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전도서 6:1-12, 히브리서 2:10 / 합당하도다

전봉석 2019. 1. 11. 11:15

20190113 주일

 

 

전도서 6:1-12, 히브리서 2:10

합당하도다

 

 

전도서

6:1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6:2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6:3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6:4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6:5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6:6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6:7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6:8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

6:9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6:10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6: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6: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히브리서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들어가는 말

 

오늘 말씀은 읽다보면 힘이 쭉 빠지는 것 같다. 우리 마음을 절로 무겁게 하는 것이다. 저는 이렇게 말문을 연다.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2).” 세상은 온통 불공평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또 그 사람이 다복하여 여러 명의 자녀를 두고 장수하였다고 하자. 그런데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자식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그가 죽어 안장되지 못하면 참 안 된 일이다. 실제 서로 안 보고 사는 부모 형제 사이가 주위에는 많다. 그런 그들을 낙태된 자보다 못하다.’고 한다. 차라리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3-5).” 그래도 이생의 개똥밭이 낫다고 하는 소린 아무리 생각해도 역설적이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6).” 결국은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7).” 우리는 다 알다시피 그 어떤 경우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족함을 누릴 수 없다. 하다못해 물건을 살 때도, 당장 그것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정작 지나고 나면 금세 시들해지는 법이다. 그렇다면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살아 있는 자들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는가(8).”

 

결국은 네가 조금 먹은 것도 토하겠고 네 아름다운 말도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23:8).” 이것이 인생이다. 이와 같이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6:9).” 곧 우리는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신기술을 운운하지만,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10).” 다들 그 모든 시대마다 사람들은 신문물에 매료되었었다. 그런들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11).”

 

결국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12).” 오늘 말씀은 도대체 그 문제가 무엇인가? 의문점을 던진다. 먼저 여기서 언어의 역설을 짚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비유나 은유는 우리의 생각을 확대하고 그 의미를 확산한다. 이것일 수 있고 저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성경의 주된 언어는 은유다. 오늘 말씀에서 그 여백을 채울 수 있는 해답을 히브리서에서 찾았다. 합당하도다!

 

 

합당하도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문제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에 답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길이 있다. 그러니까 왜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나? 결국 왜 독생자 아들 그리스도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을까? 왜 누군 믿고 누군 믿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누가 어떤 자격으로 택하심을 받고 또 누구는 택정하심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신 것일까?

 

어쩌면 우리의 이런 질문은 끝이 없다. 그리고 답이 없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생도 인생의 문제에 답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그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곧 모든 문제는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문제다. 그 자체로 답이고 길이다. 하나님의 본질과 그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인생의 어떤 문제에도 답을 할 수 없다. 그 답은 모두 답을 위한 답이 아니라 미봉책으로의 답일 뿐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문제는 문제로 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왜 사람으로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어주시기까지 했는지!

 

이에 답은, 합당하도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우리의 문제는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하신 게 문제다. 여기서 답은 가시떨기 앞에서 보인 모세의 태도뿐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 이스라엘을 이끌어야 했던 여호수아의 자세뿐이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5:15).”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없다. 하나님도 어쩔 수 없으신 문제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굳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사람의 죄를 담당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였다면, 다른 해결책이 있었다면, 더 좋은 수가 있었다면 그리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이것만이 합당하셨다! 믿음이란 그에 따른 만족이다. 믿음이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이해가 되든 안 되든, 그리 행하신 이가 선하심을 믿는 게 믿음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사람으로 하나님을 성품을 다 알 수 없다. 안다고 할 때 교만이 들어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길 때 하나님처럼 된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18:25).” 아브라함은 이를 믿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납득할 수 없어도, 때론 불공평하고 억울하다 싶어도, 변함없이 하나님은 합당하시다는 믿음. 다른 더 좋은 수가 없다는 믿음.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결국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4-5).” 우리를 아들로 삼으셨다.

 

우리는 다만 영접함으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신의 아들이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더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8:15).”

 

아빠 아버지가 능히 도우실 것이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2:18).” 자기를 힘 입혀 주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7:25).” 이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 그 영광 앞에 우리는 기쁨으로 선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로서 합당하다(1:24).

 

1. 우리는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산다(1-2).

 

남을 의식하고 살지 않는다. 누구의 만족함을 위해 살지도 않는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12:56).” 우리는 그런 자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2. 우리는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안다(3).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모든 게 맡기심이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127:3-5).” 곧 우리의 젊음도, 자식도, 늙음도 결국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15:15).”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짧아지느니라(10:27).”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12:15).” 곧 우리가 붙들어야 할 참 행복은 하나님의 선한 사업이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3. 인생은 허무할 뿐이다(4-6)

 

앞서도 밝혔듯이 천년의 갑절을 산다한들? 본래 하루는 길고 일 년은 짧은 법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10).” 돌아보면 후딱 지나간 날들 뿐이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40:6-7).”

 

그러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4:14).” 구구한 계획보다 간소한 한 날의 수고가 족하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28:26).” 가장 의지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4. 자족하는 삶이 복되다(7).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우리의 소망을 주께 두는 것이 복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39:6-7).” 그러므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84:10).” 고로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107:9).”

 

족한 줄 아는 게 감사의 바탕이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5. 그러므로 자신감을 자랑하지 말자(8)

 

자신보다 믿지 못할 게 또 어디 있던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9:23).” 보면 늘 우리의 자부심이 문제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그래서 전도자는 목소리를 높인다.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6:7).”

 

6. 하나님 앞에 승복하자(9-10)

 

수시로 우리는 얼마나 종주먹을 날리곤 하는지! 문제를 끌어안고 사는 것과 문제를 딛고 사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왕하 19:28).” 이내 모든 인생은 갈 데까지 가서 두 손을 든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145:1).”

 

7. 덧없는 인생에서 덕 있는 삶을 살자(11-12)

 

그러므로 허무주의자로 무기력하게 살 것인가? 수동적으로 살 것인가? 순종이 아닌 굴종의 삶을 자처할 것인가? 과연 그럴 거였으면, 그것으로 우리 인생이 끝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정녕 그 방법밖에는 없으셨을까? 스스로 한계를 지워 죽어주시기까지 하여 이룩한 구원인데! 아니다. 우린 그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두시는 부당함까지도, 그것을 가지고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25:21).”

 

 

나오는 말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10).” 우리의 더 나은 방도와 묘책을 수천 수억 개를 합한다 해도, 우리로 그 구원에 들어가게 하신 구원의 창시자되시는 하나님의 합당하심을 당할 수 없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5:15-16).”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이는 모든 사람을 향한 말씀이 아니다. ‘거룩하게 하신 이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2:11).” 오늘 우리더러 그 거룩하심과 한 근원이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야말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신다.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는 데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고로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 모든 날이, 합당하시다.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었으므로) 합당하도다(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