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전봉석 2019. 11. 8. 07:03

 

 

아침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대상 23:30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편 103:8

 

 

다윗은 앞서 신정국가로서의 성전 건축할 일과 그 일에 시중들 레위 지파의 역할을 다시금 정렬하고 있다. 저들의 역할은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사명도 이에 다를 게 없다. 아이와 요한복음을 지나 성경을 한 장씩 소리 내어 읽고 이를 글씨로 옮겨 적으며, 시편을 묵상한 것도 어느덧 150장을 마쳤다. 이를 축하하고 점심을 사주었다. 읽고 쓰는 일이 아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은 때의 나와의 싸움이라니! 어쩌면 우리의 전쟁은 회의하고 갈등하는 일이다.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싶을 때, 나를 붙들어주시는 것은 아침저녁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하는 시간이다. 때론 의무적으로도 한다. 이것마저 잃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할 때도 있다. “아침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송하며(대상 23:30).” 내 안에 두시는 말씀으로 새 힘을 얻는 것이다.

 

일련의 상황을 두고 주의 손길과 그의 돌보심을 맛보았다. 그때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103:8).” 하는 말씀을 어찌 말로다 남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산다는 일은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아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는 하나님을 보고 사는 일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5:6).” 이를 설교원고 서두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하는 말씀으로 갈피를 잡았다. 청결함이란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자꾸 치우고 또 닦는 일이다. 가령 나에게 두시는 한 날 한 날이 매일 그 날이 그 날 같을 때 이는 뭔가 조짐이 안 좋다. 결코 그 날이 그 날인 날은 없다. 날마다 새롭다. 똑같은 아이인데도 저 아이와의 시간이 새롭다. 다 저녁에 열여섯 살 아이가 불쑥 왔다. 분명히 지난 화요일 나는 아이의 글을 봐줄 수 없다고 정중히거절한 상태였다. 주일 예배가 몇 시에요? 그럼 몇 시까지 오면 돼요? 나는 아이의 말이 의아했으나 손을 내밀고 악수했다.

 

이를 그저 그러려니 하고 여기면 더는 할 말이 없다. 또는 글을 봐주고 그것으로 대학을 가려는 나름의 꿍꿍이가 있어서 그렇다 해도 말이다. 내가 그만한 능력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예수님 앞에 나온 수많은 무리들의 동기를 나는 이해한다. 병 낫기를 바랐고, 배고픔을 모면하고 싶어서였으며, 압제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도모하며 열심을 다한 이도 있었다. 어떠하든 주님은 저들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이내 저들 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새 사람이 되었다. 나는 아이의 의도를 불순하게 보지 않는다. 그렇게 예배에 왔다가 나름의 목적을 달성하고 교회를 떠나간 아이들에 대해서도, 이제는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구한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103:8).” 이는 맛보아 아는 일이지 설명이나 설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 의미 없이 성경을 글씨로 옮겨 쓰고, 읽은 내용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또는 자신의 기도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횡설수설하는 아이에 대하여도주는 긍휼하시고 자비하시다. 그 증거는 나 같은 이가 오늘 이처럼 저 아이들을 안타까워할 줄 알고 뭐라 위로할 말을 구하고 찾아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주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아침에 묵상글을 다시 읽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울컥, 이는 어떤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5:4).” 나는 이 위로를 저 아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을 따름이다. 아이는 멋쩍은지 주일 날 예배 시간만 묻고 서둘러 돌아갔다. 나는 아이를 돌려세워 빵을 주고 음료를 주고 어깨를 토닥거리고 돌려보냈다.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그 어떤 경우로도 우리의 목마름은 해갈될 수 없다. 마침 두 시에 오는 열아홉 살 아이는 공동으로 글을 작업하는 데는 사양을 했다. 한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덜었다. 이는 전날에 너무 센 강도로 자기 이야기를 써놓은 상태라, 이것으로도 한 걸음 떼는 데는 충분하였다. 잘했다, 용기를 내서 고맙다, 애썼다. 나는 아이의 글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다만 그러한 내용을 가감 없이 써 준 그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전날에 말해주기를 그건 마치 종기 같은 것이다. 가벼운 뾰루지 같다. 조금 성나고 영글면 고통이 엄청나다. 그런데 대부분 건드리지 않으면 살 것 같으니까 그냥 둔다. 그럼 또 대부분은 자연치유가 된다. 그런데 고름이 잔뜩 꼈다. 건드리지도 못하겠고 그 주변으로도 욱신거리고 아프다. 아픔은 신호 같다. 째고 짜내야 한다. 이를 방치하면 더 큰 화를 초래한다. 이를 가장 무난하게 짜낼 수 있는 게 글쓰기와 동조다. 같이 읽고 지지와 호소를 동시에 받는 일이다. 한 번 글로 기워낸 고름덩이 같은 내 안의 응어리진 이야기는 짜낸 고름처럼 더럽고 추하지만 더는 내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을 여실히 보여주신 일이다. 이런저런 나의 허접한 고백이 저에게 위로가 되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얼까? 그 뜻을 다해 사는 일이다. 이는 예수를 닮는 일이다. 예수께서도 예수를 보내신 이의 뜻과 그 교훈을 따르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7:16).”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으로 사는 일이란 참으로 생경하고 색다르다. 이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 기도하셨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14:36).” 누구보다 친밀하고 친근하며 신뢰하고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기도이다. 내가 저 아이들을 대할 때, 때론 내 생각이 또는 여러 추측과 계획이 앞서지만, ‘내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란 이 비극적인 현실에서의 구원이다. 육의 구원은 물론 영혼의 구원이다. 오죽하니 아이가 손목을 긋고 정신과 약을 있는 대로 다 털어 넣었겠나? 또 오죽하니 아이가 커밍아웃을 하고 자신은 동성을 사랑하고 그리 구애한다는 말을 하였을까? 구원밖에는 길이 없다. 구원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바라며 의지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내가 저를 구원하거나 믿게 할 수는 없어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하는 통로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리할 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이를 맛보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사람을 바라지도 않는다.

 

이는 또한 은혜를 갈구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이제 나의 하루는 전날과 같은 하루는 없다. 흐렸다 개였다, 좋았다 나빴다,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요동치는 마음을 들고도 주의 이름을 바라는 일이란! 언제 또 저 아이가 달려와서 주일 날 예배 시간을 묻고 교회에 나올 것인지, 나는 전혀 모른다. 다만 그때까지의 나의 자세를 온전하게 하는 일이다. 마음이 청결함이란 그런 것으로 그러할 때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42:1-2).”

 

누구는 이런 그리스도인을 즐거운 거지라고 비유하였다. 오늘 나의 구걸은 정당하며 온전하고 대담하며 떳떳하다. 나의 아빠 아버지 하나님에게 구하는 일이다. 나는 다음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저 애가 저러다말지, 주를 모시고 주와 함께 살지, 어그러져 그릇된 길로 갈지, 또는 주께 돌아와 주의 이름을 송축하게 될지다만 그때마다의 나의 자세를 염려하는 것뿐이다. 내가 주 앞에 온전하기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103:1-2).” 내가 아는 주는,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8).” 그것은,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4).” 하찮은 나의 나 됨으로도 주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그러므로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