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5 주일
사도행전 8: 26-40, 겔 36:31
스스로 밉게 보리라
사도행전
8: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8: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8: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8: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8: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8: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8: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8:37 (없음)
8: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베풀고
8: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8: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에스겔
36: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
들어가는 말
1.
하나님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요즘 묵상하는 사무엘하 16장에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한다. 저를 따르며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조롱하고 욕한다. 그럼에도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신뢰다. 욥도 그리 고백하였다.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의뢰하겠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종종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당혹스럽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내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이룬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또한 ‘내 뜻대로 행할 것이다.’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럴 때 우리 중에 하나님을 막아서고 왜 그러시냐? 하고 물을 수 없다.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단 4:35).
오늘 말씀도 당혹스럽다. 본문 26절은 우리 안에 내적갈등을 유발한다. ‘가라’ 하시는데 ‘그 길은 광야라.’ 누구도 원치 않은 길이다. 그러니 어쩐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로서는 이치와 상식을 따질 것인지 앞서 다윗과 같이 또는 욥과 같이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지! 욥은 하나님을 뵙기 전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친구들과 끝까지 논쟁하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다윗도,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2.
말씀과 달리 세상을 보면 우리에겐 절망뿐이다. 저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만 사는 것 같다. 시편 73편에서,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 정말 저들은 잘만 산다. 모든 게 형통한 것 같다. 이어지는 말씀이 내내 그러다, 시인은 비로소 주 앞에 선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 그 전까지는 우리도 세상을 부러워했다. 누가 어찌 성공하였고, 노년에 어찌 호강을 누리며, 자식들이 번창하였고, 모두가 무병장수함에 대하여, 그저 그게 복인 줄 알았다. 그러다 하나님 앞에 서면,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었습니다(22), 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다. 지금 와 돌아보니 나의 삶이 언제나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3).” 그 지나온 날들에 대하여,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스스로 밉게 보이는’ 것이다(겔 36:31).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곧 이는 만국의 공통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다. 교회를 다니고, 열심으로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다! 가령 가룟인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반이나 지근거리에서 따랐고, 믿었고, 섬겼으며, 함께 했다. 그러나 그의 결국은 스스로 목을 매는 것이었다. 그처럼 자신만만하였던 베드로가 결국 예수 앞에 섰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하는 고백이 저절로 나왔다. 그럼 왜 누구는 파선하고, 배교하여, 끝내는 주를 떠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안의 ‘마술사 시몬’ 때문이다. 저는 누구인가? 그럼 그런 나를 왜 하나님은 내버려두시는 것일까? 그래서 ‘주의 섭리’에 대해 분명히 알자. 우리의 공통된 자세는, ‘스스로를 밉게 보리라.’
1. 우리 안의 마술사 시몬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행 9-10).”
저마다 자기 방도를 재능으로 삼고 산다. 그 재능은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한다. 우리는 각자의 종교심을 자부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예배를 운운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곧 저마다 자신의 이해와 상식을 기준으로 살아간다. 성경은 이를 엄히 경계하셨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즉 우리 안의 ‘마술사 시몬’은 ‘전부터’ 있었다. ‘자칭 큰 자’다. 사람들도 ‘이를 따르며 큰 자라’ 하고 저를 인정하였다. 저의 특징은 ‘오랫동안’ 그러하였고, 사람들은 당연히 저를 따랐다(행 8:11-12).
얼마 전에 누가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물었던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을 내게 건네며, ‘개신교 목사로서’의 답을 부탁하였다. 나는 답을 적고 그러한 숱한 질문이 도리어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일 수도 있다고 저에게 덧붙였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게 결코 아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0-11).” 한데 이를 어리석게 여겨, 스스로 옳다하고 열심을 다해 성취하는 구원을 이루려, ‘마술사 시몬’이 우리 안에 기질처럼 배여 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 8:13-14).” 다시 말해 우리는 듣고, 놀라고, 이를 은혜라 여기며 열심을 다해 산다. 그런 누군가를 따랐다. 구원의 값을 스스로 물려하듯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18-19).”
정작 두려운 것은 우리의 열심이다. 이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경우에는 그렇다. 저가 돈을 드려 성령을 사려 했다. 자신의 헌신으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 것이다. 종교란 그런 것이다. 종교적이라 하면 모두 그런 것이다. 애써 신을 찾는 구도자의 삶을 요구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었고, 저가 우리를 택정하셨고, 창세전에 이미 구원하셨다(엡 1:4-5). 구원은 우리가 이룬 게 아니다. 우리 안의 ‘마술사 시몬’은 이를 못미더워한다. 그래서 ‘돈을 드려’ 뭔가 값을 더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마리아와 성인들을 숭배하고, 그림과 형상과 모양을 숭상한다. 그 앞에 절하고 각자의 구원을 모색한다. 베드로는 훗날에 엄연히 경고하였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그런데 세상적으로 보면 저들의 종교성이 훨씬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타당하고 훨씬 선하다. 의롭고, 사회에 공헌하는 바가 크다. 나아가 자신들의 선행으로 이미 죽은 자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길 수 있다고 여긴다. 정말 멋지고 신나는 일 같다. 그런데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정작 우리 안에 하나님과 단절된 마음이 ‘마술사 시몬’의 열심이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구원은 결코 우리와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는 그 구원에 있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일갈한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 6:21).”
하나님 없이 살던 때를 돌아보자. 아니, 나름 열심을 다해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며 그것으로 축복의 근거로 삼으려 하고, 구원의 때를 기다렸던 것을 생각해보자.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즉 우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자부하고, ‘내가 이만큼 열심히 살았으면 됐지?’ 하는 마음과 ‘하나님도 나의 수고와 애씀을 알아주실 거야!’ 하는 마음이 여전하다면 내 안의 ‘마술사 시몬’이다. 예수님은 엄히 경고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 결과로는,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베드로는 마술사 시몬에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2. 하나님의 섭리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행 8:26).”
이제 하나님의 명령이 새롭게 와 닿는다. 종종 황당하던 것이 묵묵히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믿음으로 노아는 무려 120년이나 방주를 지었다. 느닷없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하실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순종으로 나아갔다. 졸지에 살인자가 된 모세는 애굽에서 쫓겨나 미디안 광야에서 때를 기다렸다. 가라, 하실 때 ‘그 길은 광야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이제 일어나 가서 보니” 거기에는 우리가 필요한 사람,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27-28).”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제대로 축약하고 있는 대목이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저는 이방 사람에게 나아갔다. 뭉그적거리지 않았다. “빌립이 달려가서” 주의 뜻을 따랐다(29-30).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신하가 성경을 펼쳐 그 내용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31).”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다. 그렇다면 이를 열어 읽을 때도 성령의 감동이 함께 하셔야 한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간다게의 내시가 빌립에게 물었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33-34).”
이때에 우리는 말해주어야 한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5).” 그러할 때 서로에게 기쁨이 더하였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39).” 보면 우리의 대화란, 성경공부란, 서로의 방문이란 기쁨이 그 증거가 된다. 기쁘게 서로는 그 길을 갔다. 각각 처한 상황과 현실을 성령으로 나아간다. 이제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시 92:14).” 우리의 이런 모습은 세상의 이치와 다르다. 저들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6:8-10).”
3. 스스로 밉게 보리라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이렇듯 우리는 주 앞에 설 때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곧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0-131).” 이처럼 성경은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겔 36:25).” 우리로 먼저 정결하게 하신다. 우리 마음을 새로 경작하시는 일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는 곧 거듭남이다.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고 끝나는 구원은 없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곧 우리의 완악하고 완고하였던 마음을 갈아엎으신다. 이는 우리의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27).” 그러기까지 우리가 어찌 환난을 즐거워할 수 있겠나? 어렵고 힘든 현실을 우리 스스로 감사할 수 있겠나? 그런데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곧 우리 믿음을 분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리트머스종이는 지난 날 자신을 ‘스스로 밉게 보리라.’ 더는 할 말이 없다. 내세울 게 없다! 그래서 절규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하여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나오는 말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우리는 ‘돌아온 탕자’와 같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였다. 그래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천국을 소유한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 주의 위로를 받는다. 우리의 ‘온유’함은 주신 날에 다만 충성할 따름이고, 그리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면서 날마다 충만한 은혜를 누린다. ‘긍휼히 여김’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 이제는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을 뵈올 때 우리는 스스로 지나온 모든 날들을 스스로 밉게 본다. 결코 옳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 우리는 이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로도 족한 줄을 안다. 왜냐하면 천국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마 5:3-12).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오늘 우리가 아직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분명한 이유다. 이를 세상은 더디다 하고, 외면하며, 오히려 한심하게 여길 뿐이지만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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