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4 주일
사도행전 4:13-22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4: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4: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4: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4: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4: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4: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4: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들어가는 말
나이 마흔의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하였다. 누구에겐 이와 같은 기적이 큰 이슈이고, 누구에겐 이마저도 정치적인 부담이 된다. ‘그 일’로 이 사회의 ‘건축자’들이 모였다. 저들은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었다. 저들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였다. 저들은 사도들을 이틀 동안 가두었다. 그리고 심문하였다. 이를 듣는 자들이 남자의 수만 약 오천이었다.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도 참여하였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정치적으로도 부담이 되고 자신들의 신념과도 배치되는 일이었다. 베드로가 대답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유대인들에게는 꺼리는 이름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인물이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사도들은 더 과감하게 전하였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러자 사회 지도층인 저들은 놀랐다.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다. 또 전에 저들이 예수와 함께 있던 것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도 보았다. 딱히 비난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이 막힌 저들은 근엄하게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고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지 않는가?’ 그리고 꾀를 내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자. 이 후에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그렇게 결의하고 사도들을 불렀다. 그리고 경고하였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자 관리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저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골치가 아팠다. 사람들이 다 보고 있었다. 방법을 찾지 못하자 다시 위협하고 놓아 주었다. 이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 성도는 다르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13-14).”
같은 일을 겪어도 이를 받는 능력과 받아들이는 힘이 다르다. 우리 힘의 원천은 주를 경외함에 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성도도 똑같이 어려움을 겪고 힘듦 가운데서 신음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눅 21:15).”
이는 그리스도를 아는 힘이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전에는 우리도 똑같았다. 우리가 살 궁리를 찾았고 우리 힘으로 어찌하려고 무던히 기를 쓰며 살았다. 착하고 의롭고 정직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
성도에겐 주 앞에서 통회할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사람들과 똑같은 어려움이 우리에겐 다른 의미가 되었다. 어떤 어려움도 허투루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2. 성도는 매사에 떳떳하고 투명하다.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15-16).”
저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린다. 우리 기독교는 비화밀교가 아니다. 은밀하게 감추고 믿지 않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요 18:20).” 많은 사이비나 이단들이 신분을 감추고 또는 교묘하게 은폐하며 위장하고 접근한다. 그러나 우린 드러내 놓고 가르친다. 은밀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린 이제 빛의 자녀들이다. 거리낄게 없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5-6).” 다시 말하면 우린 교회 안에서 자신의 허물과 죄악도 감추지 않는다. 혼자 끙끙 앓지 않는다. 나눈다. 기도를 부탁하고 서로 그 짐을 진다. 자기만 아는 고통을 겪지 않는다. 여전히 서로 선을 긋고 예의를 갖추는 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3. 성도는 사람들의 이목에 끌려가지 않는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17-18).”
실제 살면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선이니 페르소나니 하며 적당히 대충 예의를 갖추는 것은 성도가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의 평가를 받지 않는다. 저들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성경은 이를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서로 숨기고 내숭을 떤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이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는 더 이상 매어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남의 이목에 끌려 살지도 않는다.
4.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성도라고 하면서 얼마나 이를 감추고 사는가? 안 믿는 친구들과 있을 때, 어디 하나님을 배척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회사나 학교에 지원할 때, 심지어 저들의 철학과 판단과 이상을 얼마나 대책 없이 수용하고 신봉하기까지 하는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여기서 이 얼굴 저기서 저 얼굴로 사는 신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교회를 오가고 성경을 읽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에 다니엘의 확고함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곧 죽을지언정 살 길을 스스로 모색하지 않은 많은 믿음의 선조들에 의해 이 땅의 기독교는 뿌리를 내렸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
우리의 기준은 세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6).” 이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곧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5. 성도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한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20).”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성도로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가? 과연 우리 삶에 그 증거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누가 물었다. 내가 믿는다고 하지만 선택받은 백성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러니까 그 삶에서 보고 들은 게 그저 이론이고 상식이고 지식일 뿐 정작 삶이 되지 못하였다. 실제의 삶이 되지 못한 믿음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우상을 섬기듯 하나님을 안다.
그러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먼저 우리의 증거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는가 부인하는가? 다음은,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행 22:15).” 우리 삶이 곧 증거가 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이 성도라면 성도로서 남과 다른, 안 믿는 사람들과는 전혀 같을 수 없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사는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나오는 말
우리는 다만 증인이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거나 주의 은혜를 갚을 길 없다. 마치 빚진 자들처럼 교회를 다니고 주를 섬기고 성도로 사는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조차 고역이다. 한다고 하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고, 나름은 애쓰고 수고하는데도 더 일은 꼬여만 가고, 우리 안에 드는 의심은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구원 받은 게 맞나?’ 하는 것이다.
마흔 살 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기적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고 열광하는 게 끝이 아니다. 이는 극히 일부분이고 아주 보잘것없는 사소함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영생과 구원의 그 엄청난 일에 비하면, 알면 알수록,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할수록, 오늘 우리의 소소한 일상의 고달픔은 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일어나 걷고 뛰고 정상인이 되었다 한들? 돈 문제가 해결되고 사업이 잘 풀려 대박이 났다고 한들? 그 일로 끝이 아니다.
그러니 유한한 이 땅에서의 일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자. 그것으로 다 해결이 됐다고 여기지 말자. 산 넘어 산이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은 숱한 문제와 문제가 거듭될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기도하고 응답받는 일은 그저 사사로운 일이다. 물론 이를 어찌, 먹고 사는 문제가 사사로울 수 있겠나? 병든 자가 고통에서 놓여나고, 시름하며 고통 중에 있던 문제에서 해결되는 것이 어찌 별 거 아닐 수가 있겠나? 그러나 우린 그 모든 것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면서, 그 일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린 우리 문제로 애통해하다 주의 뜻을 구하고, 주의 뜻에 합하면서 더는 내 문제보다 이를 ‘알지 못하는 이’의 절규와 고통을 더욱 안타까워하게 된다. 중보기도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20).” 그러든가 말든가 내버려둘 수 없다.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게 된다. 그게 우리의 기도이고 그게 우리의 섬김이다.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저의 대속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더욱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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