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사도행전 6:4, 시 31장, 55:22 / 아주 특별한 은혜

전봉석 2019. 10. 11. 13:05

20191013 주일 

사도행전 6:4, 31, 55:22

아주 특별한 은혜

 

 

 

사도행전

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시편

31: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31: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들어가는 말

 

하나님보다 앞서는 모든 것은 위험하다. 구제와 헌신과 기도와 예배도 하나님을 앞서는 순간 우상숭배가 된다. 자기만족이 된다. 그래서 나는 사도의 이와 같은 고백을 사랑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그러나 실제 약한 것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없고 그에 따른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 모든 약함은 고통의 연속이다. 하나님은 무관심한 듯 고통 중의 우리를 내버려두신다. 그런데 시편 31편을 보면 다윗은 전혀 엉뚱한 소리로 찬송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고통 때문에 자신은 손해 본 게 없다는 것이다. 고통 때문에 불행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고통은 유익하였다고 말한다. 어째서일까? 우린 고통을 피하고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도 항상 하나님보다 내가 앞서길 잘한다. 내 건강, 나의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또는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속한 사회 등 항상 그 앞에는 내가 붙는다. 나는 고통 없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러니 오늘 다윗의 고백은 낯설면서도 친숙하고 저의 것이면서도 내 것이 되어야 한다.

 

1. 고통은 우리로 하나님께 피하게 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31:1).

 

다윗은 십대 때부터 사울 왕에게 쫓겨 젊은 날 대부분을 광야에서 힘겨운 날들로 보냈다. 그런 저는 고통의 출처를 명확히 깨달았다. 즉 우리의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고통은 근심으로 인한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9).

고통은 죄악 때문이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10).

고통은 대적들 때문이다.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11).

 

여기서 우리를 괴롭게 하는 대적은 누군가? 남들보다 이웃이다. 가족들이며 곁을 같이 한 친구들이다. 저들로 인해 상처 받고 저들과 싸워 날마다 씨름한다. 정작 대적은 어디 먼 나라 사람들이 아니다. 남의 가정일이 아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보다 앞서는 내 마음, 근심 때문인 것이다. 내 아이가 어찌 될까? 우리 부모가, 형제가 혹시 무슨 일에 처하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영혼을 병들게 하며 급기야 몸을 쇠하게 한다.

 

이러한 고통이 자신을 하나님께로 피하게 하였다는 데서 다윗은 손해본 게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더욱 주를 의지하고 주를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14).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러하여도이다.

 

고통 중에 있을 때 모든 성도들의 공통된 언어가 그러하여도이다. 고통이 아무리 그러하여도그래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그러하여도)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하는 욥의 고백도, 또는 당장 끌려가 죽음 앞에 처할 상황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그러하여도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18).저들의 그러하여도와 다윗의 그러하여도와 우리의 그러하여도는 같다.

 

2. 고통은 우리로 하나님이 쌓아두신 은혜 앞으로 인도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31:19).

 

솔직히 고통이 없었다면 그러하여도의 은혜는 알 길이 없다. C. S. 루이스의 유명한 비유처럼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 누군가의 표현처럼 우리는 고통 없는 지옥에서 산다. 이성복의 <그날>에서 모두는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표현은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나는 일찍이 나병환자의 정착촌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바 있다. 흔히 고통을 못 느끼는 병으로 어느 선교사의 수기에서도 드러난다. 저가 원주민 나환자촌에서 선교하고 있을 때였다. 한 가정에 심방을 갔는데 집안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기이하여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이는 깨진 유리컵에 베이고 잘린 손가락으로 방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낙서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통이 없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만일 우리가 팔이 부러졌을 때 악, 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심줄이 끊어지고 핏줄이 터졌는데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결코 축복이 아니라 더 끔찍한 불행이다. 이제와 감히 말하지만 내 인생에서 나에게 주신 남다른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아주 특별한 주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통이 질그릇 같은 나를 빚어 나의 이야기하나님의 이야기를 담게 하셨다.

 

종종 뉴스에서 보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자란 재벌가의 자제들이 얼마나 안하무인격으로 살아가는지? 고통은 실상 우리에게 악!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돌이켜 주의 참 은혜를 찾아가게 한다. 고통이 주는 아주 특별한 은혜는 다음과 같다.

 

고통은 우리의 영혼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알게 한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7).

고통은 사람들의 꾀에서 벗어나고 다툼을 면하게 한다.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20).

고통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준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21).

고통은 하나님이 응답하심의 증거가 된다.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22).

 

우리는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응답을 체험함으로 오히려 우리의 고통이 응답의 증거임을 안다. 이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가를 알려주며 주의 사랑에 놀라게 한다. 이처럼 주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의 꾀에 휘둘리지 않으며 저들과의 다툼을 피하게 된다. 미움이란 정작 가까운 사람에게 향한 그릇된 사랑이다.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함부로 굴던 나에게 나의 고난을 통해 나의 환난 중에 하나님이 그동안 나의 영혼을 붙들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3.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55:22).

 

그렇다고 아무리 고통이 유익하다 해도 우리는 스스로 고통을 이길 수 없다. 바라지도 않는다. 그럼 이 고통의 유익은 취하되 고통으로부터의 일그러진 형상은 어찌 처리할 수 있을까? 엄연한 사실은 내가 하나님보다 앞설 때 그 잘난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극단적인 선택뿐이라는 것이다. 어긋난 쾌락에 도취되거나 과도한 즐거움에 사로잡히거나, 그 끝의 참혹한 현실은 차마 말로 옮기기도 민망하다. 한데 다윗은 그의 고통의 끝에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8:9).하면서 그 놀라운 비결이 짐을 주께 맡기는 것이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7-40).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12:5).

우리 안에 두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잃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3:11).

 

이는 모든 사람의 특징이다. 하나님을 안 믿는 자들도 소원을 빌고, 도움을 구하느라 고사를 지내고, 신년이 되면 저마다의 신을 찾아 은총을 바란다. 운을 따지고 재수를 운운하고 기운을 신성시하면서 이를 또한 독특한 문화라고 한다. 문화란 혼용된 바람이다.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 17:33).

    

 

나오는 말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6:4).

 

이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무언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62:1).곧 우리가 살아서 오늘 이처럼 주 앞에 나아올 수 있고, 고통으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특별한 은혜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04:13-14).

 

이에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8).참빛은 예수님이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9).저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우리의 아주 특별한 은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잘되고, 하는 일이 잘 풀리는 소원성취 정도가 아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이를 아주 특별한 은혜는 요구하신다. 이를 알게 하는 것이 오늘의 고통이다.

 

피하려고만 하고 없이 하려고만 했던 고통에 대하여, 다윗은 성전에 올라가면서 다음과 같이 찬송하였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131:1).감당 못할 놀라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6:4).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