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사사기 2:3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시편 98:3
존 번연의 <죄인들의 우두머리에게 내린 넘치는 은혜>를 읽다가 그게 다 내 얘기여서 부끄럽고 놀라웠다. 죄에 대해 동경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따르고 원하고 부러워하던 시절이 손에 쥘 듯 가까운 과거였다는 데 끔찍했다. 이제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라는 성경의 고백이 곧 내 것이 되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가슴부터 절절하여 송구하였고 그 생각이 나의 행동을 이끄는 것 같아 감사하였다.
그러니 나는 이제 어찌 행할 것인가?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 그저 막연하여 좋은 구절로써 추상적인 말씀이란 없다.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나의 지난날을 조명하며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면서 어찌 행하여 누구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떠올리며 중보하게 하신다.
곧 내가 행하였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며 주의 신실하심 앞에 끌어올려 용서를 구하고, 저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게 하시는 것이다. 내 안의 하나님은 그렇듯 나의 의지와 싸우신다. 가령 언제 누구에게 무슨 일을 행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때마다 용서를 구하며 회개한다. 그리고 저를 위해 기도한다. 이는 단순히 죄책으로 시달리는 것과는 다르다. 곧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을 때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과 괜찮다고 여겼던 일들로부터 자유하다. 그때 그 사람, 그 일, 그러한 죄의 망각에서 나를 일깨워 생각나게 하시고 부끄러움으로 치를 떨며 회개하고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처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곧 주가 원하심은 나의 상한 심령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내가 주 앞에 거하는 한 가지,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좀체 해결이 되지도 않을 문제들 앞에서 덤덤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이끄시는 하나의 증거는 오늘의 나로 감사하며 주를 바라는 것이었으니, 저 아이 하나로도 천하를 얻은 것보다 귀히 여기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그처럼 아귀가 딱 맞물려 있었다. 아이가 점심을 같이 먹고 돌아갔다. 조금 뒤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복지관으로 가야 하는데 직업훈련소로 갔다며, 지금 거기가 어딘데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통화를 하면서 ‘길찾기’를 보며 어디로 돌아가 몇 번 출구에서 무슨 버스를 타야하는지, 진땀을 흘리며 아이가 무사히 도착한 후에야 안도하는.
때론 우리의 일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 같은 하나님의 진행 속도에 어리둥절하다. 그러니까 내가 소중히 여기던 것을 잃어버리게 하시고, 친한 벗을 멀리하게 하시며, 여럿이 어울려 함께 이루려고 했던 일을 흩으신다. 건강을 빼앗으시고, 나의 열심을 주저앉히실 땐 공허감이 밀려오고 외로움에 시달리면서 과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맞나? 회의가 밀려드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기다려보면 그 자리에 하나님 자신을 두시는 것이다. 내가 이루고 다져서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하나님께 가려던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는 하나님이 내 곁에 머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5).” 이를 알게 하시려고 나의 이상과 목표를 꺾으시고 내가 주장하고 옳다고 붙들던 것을 분질러버리시는 것이다.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하는 고백이 비로소 내 것이 되게 하시었다. 곧 내가 저 아이를 위하고 사랑하며 헌신하는 것 같았는데 실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이 나를 위하고 사랑하며 참고 또 기다리셨는가를 깨닫게 하시는 일이었다. 나의 열심이 하나님의 생각에서 어긋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이를 오늘 말씀은 일찍이 증거하였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삿 2:2).” 마치 이를 선이라 여겨 사람 중심의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3).”
같이 애굽에서 묻어나왔던 잡족들에 의해 저들의 길은 고달팠다. 함께 약속의 땅으로 떠난 조카 롯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시달렸다. 그렇듯 타당하고 합리적인 줄 알았던 이스마엘로 인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를 않는 것이다. 한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바라고 원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차단하고 못하게 가로막는 하나님의 일처리가 못마땅하였다. 죽고 못 살 것 같던 친구들이 나를 멀리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말하고 듣기를 좋아하던 사이였는데 더는 할 말이 없게 만들어버리셨다! 그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하는 자리였다. 아이가 무사히 복지관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안도하며 어떤 서러움이 감사의 마음으로 바뀌는 것에 놀라웠다. 족한 것이다. 감사였다.
오후께 아버지와 통화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말씀드리자 그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설명하셨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내게 더하신 오늘의 어려움이 값진 거였다. 빛도 없이 한 아이로 쩔쩔매는 이 일이 벅찬 수고였다. 내게 두신 연약한 몸뚱이를 이끌고 묵묵히 준행하는 오늘 하루의 일과가 헌신이었다. 결국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열심이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결국 내가 하는 게 사역이 아니다. 내가 사는 게 인생이 아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열심은 내 안에 가만있을 수 없는 넘쳐나는 주의 사랑이다. 자꾸 저 애로 인해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고 위해 기도하는 일. 지난 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죄악으로 부끄러워하며 통회하고 자복하는 일. 그리하여 그때 그 사람을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위하여 기도하는 일. 그러니 나쁜 위정자는 나쁜 유권자들 몫이다. 막말하는 정치인은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부끄러움이다. 세상이 이 모양인 것은 기도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사 10:12).” 이를 이제 두려워 떨며 주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심이 은총이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날도 내가 준비해서 얻어진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13:6).”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더는 구할 수도 없는, 하나님도 어찌 더는 손 쓰실 수 없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그리하여 엄중한 경고,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이와 같은 말씀으로 이끄시는 게 은혜였다. 결국 경건하게 살면서 세상에서 형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상에서 바라고 꿈꾸는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기독교인은 없다. 불가능하고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여 나의 오늘 하루가 은총인 것이다. 이와 같이 찌질하고 구차하고 비루하여 남루하며 별 볼일 없는 위인으로 살아가면서도 묵묵히 주만 바라고 하나님으로만 채워져 가는 하루하루가 복이었다. 이에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시 98:3).” 곧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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