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수아 2:11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편 74:16-17
누가 어떤지, 왜 그러한지, 그걸 핑계로 자신의 불순종을 합리화할 수 없다. 누가 어떠하든, 왜 그러하든,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곧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럼 지옥에 갔는지 그래도 천국에 갔는지 우린 알 수 없다(행 5:1-11). 다만 하나님께서 일찍 죽이신 것만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성문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마흔 살 된 앉은뱅이는 누구 때문인지, 어떤 이유 때문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저를 그리 병든 자로 두신 것은 분명하다(3장).
이를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 어째서 그런지는 분명하여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못할 때,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일이 된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28-29).” 그래서 저를 ‘병든 자’로 또는 ‘잠든 자’로 두실 수 있다. 이를 또 모든 병든 자로 죽은 자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다만 성경은 분명하게 일러 죽여서라도 살리시는 게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31-32).” 나는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삶 가운데 적용하여 자신의 일상에서 씹고 음미하고 부대끼며 삼켜 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 복되다. 자신을 살펴 주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지혜인지 오늘 말씀에서 기생 라합은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저의 말로는 그리 알고 느끼는 게 저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알면서 그러는 데는 별 수 없는 노릇인가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그 생각이 허망한 데 있고 미련한 데 마음을 두어서 그러하다. 그래서 누구에겐 불편하고 누구에겐 미련한 소리로 들릴 따름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이제는 이와 같이 들리고 보이는 것보다 값진 은총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마치 교회에 두신 경고 표지판 같다. 때가 되기 전에 죽일 수도 있고, 그저 그 곁에서도 병든 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15:34).” 다들 하나님을 안다 하지만 이에 행동하였던 이는 천하디 천한 기생 신분의 라합이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알면서도 앎으로 그쳐 더는 실천이 없을 때, 저는 ‘죽은 믿음’이라. 그것으로도 천국에 갈 수 있을지 지옥에 가야 하는지, 사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알면서도 완고하거나 태평하거나, 안달하거나 안이하거나!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수 2:9-10).” 이미 수천 년을 지나오면서 다들 들어 알고 있을 터이고, 어떠하든 교회가 여전히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있음을 안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큰 모순은 일반화시킴으로 자신의 특별한 앎을 사사로이 치부하여 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모일 때 보이지 않는 능력이 함께 하신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산이 진동하고 불길이 타오르고 연기가 자욱하였던 불가사의한 일처럼(출 19장),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주의 역사는 엄연하였다. 가령 아버지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군이 회개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모두 날조된 것임을 이번 여행에서 손 목사의 유복자였던 저의 친아들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모두를 속이고 이로써 득을 보았던 것은 참으로 교묘하였다. 단지 저들의 거짓말로 모든 게 날조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 교회가 확대 재생산하여 보다 극적인 이야기를 꾸며내어 그리 된 것이다.
종종 나는 사람들의 치졸하고 악랄함에 놀랍기만 하다. 왜 성경 말씀 외에 아무런 것도 남기지 않으셨는가, 알 것 같다. 가시 면류관을 신격화하고 입고 계셨던 옷을 추앙하는 따위의 숭배를 경계하신 것이다. 실제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는 나의 마음도 참담하게 하였다. 그 누이가 그리 꾸며낸 것인데 그게 또 처음부터 그러려고 그러했겠나? 한두 마디 덧붙인 것이 삽시간에 덧대어져 미화되고 부풀려져 걷잡을 수 없이 우상화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은 사건에 정신이 팔렸고, 두 부부가 부지불식간에 죽었다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다. 왜 그러했는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찌 그 이야기를 다루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실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는 것보다 무엇을 하였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우리에게 성경은 일갈한다. 무슨 일을 벌였든, 어떤 일이 일어났든, 이 모든 것은 다만 스쳐지나갈 따름이다. 영원한 게 아니다. 임시적인 일일 뿐이다. 중요한 건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래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롬 5:3-4). 철은 두드릴수록 단단해지고 금은 담금질에 비례하여 정금이 되는 것처럼, 연단은 우리의 인격이다. 인격적인 하나님과 대면하는 우리의 얼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고, 멀쩡하던 부부가 같은 날에 같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소식이 아니다. 그러하기까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영광의 중한 것을 위해 보이는 이 땅의 경한 것들에 너무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되겠다! 아버지와 주일 날 아침 식탁에서 들은 애양원 교회의 손양원 목사를 둘러싼 왜곡과 허울 좋은 이야기에서 얻은 결론이다.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로 얻게 하시려고, 그 우리에게 이루시는 그 귀하고 귀한 주의 사역에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이들에 대하여는 안타까워는 하되 끌려 다니지는 말고, 마음은 두되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좀 이제 마음을 편하게 먹어! 하고 나의 늙으신 아버지는 골골하는 자식을 두고 염려하였다.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감사한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저가 통치하신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우리에겐 중생이 증거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더는 과거의 죄로 염려하지 않는다. 미래의 것으로 불안해하지 않고 오늘의 일로 서둘지 않는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미래는 다가올 오늘이며, 오늘은 오늘의 오늘이다.’ 우리는 날마다 오늘에 산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모두 주의 것이라.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어쩔 것인가?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19-20).”
이런저런 사연들이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이는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나는 오늘 말씀을 되뇌며 안도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19).” 이에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22).” 이 모두는 주의 것입니다. 낮도 밤도 주의 것이고,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다.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셨고고,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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