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24 주일
전도서 12:9-14
‘잘 박힌 못’과 같이
12:9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12:10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12: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12:12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들어가는 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은 없다. 마르다는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그러자 예수님은 동문서답을 하듯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그럼 우리는 묻는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고전 15:35).” 이를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칼뱅은 말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설득하실 수 있나이다.’ 우린 그저 어려울 따름이다. 임의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게 믿음이 아닌 것이다. 한데 바울은 이어서 우리에게 들려준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36-38).”
곧 이 원리는 오늘 아침 우리가 먹고 온 음식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러니까 모든 음식은 어떤 형태로든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면, ‘우리 사람의 죽음을 비료로 쓰자.’는 어느 운동이 그렇듯이 <라이온 킹>의 메시지처럼 ‘모든 생명은 죽어서 먼지로 돌아간다.’ 그냥 그 정도인가? 과연 그게 다일까? 좀 더 바울의 논증을 읽어보면, 각각의 육체가 다르고 그 영광도 다르다.
이에 우리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39-44). 다시 말해서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4).” 이는 곧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이와 같은 말씀이 우리 심령에 ‘잘 박힌 못’ 같아서,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11).” 곧 오늘 우리 삶 가운데 우리 심령에 박힌,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첫째, 우리의 사는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전 12:9-10).”
곧 우리 믿는 자의 삶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혜자이다. 주를 경외함으로 진리의 말씀을 듣는다. ‘듣는다’는 ‘스민다’는 의미이고 ‘스민다’는 것은 ‘박힌다’는 의미이다. 아무리 연약한 식물이라 해도 흙에 뿌리를 박고 새순을 땅 밖으로 밀어 올리는 힘은 엄청나다. 과학적으로 누가 말하길 그 힘은 1.5톤을 들어올릴 수 있는 힘이 된다고 한다.
한 번은 공사장의 컨테이너 박스가 점점 기울어지더니 며칠 사이 비스듬히 기울이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바닥은 구도로인 아스팔트였고, 저들은 그 땅 속을 알지 못했다. 혹시 땅 밑에 무슨 배관이 터졌는가 하여 이를 조심스럽게 옮기고 땅을 파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밑에서는 버섯이 올라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버섯 몇 송이가 땅을 뚫고 올라오면서 그 위를 덮고 있는 아스팔트를 밀어 올렸고 그 위에 세워둔 컨테이너 박스까지 들어 올린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서 방영된 것으로,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잠 22:20-21).” 이와 같이 신비한 자연 계시를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확장시킨다. 이를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깊이 생각하며, 연구하고, 아름다운 말들로 구하는 일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결국 오늘 우리가 사는 일은 ‘어쩌다 어른’이 된 삶이 아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5-16).”
둘째, 말씀이 질서다.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11).”
우리는 결코 백지처럼 깨끗한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 날 때부터 죄악 중에서 났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그런 우리의 삶은 어렸을 때나 늙어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가운데 있는 셈이다. 설마, 하다 훅, 간다. 일련의 사회 사건은 이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곧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이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3).” 그 빛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시는 말씀이 우리 귀에는 들린다.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하시매, 그 빛은 곧 말씀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로써 우리는 우리 마음에 박힌 말씀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확증한다. 한데 사람들은 찔리지 않는다. 빛을 싫어한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 결과는 참혹할 따름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그대로 그 논거가 되는 것이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결코 저들은 몰라서가 아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알고도 그러니 오늘 우리의 혼돈이 더 무섭다. 그럼에도 믿는 우리에게는,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11).” 때로 말씀이 채찍 같다. 찔린다. 내 이야기처럼 아프다. 말씀은 이제 ‘잘 박힌 못’ 같아서,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잠 3:1-2).”
셋째, 하나님 없는 지식은 허무할 따름이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 12:12).”
우리는 얼마나 서로 열심인가? 그 열심을 서로가 격려하고 칭찬하고 응원한다. 스스로 이르기를 그동안 수고하였으니 쉬자, 한다. 한데 성경은,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우리가 자랑할 것은 명철함이라 한다. 우리의 명철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곧 영생이다. 다시 말해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우리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그러므로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성경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 말씀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그런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많은 사람들이 허비하고 사는지, 오늘 말씀은 일깨우신다.
이 땅에서의 수고는 끝이 없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 12:12).” 하지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침으로 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건강과 시간과 모든 주어진 인생을 채워가야 하는 것이다.
넷째,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참 가치는 경외와 순종뿐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처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그럼 이제 어쩔 것인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신 6:24).” 결국 이 명령과 그에 따른 경외와 순종은 우리를 향한 복을 위한 것이다. 곧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0-21).”
지난 주일에도 우리가 말씀을 나누었듯이 믿는다고 믿는 자신의 믿음으로 전부가 아닌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믿음은 사탄에게도 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그럼 무엇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할 것인가? 곧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
돌아보아, 우리는 지금 무엇을 행하고 있나? 점검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주로 생각하는지, 어디에 관심이 온통 기울어져 있는지, 누굴 만나면 주로 무슨 말을 하는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다섯째, 하나님은 심판자이심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모든 삶은 죽는다. 죽음 너머에는 심판이 있다. 믿는 자는 믿음으로 심판에 서야 하고 믿지 않는 자는 자신이 믿지 않음으로 자신의 의로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우리는 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먼저 본다. 그럴듯한 말과 사람의 출세와 성공과 저의 업적을 기리면서. 한데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 구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시 7:9).”
곧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 24:12).” 아무도 모른다 해도 하나님은 아시는 일에 대하여,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단순하고 명료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복잡하지 않다. 사는 게 번잡스러울 게 없다. 다만 우리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살 뿐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나오는 말
우리는 지혜자다. 복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부르셨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그러므로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딤전 6:11).” 이로써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이를 붙들고 살자(시 103:4-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생은 허무할 따름이다. 그러니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19-20).”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탁함으로 산다. 곧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 땅에서의 목표를 위해서도 자기 목숨을 바친다고 하는데 하물며! 곧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이 우리 마음판에 ‘잘 박힌 못’과 같이 붙들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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