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5 성탄절
전도서 4:9-12
- 누가복음 2:10, 요한복음 1:14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전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4: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4: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어느 날, 세례 요한의 모친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지 6개월이 되던 때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왔다.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눅 1:28).” 이와 같은 인사는 어찌된 영문인지 두려운 마음이 먼저 앞설 따름이다. 이에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였다(29). 개의치 않고 천사가 말한다.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30).”
은혜라 하면 뭔가 좋은 일이 있으려나, 하고 저마다 바라는 일이다. 한데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31).”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저는 처녀였다. 정혼한 남자도 있었다. 당시는 혼인 전에 처녀가 임신을 하면 부정하게 여겨 돌로 쳐 죽이는 관례가 있었다. 여기서 어린 처녀 마리아의 심정을 상상해보자. 그런데 또 개의치 않고 천사가 알린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32-33).”
이런 말이 귀에 들러올 리 없다. 마리아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되물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 납득이 안 가는 일이다. 말이 안 된다. 상식에도 어긋난다. 이러는 법은 없다. 왜 하필, 나인가? 나에게 왜 이러시는가? 마리아는 절박한 심정으로 되물었고, 천사는 말하였다.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35).” 도무지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천사는 마리아의 이해를 돕는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36-37).” 저가 이미 늙어 더는 아들을 낳을 수 없었다는 걸 마리아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이가 벌써 임신을 하여 여섯 달이 되었다니! 남의 일로 놓고 보니 하나님의 능하심을 머리로는 알 수 있겠는데, 실제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야 순간이 되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38).”
2.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받기는 하였으나 정혼자 요셉은 또 달랐다. 요셉은 그의 아내 될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는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마 1:19).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데,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
부정하여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게 아니었다. ‘성령으로’ 그리 된 일이었다. 뭔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21).” 죄는 무엇이고 구원은 또 무엇일까? 저의 고심은 현실적인 문제에서 영적인 문제로 확대되었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좋을까?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22).” 요셉도 기본적으로 성경을 읽고 들어 알고는 있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 그런데 정작 그런 일이 우리에게 벌어진다면 우리는 참으로 난감할 일이다. 글로 읽고, 말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저가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할 이’시고, 그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실 임마누엘’이시라니! 함께 계시다는 게 왠지 선뜻 와 닿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바도 아니고 뭔가 현실적으로 손에 쥐어주는 어떤 가시적인 성과도 아닌 것이어서.
그렇게 요셉은 꿈을 꾸었다. 대체 그런 꿈의 내용은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내가 너무 신경을 썼더니, 너무 과민해서 그런 것일까? 머리가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과연 우리 자신이라면 어떻게 대처하는 게 옳을까?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24-25).” 여기서 먼저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 우린 간단한 진리 하나를 깨닫게 된다. 받아들이거나 이를 논리적으로 접근하여 이성적으로 대처하며 물리치거나. 믿든가, 도저히 믿지 못하겠든가.
3.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
오늘 전도서의 말씀에 주목해보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 4:9).” 과연 마리아에게 요셉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요셉은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해 의연하게 믿음으로 대처하는 마리아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마리아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이해한 요셉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저들 두 사람 가운데 하나라도 호들갑을 떨며 서로를 밀어내거나 배척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지혜자는 말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 그들의 수고는 수고다. 엄청난 수고다. 목숨이 달린 문제고 어쩌면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본문은 일컫는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10).” 그래서 하나님은 본래 사람을 홀로 두시기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가깝게는 부부로, 저들을 통해 가족과 혈연관계로 서로를 두셨다. 친구와 동료로 우리를 우리 곁에 두셨다. 예수님은 거리낌 없이 우리를 친구라 하셨다. 곧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11).” 서로는 의지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각각의 맡기신 생을 감당하게 하셨다.
4.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곧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 오늘 전도서의 지혜자는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상기시킨다. 단순히 우린 혈연과 지연관계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다. 죄로 얼룩진 우리가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이를 복음이라 한다.
우리는 여기서 핵심적인 복음의 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듣고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우리의 판단과 기준, 상식과 논리를 충족시키는 접근이 아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게 가장 첫째 되는 자세다. 만일 마리아가 끝내 주저하고 망설이며, 시간을 두고 누구와 의논하고, 기도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였으면 어땠을까? 저의 정혼자 요셉도 망설이고 주저하다 책임을 다하지 않고 슬그머니 물러섰다면 어땠을까? 다시 말해 저들은 어떻게 그런 무모하리만치 순응적인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바로 그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복음. 말씀을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원어를 찾아보고 좀 더 설득력 있는 해석본을 찾아보고 그에 저명한 어느 랍비를 찾아가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말할 수 있었던 그 기본 자세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하는 본연의 자신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는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눅 1:38).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다고? 하는 식의 태도로는 어림없는 받아들임이었다.
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한다. 그저 들리고 마는 소리가 아니었다. 구호나 외침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사도 요한은 이를 분명히 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 말씀이 지금 우리의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도 함께 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그렇다면 우리의 의무가 생긴다. 첫째, 그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이는 독생자 예수의 영광이시다. 둘째,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야 한다. 하루하루가 그러해야 한다.
다시 보자.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말씀은 우리가 무서워할 걸 알았다는 걸 감추지 않으신다. 두려움은 경외의 필연적인 감정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오감이 있고, 인격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린 결코 기계가 아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날마다 매순간 그와 같이 말씀을 보이신다. “보라.” 소리로 듣기만 하지 말고, 보라. 직접 눈으로 삶 가운데서 보라. 무엇을 말인가?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그 복음의 주격은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 하나님이시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이 땅을 사람으로 사셨다. 그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복음이 되어주고 보여주어야 한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들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날들을 살아야 한다(요 1:14). 우리는 그렇게 고상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내 안의 충만함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말씀뿐이다. 우습지만 자동차를 새로 사고, ‘스마트 키’를 가지고부터 같은 원리를 느낀다. 차 곁에서 손만 대면 문이 열린다. 시동 버튼을 누르면 시동을 걸린다. 그리 작동하는 것은 내 안에 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 곁에 가면 문이 열리듯 그 말씀이 우리 귀에는 들어온다. 손을 대고 묵상을 하면 열어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의 의미를 알아듣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말씀을 의지할 줄 안다. 오히려 우리의 고난은 남은 인생을 항해를 위한 데 있어 선체의 평형수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 삶의 균형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나오는 말
이는 모두 성령으로 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현존이시다. 우리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계시이시다. 사람으로 우리 곁에 거하신 말씀이시다.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그런 이유로 쓰였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며 기뻐하는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다른 성탄의 기쁨을 누리고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하루에도 열두 번씩, 너무 빈번하여 민망할 정도로 송구하지만, 앞으로도 수천만 번은 더 우리가 우리의 근심으로 시달릴 때마다 말씀은 이를 ‘큰 기쁨’으로 바꾸어놓으실 것이다. 이 기쁨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말씀이 그리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제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여전히 망설이고 또는 시간을 두고 좀 더 다른 방법을 모색할 것인지!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7:13).”
그러므로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결국 우리가 오늘 서로를 서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간다면, 우리 안의 말씀은 온전히 이루어 ‘아기 예수’를 잉태하는 삶을 살게 하신다. 장성하여 모든 이에게 사랑을 더하는 장성하신 예수님의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가게도 하신다. 그리하여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하는 고백을 품고 사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삶으로 살게 하신다.
곧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이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그러므로 이처럼 성탄절 아침,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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