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전봉석 2019. 5. 21. 06:55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여호수아 3:14-15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편 75:7

 

 

종종 믿음의 길은 무모하다. 논리적이지 못하고 이치가 닿지 않는다. 요단을 가르시고 건너라 하시면 좋을 텐데, 먼저 늘 딛고 서라는 데서 우리는 황당할 뿐이다.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그냥 그런 시기가 아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넘실대는 게 두려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3:14-15). 말씀을 그대로 따라가며 읽는 것만으로 놀랍다.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16).” 그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준행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17).” 이와 같은 기적을 날마다 매순간 경험하며 사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을 웃어넘길 줄 안다. 어떤 문제에 함몰되지 않는다.

 

모처럼 딸애가 직장을 쉬어 며칠 전부터 계획을 세운 게 있었다. 운전연습도 할 겸 대부도에 가서 봄바람 좀 쐬고 오자는 거였다. 평일 월요일이라 길이 한산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디쯤에서 공사 중이었고 꽉 막힌 도로 위에 차들이 뒤엉겨 혼잡하였다. 순간 숨이 가쁘고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초보 운전이라 딸애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 했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무모하게 차를 돌려 그 길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식은땀이 나고 무서움에서 놓여나자 민망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였다. 그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딸애에게 다시 운전대를 맡기고, 덕분에 인천 시내를 주행하였다. 송도 신도시를 돌아보고 구 도로를 관통하여 동인천으로 해서 차이나타운을 지나 월미도까지 갔다.

 

간헐적으로 두려움을 느꼈고 그때마다 할 말을 생각하였다. 이번 주간에 아이엄마와 통화를 하게 되면 지난 토요일부터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같은 불안장애를 겪으면서 저와 나의 차이는 그러면서도 나는 자꾸 부딪쳐서 깨지고 또 무너지지만 당면한다는 것이고 저이는 집에 있어 예기불안으로 잠식당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를 말해주고 싶었다. 왜 내 곁에 나 같은 사람들을 붙이시는가, 생각해보면 그게 곧 하나님의 전략이 아닐까? 내가 어찌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겠나? 다만 징징거리면서도 발을 내딛어 요단을 밟는다. 늘 그때마다 좀 나아지는 게 아니라 더 큰 물살이 넘실거려 내딛기 전까지는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놓인다. 하지만 한 발 딛고 다른 발을 내딛을 즈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게 느껴진다. 그 일의 의미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게 하신 게 때론 감사하기도 하다. 고통스러운 만큼 섬세한 손길이었다.

 

종종 나는 나로 사는 게 힘들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실은 그래서 더 내밀하신 주의 손길을 느낀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나는 나의 무모함과 가련함을 사랑한다. 그것으로 깨어있게 하신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15:34).” 내 곁에 두시는 안 믿는 저이의 불안장애나 사회적으로 자꾸 거론이 되는 조현병이나 그 외에 자신만 모르고 있는,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는이상한 세상을 향해 마주서게 하신다. 내게 두신 이런저런 어려움이 도리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다.

 

힘들어? 하고 딸애가 물을 때 나는 솔직하게 얘기하였다. 이러고 나면 할 말이 내 안에 많아진다. 누구 엄마와 통화할 때도 들려주고 싶고 아이에게도 말하여주고 싶은, ‘전도의 미련한 것을 몸소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처럼 좋은 소풍이었다. 바람은 거세게 불었으나 공기는 맑았다. 아내의 발랄한 성품이 나의 모난 성품을 위로하며 격려하였다. 나는 나의 하루 중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몸으로 새겨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9:16).”

 

이는 누구도 자기 수고와 희생과 헌신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나의 연약함으로 주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체험하여 나의 하루는 날마다 꽉 찬다. 늦은 저녁에 동기들 단톡방에 여러 장의 동영상과 사연이 올라왔다. 모교 교단의 노회장에서 벌어지는 기고만장한 싸움질이었다. 나는 저들의 신념과 나름의 가치에서 한 발 물러서서 걸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을 하였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17).” 바로도 들어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신다! 이는 주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기 위함이지 저의 노고와 수고를 기리는 게 아니다. 정치적인 목회나 신앙은 그만큼 두렵고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 종종 기독교인임을 운운하며 정치 일선에서 이를 악용하고 저를 지지하는 서로의 아둔함에서 나는 한 발짝 물러서 있는 것으로도 큰 축복이란 생각을 하였다. 지난주일 복도에서 마주친 목사 내외는 여러 명의 목회자와 나를 인사시켰다. 같이 주일 예배를 드리고 합동하여 네다섯 교회가 동조하여 주의 일을 도모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무 지나친 일꾼 소모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으로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시었다. 내년 총선에서 어느 당 국회의원 수 200명을 목표로 웬 보수 측 원로 목사의 지지와 호응이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런저런 일련의 상황들을 보며 그것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게 하는 나의 육신의 연약함과 가난함과 비루함과 별 볼일 없음을 감사하였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또는 완악하게도 하신다. 저가 목표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 일의 궁극적인 목표가 다른 데 있었다. 왜 거듭나야 하겠다고 먼저 말씀하시는 지 알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거듭남이란 구호나 어떤 신비적인 마술이 아니다. 실전이다. 날마다 더해지는 은총의 장이다. 누구는 단회적이라 하고 누구는 연속적이라 하지만 이 둘은 떨어뜨릴 수 없는 하나다. 나 자신을 단회적으로 살 수 없듯이 지속적으로 둔갑할 수도 없다. 둘 다 가능해야 하면서 둘 다 불가능한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다. 그뿐이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곧 우리의 생사화복이 다 주의 것이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30:15).” 과연 어쩔 것인가? 그 어쩔 수 있음이 긍휼하심이고 어쩔 수 없음도 긍휼하심이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19-20).”

 

다만 우리는 매순간 하루하루 가운데서 선택에 놓이는 것이다. 번번이 또 당하면서도, 그 두려움에 온 몸이 발광을 하고 발악을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것인가?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만 한다. 그 조금이 전부를 이끈다. 나의 보잘것없는 존재의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충분하였다. 그 일이 주의 것이다. 나의 정치적인 신념도 목회철학도 무슨 대단한 연합과 성과도 아니었다. 다마 여기, 나의 하루하루 가운데서 나는 오늘도 오늘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고 의지할 따름인 것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이에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75: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