까? 본래 직접 듣지 않은 것은 부풀거나 시들하여 그 정도가 와해되는 까닭일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 전해들은 말을 옮겨 가질 때 느슨해지는 법이다. 그렇다더라, 하는 식으로 마치 자기 이야기가 아닌 듯 구는 것이다. 그렇겠다. 그럴 수 있어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하셨다. 숱하게 듣고 또 여러 번 묵상할 때마다 크게 공감이 간다. 멀찍이 서서 주를 따를 땐 따르면서도 여전히 허전한 것이다. 홀가분할 수는 있으나 실제적이지는 못하다.

 

그렇게 한끝 차이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았던 때가 있다. 여전히 그렇게 사는 내 주변의 여럿 사람들을 보기도 한다. 저들의 적당함이 때론 넉넉하게 보인다. 훨씬 낫게 여겨지는 것은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삶처럼 관조적인 것 같기도 하다. 곧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우리의 기질은 땅의 형질 그대로를 닮았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 1:2).” 그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다는 아이러니함. 어쩌면 우리 안에는 유혹의 달콤함을 마다할 능력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2).” 하는 원리. 우리 안에 말씀이 없으면 아주 고약할 수밖에 없는 무의식의 세계를 갖고 있는 것이겠다. 그리 지어져 구원을 이뤄가는 게 우리 일생의 과업이 아니겠나. 모든 말씀은 나를 향해 들려진다. 내가 아담이면서 동시에 하와다. 거기 있었으면서 거기 없었다. 들었으나 듣지 못했다. 보면 그래야지, 하는 싸움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싸움이 더 치열하다. 항상 그래야 할 것은 그러지 말아야 할 것으로 무너지기 일쑤다.

 

결국은 수치다. ‘눈이 밝아져’ 고작 얻은 것이 자신의 벗음과 그 수치와 죄책으로 인한 감추고 숨기는 것밖에 달리 더 나은 길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3:7).” 그래서 저이가 그랬구나. 그때 그 아이가 그랬던 것이구나. 하는 이해가 고스란히 내 이야기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어쩐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그를 덧입어 사는 삶. 내가 나의 나 된 것에 대하여 실토하고 주 앞에 온전히 구하는 일.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4).” 오늘 말씀은 무엇을 어찌 여기며 살아야 하는지를 새삼 일깨우신다.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가 얼마나 여유로워 보이는지. 그렇듯 개의치 않고 자유할 수 있는 모습에서 때론 주눅이 들 정도이니. 하나 저들을 돌아보지 않는 게 복이다.

 

혹시나 하고 설마 하는 마음은 늘 우리를 그릇 행하게 한다. 누구처럼, 어떻게, 무얼 하는 따위의 당위적인 수고에도 돌아볼 것 없다. 저는 저의 길을 가고 나는 내게 두신 길을 가는 게 복일 거였다. 분명한 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 2:10).”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실제의 행함이지 다짐이나 각오가 아니다. 내가 ‘이 아이’를 마주하고 앉아 드는 여러 회의와 갈등까지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오롯이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벧전 3:5).”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위대해서가 아니다. 이 일이 내 앞에 주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대하면서 우리는 그리 마음이 쓰이는 것을 따라 주를 바람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갈 3:27). 곧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삶의 예표다.

 

아이는 돌아오는 주일 날 학습세례를 받는다. 꼬박 6개월을 거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했다. 매일 같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쓰고 되새긴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전혀 엉뚱한 소리로 응답하지만 그 마음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나는 이제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듯 인도하시는 이가 구주이심을 말이다. 이번 주간은 더 일찍 서둘러 와서 어제 그제 아홉 시도 안 돼 글방으로 올라왔다. 그처럼 오전에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내게도 귀한 게 되었다.

 

일기를 쓰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같이 읽고 이를 옮겨 적고 수학과 영어를 풀고 그림을 그리고 하는 아주 단순한 일의 반복 중에도 주의 임재가 우리의 영혼을 돌보시는 것을 느낀다. 서로의 마음이 싫지 않은 것도 신기하고 그러는 동안 주의 뜻을 바라는 것에도 하나같다. 병적으로라도 아이는 숨길 줄 몰라서, 아이의 엉거주춤한 태도에서 나의 본심을 자주 목격하곤 하는 것이다. 그게 어디 그 아이의 병적인 이력 때문이겠나?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궁극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배운다. 우리로 주의 역사에 복종하게 하심이다. 그래서 우리 비천한 몸을 영광의 것으로 변하게 하신다. 기질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특징은 타락 이전부터 그러하여서 하나님의 운행이 없으면 ‘죽을까 하노라.’ 하는 정도의 인식밖에는 할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내남없이 다를 게 없다. 더 나은 줄 아는 게 문제다.

 

그래서 성경의 논리는 간단하고 투명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게 그 어떤 것보다 복이었다. 그것으로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그래서 아이와 있을 때 즐거울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랄 때 즐거운 거였다.

 

그게 어디 좋을 때만 좋은 것이겠나?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환난 중에서 즐거워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아이러니함. 겨우 나의 하루는 ‘이 아이’와 함께 오전을 보내고 오후는 거의 혼자 있는 무료함의 연속인 것 같으나 그래서 책이 읽힌다. 기도가 나온다. 주를 바라고 생각한다. 누구 생각으로 마음도 쓰인다. 그럴 수 있는 따분함을 이제 나는 사랑한다.

 

오후께 차를 몰고 저기 어디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왔다. 완연한 가을 날씨에 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그 자체로 그림 같았다. 그래봐야 한 30여 분 콧바람을 쐬고 온 게 전부지만 나의 이러한 공허감이 유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누구보다 기를 쓰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쓸려다니 듯 살아본 적도 있다. 친구를 운운하며 그게 사는 거지, 하며 멋모르고 지껄이던 모든 분주함이 허허로워졌다.

 

다 저녁에 늙으신 장모가 한 아름 무얼 이고 지고 오셨다. 아내가 수업을 끝내고 같이 잔치국수를 먹었다. 나는 저이의 노구를 볼 때면 경이롭다. 좀 더 일찍부터 노인들의 삶을 동경하였던 게 점점 유익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늙음보다 아름다운 생의 순간이 또 있을까? 붉게 물든 노을이나 곱게 차려 입은 단풍이나 찢어지듯 팽팽하게 펴진 파란하늘이나 그 높고 푸른 청명함이나. 우리가 젊어서 쌓아온 내면의 소양으로 늙음은 더욱 값진 게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든지 여유로울 수 있는, 강요하는 자유가 아닌 무료함에 가까운 공백의 자유함에서 말이다.

 

얼마큼 말씀에 가까이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게 관건이겠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결코 우리의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죽을까 하노라.’ 했던 저이의 안이함이 오늘에서는 더욱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죄는 죄겠으나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희게 하시는, 소망을 가졌다.

 

고로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날마다 아뢰고 기다리고 들으심에 응답하시는 삶이라니. 그리하여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2).” 주를 바라며 가만히 주께 소망을 두는, 기다림의 시간이 노인의 넉넉함은 아닐까? 결국 그 힘은 주를 의지함에 있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3).” 오늘 한 날도 주의 것이라. 내게 두시는 한 생의 삶이 어떻게 비롯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대한 확신이 감사하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