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2 주일
행 5:29-32, 빌 4:6-7
우리는 증인이다
행 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5: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5: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들어가는 말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오셨다. 제자 중 하나가 물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저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그리고는 이어서 재미난 예화를 하나 들려주셨다.
하루는 누가 밤중에 벗이 찾아왔다. 그런데 자기 집에는 지금 먹을 것이 없었다. 늦은 시간에 반죽을 하고 떡을 빚기가 곤란하였다. 그래서 옆에 사는 친구에게로 갔다. 그리고 저를 깨워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하고 요청하였다. “내 벗이 여행 중에 왔는데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서 간청하였다. 한데 저도 이미 자려고 누웠는데 일어나서 주려니까 귀찮았다. 집 안에서 친구가 대답하였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지만 문 밖에서 친구가 계속 부탁하였다.
그런 상황을 설명하시고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다시 말하면 귀찮아서라도 주지 않겠냐?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는 일러 말씀하셨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9-10).” 한두 번 구하다 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이셨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1-12).” 이는 누가복음 11장 모두에 담긴 말씀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3).”
간청함을 인하여: 기도함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살면서 염려 없는 삶은 없다. 믿는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이고, 목사고 누구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염려하며 산다. 특히 나 같은 사람은 병적으로 고착되어 불안증이니 공황이니 하는 병명을 안고 산다. 그렇지만 멀쩡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다 저마다 염려와 근심으로 시름하며 산다. 모든 염려의 99%는 일어나지도 않을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게 염려다. 그런데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 하신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그렇다면 말씀처럼 염려 없이 살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린 첫째, 선택해야 한다. 염려만 하고 있을 것인지, 염려가 일어나니까 기도할 것인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하라. 예수님과 같이 한 배에 있으면서도 풍랑으로 인하여 제자들은 염려하였다. 염려가 없는 인생은 없다. 기도를 하면 염려를 이길 수 있고 염려만 하면 기도를 할 수 없다. 수골백번이라도 염려가 일어나면 수골백번이라도 기도를 하면 된다.
기도를 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둘째! 감사를 발견하게 된다.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전히 걱정과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한데 기도를 하면서부터 어느새 감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함께 하신 주님의 은혜가 어떠한지’, ‘이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오늘까지 어떻게 지키시고 보호하셨는지’, 바울 사도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도는 너무 멀게 느껴져서 여태 보지 못했던 감사한 것들을 끌어당겨주는 망원경이다. 기도는 너무 작고 하찮고 대수롭지 여기면서 미처 몰랐던 것들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가를 알려주는 현미경이다. 그러므로 염려가 여전한 가운데서도 감사를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셋째는 염려로 인해 기도를 하였더니 감사를 발견하면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된다. 염려로 인해 기도를 하면서부터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이 항상 우리 곁에 계심을 알게 된다. 너무 번잡스러운 생활에서 놓여나 오만잡것에 정신이 팔려 있던 우리를 하나님과 나만의 골방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눅 12:22).” 기도하지 않으면 먹을 게 지천이고 고대광실에 살아도 염려뿐이다. 보안장치를 하고 경호원을 붙이고 무공해 식품만 먹으면서도 늘 자고 일어나면 걱정이 앞선다. 그러느라 하나님을 잊고 지냈다. 염려로 인한 기도를 하면 우리는 비로소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집중하게 된다. 주님만 신뢰하게 된다.
넷째, 우리 마음에 말도 안 되는 평강이 깃드는 것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여전히 죽겠고, 힘들다. 걱정과 염려로 매일 시달린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부터 알 수 없는 마음의 평강이 우리 안에 깃든다. 나를 잘 아는 친구들로부터 종종 ‘넌 참 팔자 좋다!’ 하는 비아냥거리는 소릴 듣고는 한다. 자신들은 노후 대책에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뼈 빠지게 살아도 시원찮은데, 누구는 팔자 좋게 성경 보고 돈도 안 되는 아이들이나 돌보면서 유유자적하는 것처럼 보이는가보다. 나는 저들이 하는 말에 기분상하지 않는다. 비록 염려가 고착되어 불안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나는 지금 내 안의 평안을 잃고 싶지 않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왜 성경이 그처럼 알려주시는지 이제는 잘 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내 안에 거하심을 누린다. 아는 사람만 아는 놀라운 감사이고 평강이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도 바로 ‘이 일에 증인’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목적이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우리를 골방으로 이끄시는 것은 기도하게 하심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아무리 그래도 ‘기도 반, 염려 반’이다. 신앙이 좋은 사람도 신앙이 부족한 사람도 별 수 없다. 그런데 골방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누구 들으라고, 누가 봐달라고 애쓸 것도 없다. 골방에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그러므로 우리가 염려로 인해 기도를 선택할 때, 기도는 결코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은밀한 시간이고 장소인 사랑의 골방이요, 은총의 골방인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과 나만의 내밀하고 농밀한 장소이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4).” 그러니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이를 엄히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그런데 그렇다면 다 아시면서도 왜 우리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일까?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7).” 다섯째, 이는 그러는 중에 나의 생각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을 전복시킨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우리는 남들에게 보이려고, 또는 의식적으로 기도할 게 아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다시 말하지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예화를 들어, 그 간절함의 끈기를 잃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8).” 그러다보면 여섯째, 주의 때를 기다리게 된다. 모든 게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기도는 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알게 한다.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일곱째, 기도는 회개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설득하려다 내가 설득당하고, 내 요구를 아뢰다가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회개하게 된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늘 강조하지만 회개 없이는 희망도 없다. 자신이 죄인인 것과 그 죄를 감당할 수 없음을 통회하지 않고는 기도도 없다. 기도란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바라는 것은 그동안 내가 높임을 받고, 인정을 받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나오는 말
우리는 이 일에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염려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그 염려로 나는 목사이면서도 안정제를 먹는다. 누구는 미친 듯이 일한다. 누구는 세상을 탐닉하고, 누구는 자기 의를 구함으로 염려를 극복하려 한다. 하지만 염려 없는 인생은 없다. 그래서 세상은 훨씬 합리적인 것 같다. 막연하게 기도하느니, 그 시간에 좋은 친구를 사귀고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을 것 같다. 멋진 여행을 추천하기도 한다. 돈을 모르고, 집을 사고, 인테리어를 새로 하고, 자동차를 바꾸면 좋은 것도 같다. 보험을 들기도 한다. 각자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도록 격려한다. 괜찮아! 다 그럴 수 있어!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툭, 쳐준다. 가족이 제일 큰 위로가 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르신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순종이란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는 일이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구주뿐만이 아니라 통치자이시다.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나의 임금, 나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염려만 하고 있을 것인가, 기도를 할 것인가? 기도를 선택했을 때 평소 잃고 살았던 우리 안에 감사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집중한다. 세상은 줄 수 없는 평강이 우리 안에 깃든다. 우리는 비로소 나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게 된다. 그것의 첫 걸음이 우리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 된다. 기도는 우리로 ‘이 일에 증인’이 되게 하신다. 이 일은 결코 홀로 외로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성령이 우리와 함께 증인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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