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9 주일
행 5:33-42, 시 94:17-19
근심이 많을 때
행 5: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5: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5: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5: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5: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5: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5: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시 94:17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94:18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94:19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개역한글 성경)
94:19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우리말 성경)
94:19 내 마음이 복잡할 때 주의 위로가 내 영혼을 기쁘게 합니다.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5장 안에는 참으로 극적인 사건들이 서술되어 있다. 먼저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을 순간 인색하게 여겨 사도들과 하나님을 속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1-11). 그럼에도 교회는 여러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는다(12-16). 그 일로 인하여 사도들이 끌려가고 능욕을 당하고 옥고를 치른다(17-42). 우리는 사도행전 5장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말씀을 다양하게 상고하여 왔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그 모든 일의 증인인 것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다(29-32). 이를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으로 비추어 ‘염려로 인하여’ 우리는 되레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나누었다.
1. 염려는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의 특징이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눅 8:13).”
교회에 어려움이 닥치고 사도들이 끌려가고 옥고를 치르고 능욕을 당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안 믿는 사람과 다를 게 없이 염려와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이를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염려와 재물과 향락 때문이라고 하신다. 향락은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일이다. 좋은 것을 원하고 남부럽지 않은 것을 추구한다. 그러려니 재리의 욕심이 끊일 수 없다. 물질에 대한 욕구는 모든 염려의 화근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이 땅에 살면서 누구도 염려 없이 살 수는 없다. 그런데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곧 우리들로 하여금 여덟 가지의 요구와 유익을 알게 하셨다.
첫째, 염려로 인해 우리는 기도를 선택하게 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하루에도 수만 번씩 염려가 닥쳐오는데, 그럴 때마다 그럼 염려만 하고 있을 것인가? 염려로 인해 수만 번이고 ‘기도와 간구’로 주께 아뢸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둘째, 그래서 기도를 하면 우리의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한다. 너무 멀게 느껴져 감사하지 못했던 것을 가까이 끌어당기는 기도는 망원경이다. 또한 너무 작고 보잘것없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을 크게 확대하여주는 현미경이다. 염려로 인해 기도를 하면 신기하게도 그와 같은 염려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것이 너무 많다.
셋째, 마음에 감사가 회복되면 하나님께 집중하게 된다. 오만가지 근심과 염려로 눌려 정신없이 살던 자신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하게 된다.
넷째,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형용할 수 없는 평강을 누린다. 곧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바울 사도는 이를 확신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다섯째, 우리 안의 평강은 끈기 있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한다. 우리를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도 왜 굳이 찾고, 구하고, 두드리라 하셨냐하면 우리 안의 가시떨기를 걷어내고, 굳어진 마음을 깨뜨리는 전복이 일어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여섯째, 마음의 전복은 밭을 갈아엎는 것과 같아서 비로소 주의 때를 기다리게 한다. 씨를 뿌리고 금세 열매를 맺는 경우는 없다. 다만 우리는 농부의 부지런함처럼 철을 따라 믿고 순종할 뿐이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일곱째, 주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주 앞에서 회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회개가 없으면 희망도 없다.
여덟째, 우리의 회개는 우리로 구원의 증인이 되게 한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성령도 그러하시다.’ 즉 성령으로 감동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러하였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곧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그 응답이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는 날 동안에 그 응답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임을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
2. 우리 안의 가말리엘을 이겨내자.
정작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 안의 ‘가말리엘’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들이 고초를 당하고 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답답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자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 일로 당대의 재판기관인 산헤드린에 끌려가 문초를 당했다. 이때 가말리엘이라 하는 율법교사가 나선다. 저는 존경을 받는 자였다. 저가 공회 중에 일어나 잠깐 사도들을 나가게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여러분이 지금 저 사람들에게 하려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언젠가 드다가 나타나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양 공포하고 다니자 400명이라는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났습니다. 그 사람 뒤에도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인구조사를 할 때 나타나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도모했지만 역시 죽임을 당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경우에 대해서도 내가 한마디 하자면 저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둡시다. 만일 그 목적이나 행동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 사람들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행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 (우리말 성경, 35-39).
매우 설득력 있고 합리적인 주장이다. 교회 밖에 있으면서도 의롭고 성실하여 존경받는 인물들도 많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고, 많은 이의 모범이 되기도 한다. 누구도 저를 죄인이라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그리 여긴다. 우리 안에도 가말리엘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구원자로는 원하고 통치자로는 원하지 않는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위로는 원하고 헌신은 꺼려한다. 그러나 죄란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엉뚱한 데로 날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죄과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역이다. 죄악은 이에 일그러지고 왜곡된 생각과 행위다.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대체한다. 거스르는 것이다. 스스로의 의롭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모든 것은 빗나간 화살 같다. 자신의 신념으로 신앙을 삼은 경우가 우리 속의 가말리엘이다. 저의 근본이 불순종이다.
3. 기도는 회개다.
우리 곁에 가말리엘 같은 사람이 많다. 내 안에도 산다. 저들은 기도를 자신들의 소원과 바람을 추구하는 정도로 여긴다. 결코 자신을 죄인이라고 자각하지 못한다. 자각이 없으면 고백도 없다. 죄에 대한 회개가 없으면 구원은 없다. 후회와 반성이 회개는 아니다. 성경은 이를 일깨우신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하심이 필요하다.
한 가지 예를 보자. 시편 51편은 다윗의 처절한 회개가 담겨있다. 저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성군이었다. 모든 역대 왕들의 표준이 된다. 그런 그가 얼마나 파렴치하고 악랄하고 치졸하였으며 위선적이고 사악했는가를, 철저하게 회개한다. 한때는 ‘그럴 수 있는 일’로 여겼다. 저 안의 가말리엘이 죄를 합리화시켰다. 그러므로 여전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느라 실제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은 저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다.
회개의 첫 걸음은 죄에 대한 자각이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하던 일을 멈추는 데 있다. 자신의 치부와 마주해야 한다. 우리 안의 ‘가말리엘’은 끝까지 합리적인 생각으로 이를 주저하게 한다. 그래서 죄과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역이다. 제멋대로 하려는 욕구다. 자신이 원하고 즐거운 일에 몰두함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게 한다. 그래서 죄악은 별 거 아니라고 여기게 만든다. 왕으로서 한 여성을 그리 취할 수 있다고 여기는 왜곡된 생각이다. 이를 묵인하게 한다.
다윗은 죄를 직면하고 회개였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그런데 좀 의아한 표현이 ‘주께만 범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저는 엄연히 밧세바라는 한 여성을 모욕하였고 강간하였다. 저들 부부의 신의를 깨뜨렸다. 저의 남편 우리야를 의도적으로 살해하였다. 이를 도모하느라 무고한 군사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어 죽게 하였다. 그러고도 마치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평소처럼 일상을 살았다. 그런 저는 이제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하나님께만 범죄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말할 것도 없이 명징한 죄악이기 때문이다. 저가 한 여인을 강간한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다른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에 모욕적인 행위였다. 이를 은폐하고 권력을 동원하여 살인하고 은닉한 것은 마땅히 하나님의 생명질서를 무시하는 죄악이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해주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즉 이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고로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 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저들을 그리 대하고, 그 일을 그리 처리하고, 대처했던 모든 것이 극악무도하였으며 이는 사람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죄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똑같은 죄를 거듭 되풀이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나오는 말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인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게 하는 참 기도를 하게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근심이 있고 염려가 있으면 그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를 ‘우리말 성경’에서 보니, “내 마음이 복잡할 때”라고 하였다. 우리 안에 가말리엘이 알아서 이 모든 일을 수습하려 들 때이다. 합리적으로 타당성 있게, 서로서로 좋게 해결하려고 든다. 그럴 때 “내 속에 생각이 많”다.
먼저는 ①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 양심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마음이다. 양심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여길 때도 있다. 저 혼자 찔리는 양심이 우리를 붙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단련시켜야 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닳고 닳은 양심으로는 찔리지도 않는다. 양심에 찔려 주께 기도할 때, ②믿음이 생긴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피조물은 전적으로 창조주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되 ‘구원자’로 원하고 ‘통치자’로는 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런 우리로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1).”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이시지만 그 전에 나의 임금이시다.
비로소 우리는 ③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 곧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우리 인내의 결실은 그럼 무얼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첫째는 우리 영혼이 강건해야 한다. 우리는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10).” 셋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그러므로 주가 우리를 평안히 인도하신다.
염려가 생겨 생각이 많아졌나? 마음이 복잡한가? 기도하자. 기도하면 감사를 느낀다. 감사로 하나님께 집중하게 된다. 하나님께 집중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얻는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마음의 가시를 뽑아낼 수 있고, 딱딱하게 굳은 돌 같은 마음을 갈아엎을 수 있다. 마음의 전복으로 주의 때를 기다린다. 그러는 동안 우리 안에 회개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증인된 삶을 이루어진다. 그 열매는 영혼을 건강하게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 앞에 더욱 온전한 사람으로 우리를 성장하게 하신다.
그런데 우리 안의 가말리엘은 번번이 이러한 회개의 길을 막고, 기도의 문을 닫아버린다. 자 이제 어쩔 것인가? 염려만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염려를 하면서도 기도를 같이 할 것인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기도를 선택할 때 기도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다.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 하시기로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렘 31:25-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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