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6 주일
행 16:30-34, 눅 8:15
주 예수를 믿으라
사도행전
16: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16:33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침례를 받은 후
16: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들어가는 말
우리 모두는 죽는다. 셰익스피어가 말했다. ‘우리는 죽음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내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성경도 이를 증거하신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5).” 그러므로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 40:6-7).” 참으로 그러하지 아니한가. 차라리 풀과 꽃은 이듬해에 다시 피고 자라나나 인생은 죽음으로써 더는 인생이지 못하다. 그러므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8).” 곧 우리는 존귀하나 이를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죽음 앞에서
오늘 본문으로 우리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답을 얻으려 한다. 바울과 실라가 어느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다. 그 여종으로 돈벌이를 하던 자가 저들을 고소하였다. 저들은 끌려가 매를 맞고 옥에 갇혔다. 밤중에 기도할 때 지진이 일더니, 감옥 문이 열리고 감옥 안에 갇혔던 모든 사람들이 도망쳤다. 그러자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친 것을 알고 칼을 빼서 자살하려 했다. 이를 바울이 나서서 황급히 말렸다. 간수가 물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저는 지금 그런 상황에서 살 궁리를 하느라 물었는지도 모른다. 바울이 답을 주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동문서답 같은 말이다. 그럼에도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다. 그러자 간수가 저들의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그런 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였다.
구원에 대하여
구원은 말뜻 그대로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는 일이다. 이 땅에서의 모든 구원은 일시적이다. 저가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모두의 확실한 소유는 죽음이다. 누구도 남의 것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실제 우리는 영적인 존재인 것을 거듭 일깨운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은 없다. 믿든 안 믿든 우리는 영적인 존재라, 오히려 죽음으로 비로소 시작인 것이다. 믿는 우리는 죽음의 답을 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우리는 무(無)에서 와서 무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죽음은 본래 하나님이 정하신 게 아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죽음은 죄의 결과다. 왜 아담의 죄로 우리가 죽는가? 이 물음은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하는 물음과 맞물려 서로에게 답이 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곧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다. 그리고 명백한 사실이다. 죄를 가지고 우리는 태어났고, 믿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구원함을 받았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구원의 실제
곧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죽거나 영원히 산다. 영원한 죽음은 지옥이고 영원한 영생은 천국이다. 오늘 본문은 이를 알게 한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다른 길은 없다. 율법으로 우리는 죽었고, 예수의 보혈로 우리는 살았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그러므로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이와 같은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음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그리스도의 편지다.
인생을 어찌 살아야 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어찌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인생 지침서 또는 매뉴얼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 뒤 영생을 어찌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편지다. 하나님의 감정이 우리의 감정에 전달되어, 우리가 어찌 영생을 누릴 수 있는지를 알게 하신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그 믿겨지는 믿음으로 이 생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아무도 구원의 실제를 증명할 수는 없다. 나는 어떻게 선택 받은 것이며 주의 예정하심 가운데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는지,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이와 같은 경배와 찬송이 나의 기쁨이 되었는지를 누가 과연 설득력 있게 설명할 것인가?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 115:1).” 우리가 누릴 구원의 기쁨은 오직 이것이다.
구원의 열매
우리는 이제 근심하나 근심으로 주께 기도한다. 기도함으로 주의 위안이 우리 영혼을 즐겁게 하신다.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94:19).” 이를 추론해보면 첫째, 우리는 양심에 찔렸다. 말씀을 듣고 그것이 내 이야기로 가책이 느껴졌다. 이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그러자 그 대답은,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38).” 그런데 다른 하나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 결국 돌로 쳐 스데반을 죽였다. 그러므로 양심에 찔린다는 것은 그저 반성이나 후회가 아니라 회개와 죄 사함으로 이어지는 열매여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둘째, 우리의 찔림은 우리가 피조물인 것을 깨닫게 한다. 오늘 본문에서 간수처럼 우리는 질문하였다. ‘우리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때 그 답은 오로지, “주 예수를 믿으라.” 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1).” 셋째, 구원의 열매는 믿음으로 인내하고 인내함으로 소망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그러므로 우리는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구원의 수확
곧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전에도 살펴보았듯이 ‘좋은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시작하신, ‘착한 일’이 담긴 마음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그 착한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일이다.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졌다. 구원의 확신으로 열매를 이루며 산다. 그 열매는 여러 방면에서 수확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평강도 그 하나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안을 삼는 것도 그 하나이다. 이는 모두 구원이 자라가는 것이다.
첫째, 우리 영혼이 점점 더 강건하여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둘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10).” 더는 세상의 이치와 가치와 기준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셋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간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나오는 말
사람으로 사는 날 동안에는 그럼에도 우리는 시달린다. 어느 심리학자가 말하길,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계속 몰아붙이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또 그의 말에 동감한다. 우리는 얼마나 겉치레에 치중하며 사는가? 옷치레, 말치레, 표정치레 뿐 아니라 친절과 예의와 배려와 양보와 선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데서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힌다. 가령 모세도 그러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하며 주의 부르심에 거절했고, 자신의 어눌한 말투를 핑계로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4:10).” 하며 자격을 운운했다.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13).”
바울도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저의 열심이 남들보다 못한 외모와 ‘육체의 가시’라 표현된 장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후에 사울이 바울 되고도 저는 언변이 좋지 않음을 고백하였다.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고후 11:6).” 우리의 열등의식은 하나님이 주신 선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상실해서이다. 하지만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곧 오늘 우리가 열등감으로 느끼는 것들이 곧 주께서 맡기신 아주 특별한 은사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연약함이 도리어 자랑거리가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더는 짐을 짊어지고 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래서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고로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이와 같은 고백이 오늘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받을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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