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31 주일
사도행전 3:1-26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들어가는 말
오규원 시인의 시집 중에 <가끔은 주목 받는 생이고 싶다>는 시에서, “인생이란 그저 살아가는 짧은 무엇이 아닌 것/ 문득 - 스쳐 지나가는 눈길에도 기쁨이 넘쳐나니/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대목이 새삼 기억이 난다. 지난 서너 달 동안 전도서는 우리에게 역설적이게도 생의 가치를 헛되고 헛되다고 노래함으로써, 심판의 하나님을 일깨워주었다. 저의 마지막 말과 처음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2:14).” 그런데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1:2-3).” 하고 물었다. 우리는 그 답을 안다. 복음을 들은 사람은 결코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회개하고 돌이켜서 확실히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더욱 철저하게 외면하고 부정하며 비그리스도인이 되거나.
정치적인 결정을 위해 헤롯과 빌라도가 친구가 되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 23:12).” 당시 그리스도인을 죽여 밤거리를 밝혔던 로마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 고려로 인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저는 종교적인 의식과 행위를 자신의 지위와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선택했을 뿐이다. 저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 다만 유물론자들로 자신의 미래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것이라 여겼다.
전도서에 이어 오늘부터 우리가 다룰 사도행전은 우리 사회의 모습과 교회의 모습과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비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축약하여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회 사건이 단순히 오늘 날에 이르러서야 일어나는 일들이 아님을 알게 한다. 또한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문명이 좀 발달하면 좀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게 한다. 앞으로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사도행전을 본문으로 할 것이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복음의 개괄적인 서론이면서 본론을 다룰 것이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자세는 무엇을 기반으로 하여야 하는지, 불신앙의 특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럼에도 복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골수와 영혼을 쪼개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앞서 한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인생이란 그저 살아가는 짧은 무엇이 아’니다. ‘문득 - 스쳐 지나가는 눈길에도 기쁨이 넘쳐나’는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은 우리 영혼의 갈급함을 말씀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행 3:1).”
① 우리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다. 주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이셨다.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곧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꺼려지는 존재였다. 저들은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저는 보잘것없는 나사렛에서 태어난 목수였고 가난한 어부들을 불러 모아 무언가를 도모하다 맥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대상 16:11).” 우리가 여호와의 능력을 구한다는 것은 무얼까?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즉 한 마디로 우리의 역할을 정리하면,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이어서 보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행 3:2).” 저는 마흔 살쯤 된 이로 앉은뱅이다. 글을 그저 문자적으로 읽으면 어느 장애인을 빗대어 이른 말씀 같지만 이는 은유적으로 우리의 마비된 영혼을 일깨운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3).”
단지 어디가 다치거나 아픈 게 아니라 마비가 된 것이다. 영적으로 마비된 신자들이 많다. 저들의 특징은 교회 근처에 있으되 교회 밖에 있다. 당장의 어떤 이익을 좇는다. 친목을 도모하고 자신의 사회 활동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다. 영적으로 마비된 자를 성경은 게으른 자로 비유하곤 하였다. 즉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저들에게 교회는 일깨워야 한다. 도무지 일하기 싫어하고 일만 만드는 신자가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4-35).” 그런데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1-12).”
② 우리는 ‘우리를 보라’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행 3:4).” 이는 양면적인 구조의 표현이다.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하고(고후 3:3),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하는 사명을 일깨운다(2:15). 그러므로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야 하는 것이다.
한데 또 다른 측면으로는 좀 더 뒤에 다루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하고 엄히 경고한다. 왜냐하면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주목 받는 생’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주목해야 하는 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곧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곧 우리는 각각 개개의 성전이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삶을 살고 있지만, 동시에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곧 우리는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성전에 거하지 못할 때,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왜냐하면,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안 믿는 저들이 너무 잘 살고 오히려 평안하고 죽을 때도 평탄한 것 같아서 말이다. 한데 시인은 후반부에서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
그 끝이 무엇인가?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27).” 이를 알면서부터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곧 우리는 각각 주의 성전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언급하면,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즉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우리의 열매로 이를 증거하는 것이다.
2.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행 3:5-10).”
① 우린 결코 은과 금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교회의 역할도 그런 게 아니다. 마치 자선과 구제를 교회의 제일 되는 덕목으로 여기며 그것으로 지역 사회에 이바지하려는 모습을 우선하곤 하는데 옳지 않다. 이는 다만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지, 이를 내세워 홍보하고 전도하는 게 아니다. 사진 찍고 기록으로 남겨 이를 의로 여기며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만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그런데 점점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는 일이 늘고 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 11:28-29).”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② 우리는 다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 오늘 본문은 이를 확실히 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즉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베드로는 이를 누누이 강조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9:34).”
사회는 점점 다양성이 강조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권이 우선적으로 취급 되면서, 교회 또한 적잖이 사회 참여를 강조하고 이에 따른 타협점으로 상한 영혼을 치유하는 데 있어 심리학을 끌어들이고, 말씀 묵상을 철학적인 사고로 가미하여 구도자의 삶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자연에 들어가 사람 본연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되새기고 요가든 명상이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데 집중하곤 한다. 흔히 ‘치유 집회’니 ‘화해 제단’이니 하면서 병 낫기에 급급하고 당장의 필요를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은 이론에 지나지 않고 연구 대상일 뿐이지 정작 우리 개개의 하나님은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단지 일부일 뿐이다. 결코 전부가 아니다. 병 낫기를 위해, 그 목적으로 사도들이 저를 낫게 한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③ 그리스도는 우리의 보배이다. 이 믿음이 우리의 전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 1:1).” 성령의 은사는 그저 지나간 간증으로 삼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삶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나무와 같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3).”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가 맺히고 그 열매로 맺어져야지 자기 위주의 체험과 간증을 기적으로 삼아 살아가는 게 아닌 것이다. 좀 더 보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왜 성경은 절제의 열매를 맨 마지막에 둔 것일까? 절제가 없는 사랑은 지나친 참견과 집착이 되기 십상이다. 절제가 없는 희락은 ‘버닝썬’과 같이 쾌락과 향락의 도구가 되기 쉽다. 절제가 없는 화평은 내재된 수치심을 감추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저 평화주의자인 척 한다.
절제가 없는 오래 참음은 불의를 보고도 눈 감기 십상이고, 절제가 없는 자비와 양선은 가장 고상한 자기만족으로 전락하여 어느 순간 정치화되기 쉽다. 화려한 수사와 특이한 이력으로 비춰지기는 절제가 없는 충성도 마찬가지다. 일개 가신(家臣)으로 군주의 명에 절대복종하거나 민족주의자가 되어 애국의 제물이 될 뿐이다. 절제가 없는 온유는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쉽다. 뿐만 아니라 절제가 없는 절제는 자가당착에 빠져 자기 신념의 노예가 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④ 우리는 결코 그저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행 3:11).” 마치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 같으나 하나님이 교회를 선택하셨다. 우리가 교회를 선택한 게 아니라 교회가 우리를 선택하였다. 이 진리는 복음의 핵심이다. 어쩌다 우린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늘 곁에서 보던 마비된 자가 나았다. 이를 보려고 사람들이 모였다. 누구 간증을 들으려고, 어떤 교회의 특이한 성향에 도취되어 사람들이 모인다. 이를 홍보하고 이를 목적으로 교회를 이루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목회를 어떤 이벤트로 삼는 목회자도 있다. 한데 베드로는 절규하듯 되묻는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왜 누가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난 것을 보고 놀랍게 여기나?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13:11-12).” 모인 사람들은, 마비된 영혼으로 성전 밖에 있는 ‘앉은뱅이 신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사람들이 그리 된 것을 보고 놀란다. 자신들의 문제도 들고 나온다. 문제 때문에 교회에 온다. 문제가 잘 해결되는 교회마다 부흥한다! 모여드는 사람들이 엄청나다. 그런 저들은 누구인가? 바로 다음 말씀을 읽어보자.
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3-16).”
① 우리가 나음은 저가 질고를 당하심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 구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이를 명확히 하여, 예수님을 ‘그의 종’,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종종 교회가 먼저 나서서 구약 성경의 권위를 낮추고 신약을 우선하며 은혜의 시대를 강조하곤 하는데 이는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문제다.
예수님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다만 우리는 명령을 받은 사람일 뿐이다. 예수님도 그 말씀을 따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 그러므로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요 3:27-28).”
② 우리의 사명은 그를 증언하는 것이다. 이때 그 하나님은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기운으로 절대자아, 초월자, 이상의 존재로 계신 게 아니다. 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즉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개미 한 마디도 구원시킬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우리 개개인의 하나님과 관계할 뿐이다. 즉 모든 문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바울은 이를 아름답게 고백하였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내 아버지의 공로로도 아니고 내 어머니의 헌신으로도 아니다. 나의 수고와 애씀으로 누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게 아니다. 즉 모두는 각자의 하나님과 관계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9).” 즉 믿음이 있는 자는 그 믿음으로, 믿음이 없는 자는 믿음 없음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③ 우리는 다만 주의 종이라.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 곧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을 알고 있다. 저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3-4).” 그러므로 우리는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7).”
이를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49:8).” 우리가 해야 할 일과 그 결과를 말씀하고 계신다. 이를 위해 주가 고초를 당하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53:4).”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살아계심을 알리는 사람들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일상에는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의 냄새가 난다. 그리스도의 향기다. 숨길 수 없는 것이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④ 우리는 항상 저들에게 대답해줄 말을 준비하며 산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그러므로 우리의 불행도 주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데 있어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해야 한다. 즉 우리는 좋은 일에도 너무 좋아하지 않고, 슬픈 일에도 너무 슬퍼하지 않는다.
4. 우리의 무지는 죄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7-18).”
① 우리의 무지는 죄다. 결코 모르는 게 약이 아니다. 어설프게 알면 더 무섭다.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을 상고한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왜 성경공부가 필요한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상고한다는 것은 자세하게 참고하고 검토하며 비교하고 고찰한다는 의미다. 성경을 단지 수박 겉핥기로 알아서는 안 된다.
저들은 알지 못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자들이 누구인가? 부화뇌동하여 군중심리에 휩쓸려 욕하고 침 뱉고 살인자 바라바를 대신 놓아주라고 외친 자들이다. 이해한다. 모르고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지만’ 그럴 수 있는 게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왜냐하면 우리에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졌다.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다.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이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② 우리는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으라’ 외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 3:19-20).” 다른 방법은 없다. 얼렁뚱땅 묻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로서는 이보다 어처구니없는 소식도 없겠으나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복된 소식은 없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그런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우리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곧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5. 그리스도는 위대하시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행 3:21-23).”
① 하나님은 지혜와 그 능력으로 그리스도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심판의 값을 지불하셨다. 곧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는 물릴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였고 이를 충족하시기 위해 직접 죄 없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대속물이 되셨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부활하여 승천하셨으며,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셨다.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눅 24:19).” 사람들은 마비된 영혼으로 오늘도 여전히 성전 밖에서 자신들의 필요만 구걸하고 있다. 자녀가 잘 되길, 병든 몸이 낫기를, 이루고자 하는 사업이 형통하기를 구걸할 뿐이다. 그래서 저들이 바라는 구원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하는데도 당장의 필요를 구걸하기 위해 교회를 간다. 예배를 본다. 종교적인 유물론자들로, 정치적인 유물론자들로 살아간다.
② 우리는 언약의 자손들이다.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 3:24-26).” 우리가 주를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약속을 유업으로 이를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곧 이를 앞서 예수께서 들어가셨다. 우리도 그 뒤를 따른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9-20).” 이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나오는 말
지금은 구원 받을 때라.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 32:6).” 원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격려와 충고는 다음에, 좋은 일은 나중에’ 하는 거라고들 한다. 그러나 성경은 내일이면 늦는다고 경고하신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예수님의 경고는 엄중하였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마 24:42).” 그게 언제일지 우리는 모른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모습 을 거울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말씀을 상고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시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우리가 자신을 웃어넘길 수 있다는 뜻이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말했다. 무슨 뜻일까? 우리는 자기 일에 너무 집중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날마다 성전이 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이 안 믿는 자들에게 읽혀지는 ‘그리스도의 편지’이고 사랑의 냄새가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자기의 하나님과 관계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성전 앞에 마비된 영혼으로 구걸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의 사명을 안 믿는 저들에게 대답해주는 사람들이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서 말이다(벧전 3:15-16).
결국 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자. 우리 자신을 주목 받는 생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는 비록 세상에 줄 은과 금은 없으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이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그러므로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8).” 기적은 단지 큰 구원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란,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9).”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는 사람들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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