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전봉석 2019. 11. 9. 06:45

 

 

이와 같은 직무에 따라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그의 아버지 아론을 도왔으니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더라

대상 24:19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104:33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34).” 이어지는 시편의 찬송이 내 것으로 다가온다. 일일이 열거하여 누구에게 설명한들,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그 맛을 보아 아는 사람의 축복이다. 이번 주간은 부모님이 관상동맥조영술을 시술하면서 그 과정에 주의 집도하심이 어떠하였는지, 그저 가만히 앉아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랍고 감사하기만 하다. 부모님의 사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를 그 직무에 따라 자식들이 준행하는 데 있어 기도로 이어주시는 결과였다. “이와 같은 직무에 따라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그의 아버지 아론을 도왔으니하는 오늘의 말씀이 새삼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하는 오늘 시편의 언사는 놀랍게도 내 것이다.

 

주의 부르심에 대하여 그 방식이 다양했던 것처럼 그 쓰임과 모양도 다양하다. 하지만 동일한 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3).” 한데 그 누구든지는 매우 선별적이어서 아무리 보편화시켜도 아무나 이를 따르지는 않는 것이니,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 믿음이란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이다. 듣지 못하면 어찌 믿겠으며, 믿지 않는데 어찌 부르시겠나? 이를 전파하는 사명이 우리 형제에게 두신 귀한 사역이라면 그 일을 앞서 처절하게 준행하였던 부모의 길은 참으로 귀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5).”

 

가령 아이 하나가 내게 오는 것을 나는 이제 예사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기까지 온갖 파장이 저를 흔들어댔고 그에 따른 파문이 저의 영혼을 짓눌렀다. 이를 몸으로 견디다 더는 그 영혼이 감당이 안 되는 때에 손목을 긋고 우울감에 시달리고 공황이 오고 극심한 강박이나 불안에 사로잡히는 일이었다. 저들로서는 속수무책이라. 열에 아홉은 항변하기를 내가 왜?’ 하는 의문으로 분노한다. 하필 왜 나야? 하는 투의 불만은 그 총구를 부모에게 겨누거나 가까운 이로부터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서로 친절한 타인으로 살아가는가! 우리 애가 그럴 애가 아니에요, 그 애를 믿어요? 하는 식의 말이 아이엄마 입에서 터져 나올 때의 난감함이라니! 하긴 늘 곁에서 지켜본 타인의 입장에서 그러는 꼴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테니까. ‘걔 그거 다 연기예요. 거짓말 잘 해요. 다들 속아요.’ 아이엄마의 말치고는 참으로 가관이다.

 

나는 이 모든 게 주를 찾는 여정의 하나로 본다. 그러저러한 사연들이 뒤엉겨 결국은 나에게까지 왔다. 이를 귀띔이랍시고 하는 엄마의 말들은 그 어떤 이의 말보다 무책임하고 무섭다. 그렇듯 누굴 통해서 또는 질병으로, 실패와 좌절로, 죽음을 지켜보다 불현듯 주의 부르심은 나 같은 미물만도 못한 이에게까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모두는 다 자기 짐을 진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6:5).” 나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할 때 가만히 주의 이름을 되뇐다. 가령 토요일마다 성경공부로 오는 친구가 오후가 다 돼 카톡을 했다. 유난히 술 생각이 난다면서 말줄임표를 길게 이었다. 다음 말이 어떤 것인지, 무슨 일로 그러한지, 그러니 어쩌면 좋은지, 나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의 외마디는 이런!’ 하고 감탄사 같은 탄식이 터져 이를 그냥 보냈다. 어쩌겠나?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이는 누가 대신 져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다른 더 좋은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를 알 때 세상이나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못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6).” 그 실체는 참혹할 뿐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17).” 솔직히 왜들 저렇게 힘에 겨워 사는가하면 그게 다 세상을 사랑함이었다. 좋은데 어쩔 것이며, 좋으니 별 수 없는 일이어서 이는 다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때문이다. 싫든 좋든 이게 사실이고 이를 어찌 감당이 안 되니까 저마다 쩔쩔매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다. 손에 쥔 걸 놓으면 되는데 움켜쥔 손을 풀지 못하고 이내 덫에 걸려 발버둥치는, ‘원숭이 사냥과 같은 것 같다. 뭐라 말을 더할까? 성경구절이라도 하나 적어서 보낼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토요일마다 같이 하는 말씀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모처럼 컨디션이 좋아서 오후에는 아이와 탁구를 쳤다. 고만고만한 실력들이지만 나름 치열하게 경기를 하면서, 모처럼 아이는 깔깔거리며 웃었고 나는 저의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참으로 꽃다운 나이의 청순 발랄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시든 이파리처럼 축 늘어져 있고 잠을 못 이겨 하루 종일 졸려 하는지 모르겠다. 오늘을 살며 허물과 죄로 죽은증상은 무기력이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주께서 살리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 이는 그 부모의 무기력이 낳은 결과이고 자식이랍시고 우상 떠받들 듯 애지중지하나 그저 세상 풍조를 따름이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아이엄마는 스스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항변한다. 내가 보기에는 가장 골칫거리다. 자기도 안 하면서 가족들도 못하게 하는, 매우 악의적인 요소다.

 

가령 지난 주일부터 사촌동생 때문에도 교회에를 같이 나간다는데 그 먼 곳을 자식 때문에 바라다는 주면서 자기는 교회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시간동안 차 안에 있거나 커피숍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 조카아이 생각을 해서도 그럼 같이 오겠니? 하고 아이에게 말했을 때 이를 반대한 것도 그 애 엄마다.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한 소리지만 실제는 더 깊이 연관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는 내가 어쩔 것인가? 따로 전화라도 해서 뭐라 좀 말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여기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땅이다. 달을 숭배하고 자신을 숭상하는, 이 시대의 메소보다미아. 아브라함을 그것에서 떠나라 하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하나님이 저를 붙드시고 돌이켜 주의 길 가게 하시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어림없는 일이다. 이렇듯 나는 종종 무엇을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더 어렵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오래도록 시달린다. 그러든가 말든가 하고 내버려두면 될 마음인데, 아이의 웃음소리에 나는 마음이 아픈 것이다. 저토록 한참 밝고 명랑해야 할 나이에!

 

가만히 보면 아이가 철딱서니 없는 게 아니라 다들 그 부모가 철들이 들지 않아서이다. 애들이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어른들이 문제다. 그래놓고는 붙들어 앉혀놓고 감 놔라 배 놔라, 저들 참견에 넌더리가 난 아이는 달팽이처럼 스스로 자기 몸속에 감겨버리는 것이다. 부모들이란 등 굽은 보리새우 같아서 자기 등살도 펴지 못하는 주제에 어쩜 그리고 촉수를 길게 늘어뜨리고 아이들 일에 참견을 일삼는 것인지! 며칠 전 공부방으로 오는 중2 아이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낮부터 술에 취한 아빠가 이혼을 통보하고 너는 어느 쪽이냐고 손찌검을 하고 윽박지른 모양이었다. 알고 보니 철딱서니 없는 엄마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핸드폰도 식탁에 두고는 잠적을 한 것인데, 아이는 쌍욕을 해대며 그게 다 쇼였다고 하면서 확 죽어버리고 싶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오전에 오는 스물세 살 아이는 혹시 아빠랑 연락은 하셨는지, 또 물었다. 나는 어찌해야하나 여전히 기도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내가 연락을 한들, 그래서 만난들, 과연 뭐라 하겠으며 또 그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당한 아이엄마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겠나? 그렇다고 이를 먼저 아이엄마에게 말할 수도 없는 일이고그때 아이가 한 마디 하였다. 엄마는 원래 그래요! 뭘 해도 그럴 거라는 아이의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엄마밖에 없다. 천사이면서 동시에 악마 같은, 나는 아이들의 엄마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대꾸도 하기가 싫다. 저들도 다 목마름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일 텐데, 우리는 타는 목마름은 해갈할 방도가 하나밖에 없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이는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사는 일이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생각이 많아서인지 갑자기 어떤 불안이 엄습하여 가슴은 답답하고 숨고르기도 어려워서 뒤늦게 안정제를 한 알 더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았다. 나의 하나님은 오묘하시다.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104:4-5).” 이 모두는 주가 가장 선하게 이루시는 일이다. 나는 다만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족한 것이다. 형체도 모양도 없이 누구의 갈채도 존중도 없다 해도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10-12).” 주의 쓰임에 합당한 자로 사는 일이 얼마나 고귀한가? 나는 여호와의 물 댄 동산의 나무 같아서,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16).” 그러므로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58:11).”

 

그러므로 나의 더러웠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기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7:3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