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8 주일
행 11:17, 히 3:12-14
같은 선물
사도행전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히브리서
3: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 단도직입적으로 시작하자. 우리의 인내는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가 아니다. 구원의 수단도 아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7).” 오늘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교회 앞에 고넬로에게 복음을 전한 경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증거하는 표현이다. 곧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에게도 주셨다. 그럼 그 ‘믿을 때에 주신 것’이 무엇일까? 이를 ‘우리가 시작할 때에 가진 확신’으로 연관지어보면 훨씬 그 의미는 뚜렷해진다. 곧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곧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어야 하는 우리의 믿음의 인내다. 이를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2. 우리의 인내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것이라 하면, ‘믿을 때에 주신 것’으로 우리 안에 두시는 그 ‘은혜의 확신’ 때문에 생겨나는 능력이다.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없고, 아무런 증거도 없다 해도,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길을 떠난 아브라함과 같은, 바로 그 ‘같은 선물’이 믿음이다. 이는 모든 믿는 자의 공통된 ‘같은 선물’이면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이다. 즉 동일하게 우리 안에 행하시는 ‘착한 일’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여기서 ‘착한 일’은 단순히 우리가 이해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덕목이 아니다. 그 주체, 근본, 본질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시작하신 이가 따로 있다. 우리가 한 게 아니다.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그렇다면 우리 안에 이 일을 시작하신 이가 있고, 이를 이루시는 것이 우리 개인의 수고함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3. 하나님은 왜 그럼 우리 안에 이 일을 시작하신 것일까?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 곧 그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시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 그 하나님은 미쁘시다. 거짓이 없으시다. 이 일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어쩌다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즉 미리 정하셨고, 부르셨고, 의롭다고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택하시고 예정하신 일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그러니까 어쩌다 처음 사람이 타락하여 죄를 짓고, 그 필요에 의한 자구책으로 부랴부랴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를 극적으로 타당하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정죄하신 게 아니다.
4. 그럼 우리는 그저 수동적으로 구원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로 삼으시려고, 하나님은 인내하셨고, 오늘 우리 안에도 그와 같은 인내를 넣어주셨다. 그러니까 그 사랑은 끝이 난 게 아니라 영원히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그 증표로 예수의 보혈의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그래서 오늘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곧 우리의 인내는 산 소망을 알게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5. 그러므로 우리의 안일함은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한다. 늘 볶이고 정신없이 사는 것 같지만, 우리의 환난이 우리로 인내를 알게 한다. 우리의 인내는 연단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인격’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이다. 곧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이다. 그땐 미처 몰랐었다 해도 우리의 연단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게 한다. 마치 갓난아이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도, 그래서 그 생을 어찌 이루어가야 하는지 알지 못할 때에도, 분명히 그 안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음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점진적으로 소망을 알아가는 것이다. 곧 이는 이미 ‘믿을 때에 주신 것’이다. 곧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인내한다. 우리의 인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이를 즐거워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그 영광은 우리의 인내의 찬송이다.
6. 그렇다면 일찍이 이 인내를 버리고 ‘우리에게서 나간 자’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어릴 때 믿었다가 어른이 되어서 믿지 않는 경우는 무엇일까? 엄연히 저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자이었거나 탕자와 같이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이는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끝내 믿음의 인내를 포기할 수 없다는 소리다. 즉 믿다가 그만두는 믿음은 없다. 저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가 아니었다. 가룟 유다나 가인이나 사울 왕이 그러하겠다. 저들이 처음에는 어떠했는지, 얼마나 열심이고 희생적으로 참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신념을 믿음으로 여기고, 그 확신으로 얼마든지 종교적인 사람으로 살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참여한 자’가 아니면 어림없다. 저들에겐 믿음의 인내가 없다.
7. 그러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즉 왜 우리를 서로에게 두셨는지 알아야 한다. 결혼이 왜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자녀들을 주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며,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어떠해야 하는지, 오늘 날 교회 공동체가 무엇을 서로 감당해야 하는지, 이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 그러기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피차 권면하고, 위하고,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인해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붙들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즉 우리가 허용하는 작은 틈새로 죄악은 스며든다. ‘그게 왜 나빠?’ 하고 여기던 가벼움으로부터 우리는 좌초당한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야 한다. 이는 우리가 ‘끝까지 견고히’ 붙들어야 할 인내이다. 즉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이다. 이를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8. 한데 도중에 믿음을 저버리는 경우가 너무 허다하다. 들어보면 다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또는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래서 말씀은 경계하신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12).” 서로가 안일하게 굴던 것으로부터 공격당한다.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그러니 우리가 더욱 주를 바라고 섬길 때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우리는 애통하는 것이다. 안 믿는 가정에서 홀로 믿음을 지킨다는 것, 어디 직장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하며 믿음을 지킨다는 것, 공직자로 살면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 이는 마치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는 일처럼 어려움이 겹치는 일이다. 그러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바로 그때 우리 안에 주의 영이 우리들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시는 것이다.
9. 결국 말세의 때에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10).” 그럼 우리는 어쩔 것인가? 오늘 말씀은 그러므로 인내를 요구하신다(히 3:12).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으로 인내하여 완주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하는 것이다(13). 이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 즉 중도에 포기하고 곁길로 간 사람이나, 여전히 몸담고 있으면서 전혀 다른 복음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나, 다들 나름의 주장을 내세울 테지만 우리는 결코 보이는 소망을 붙든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6:19).” 이 소망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 안의 인내는 우리가 견뎌야하는 수단이 아니다. 이럴 때 우리의 믿음이 요구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10. 결코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신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러는 동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오늘 우리는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 우리들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신다. 이는 우리 안의 주의 영이 하시는 일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이는 오직 주만이 하실 일이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맺는 말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7).” 오직 주만 바라자.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주님은 우리를 돌보신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확연히 다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고로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때에 가진 확신’과(행 11:17)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과(히 3:14) 우리 안에 시작하신 ‘착한 일’과(빌 1:6)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은(고전 1:8) ‘주가 미리 정하신’ 것으로(롬 8:30) ‘우리 안에 속한 자’들이(요일 2:19) ‘완고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히 3:13).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인내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의 영이 온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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