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사사기 3:10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편 99:9
지갑에 십만 원이 있었다. 누가 준 것이다. 아이는 ‘골 전도 이어폰’이 갖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왠지 안 좋을 거 같았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뭐라 설득을 해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참 실랑이 끝에 다른 이어폰을 하나 사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같이 문구점으로 내려가 그 기분을 맞춰주고, 점심을 먹고 아이는 돌아갔다. 누구는 ‘아픈 아이’라서 그렇다며 혀를 끌끌 찼다. 한데 나는 그것이 죄의 근성임을 보았다. 서로 다를 게 없었다. 없을 땐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다가도 뭐가 생기면 환장을 하는 것이 바로 나였다. 내남없이 그런다. 우리 안에 있는 일이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
세상으로 우리의 성품이 영향을 받는다. 세상은 우리로부터 영향을 받고, 미루고 회피하고 묵인하면 그곳은 지옥 같아진다. 사역이란 맡기신 그 자리에서 주어진 그 일을 감내하는 것이다. 새삼 무엇이 주어져서 독특하고 남다른 생을 사는 게 아니다. 다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아이와 같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저를 다독이었다. 곧이어 초딩 아이들이 왔을 때도,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파하지 않았다.’ 즉흥적이고 무력감에 젖어 어기적거리며 흥밋거리만 찾았다. 손에서 핸드폰 게임을 놓지 못했고 뭐라 하면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이를 또 아이들이니까 그런다고 할까?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니다. 다들 안다. 알면서도 그런다. 주체할 길이 없는 것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숱한 요인들이 또 주변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마치 그래도 되는 것처럼 부추기는 것이다. 애고 어른이고,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런즉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의 본래 근성이 그러한 것을 생각하였다. 하여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일 것이나 삶을 다하는 게 사명이었다. 우리는 깨어 노래해야 한다. 거기가 비록 티끌 위라 해도,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 99:9).” 오늘 말씀은 그 중심을 잡아주신다. 핵심은 오늘이다. 지금인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일이다. 나는 도저히 아이를 감당할 수 없다. 나는 두렵다. 그래서 중딩 아이들을 회피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자리를 피한다. 설득하고 붙들어서 될 일이 아닌 지점에서 나는 항상 주춤거리며 주를 바란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늘어간다. 영적인 세계란 그리 고상한 게 아니었다. 부대끼는 게 많아졌다. 온통 싸움이다.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없어 속에 얹힌 듯 볶인다.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지만 나의 무력함만 실감할 뿐이다.
다른 수가 없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곧 우리에게 중요한 핵심은 영생이 아니라 부활이다. ‘부활을 사는 일’이다. 거듭나야하겠다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전 15:21).” 나는 이제 누가 무엇을 도모하고 어떤 일을 꿈꾸며, 그것을 사명이라 주장하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안 되고 저기서는 되는 주의 일이란 없다. 저기서 될 일이면 여기서도 된다. 여기서 안 될 거면 저기서도 안 된다. 그런데 우린 종종 여기만 아니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멀리 날아가고 싶은 것이다. 새로운 것을 꿈꾼다.
부활은 다시 사는 것이다. 그대로 여기인데 전혀 다른 여기다. 똑같은 일인데 완전히 새로운 일이다. 누구와 통화하다 말해주었다. 주의 일이란 그 자리에서이다. 늘 우리의 그날은 ‘그날’이다.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사 25:9).” 이 몸을 가지고, 이런 아이들과 함께,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날이다. 이성복 시인의 <그날>은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었다.’ 우리의 일상이다. 아픔을 모르고 눈뜬장님으로 사는 청맹과니의 시절이다. 나는 저 아이들을 어찌할 길이 없다. 그런데 문득 어찌하려 드는 내 마음이 죄였다는 사실.
다만 신뢰함이라!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26:3).” 묵묵히 무던할 수 있는 게 신앙이고 사역이고 믿음이며 주의 길이었다. 뭔가 대단한 비전으로 설치고 나대고 일을 꾸며 어떤 역사를 도모하는 게 아니었다. 주가 하신다. 주가 다 아신다. ‘그날’의 나를 아시고, 그 사정과 형편을 누구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럼에도 내가 오늘, ‘그날’을 살고 있는 것이면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주를 신뢰함.’ 내 수고와 노력도 아니고, 어떤 가치와 이상도 아니고, 무던하여 심지가 견고한 자로,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그날’, 부활을 사는 것이다. 바로 그 사역이라 함은 하나님과의 화목인 것이다.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찔레와 가시가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와 화친할 것이니라(27:4-5).” 내 주와 화친하는 삶이 가장 복되었다. 숨이 가쁘고 어떤 불안이 엄습하고 금세 호흡이 끊어질 것 같은 불안을 느끼면서, 누구는 공황이라 하고, 누구는 기형적인 몸뚱이 때문이라 하고, 또 누구는 아이 때문에 자꾸 신경을 써서 그렇다고 하고, 누구는 운동을 안 해서 그렇다고 하고, 설왕설래 말이 난무하여 어지러운 중에도 그것으로 나는 주와 화친한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28:11).”
나의 말은 어줍고 그 역할은 별 볼 일 없는 것이겠으나 이처럼 또 다시 주신 할 날을 무던히 주를 바라며 살아가는 것. 내가 사역자임을 준거하는 것은 저 한 영혼을 붙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씨름하는 일이다. 내 코가 석 자고,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해 힘에 겨우면서도, 그날에 내게 그리 두시는 이를 신뢰함이란 그러므로 사는 것이다. 주와 화친하며 주만을 의뢰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두시는 것이 바로 이 삶이지 무슨 대단한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이나 결과가 아니다. 곧 나의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1:17).”
그래서 나는 깊은 숨을 몰아쉬며 오늘도 산다. 그러할 때,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나가서 싸울 때에,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이기니라(삿 3:10).” 오늘 말씀을 그리 듣는다. 그 중심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 잠자코 주만 바라는 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사 30:18).” 곧 ‘그날’을 무던히 사는 일상이 신앙이고, 신앙이란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러할 때 오늘의 고통이 실은 그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오늘도 하루를 살아드리는 일이 순종이었다. 이에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임을.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19).” 때론 도망치고 싶고 다 그만두고 싶을 때, “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 하듯이 노래할 것이며 피리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가는 자 같이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29).” 이내 우리에겐 ‘예와 아멘’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하여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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