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대하 20:15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시편 129:3
아람이 모압과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할 때 유다의 여호사밧이 주를 의뢰하며 금식하고 기도하여 주의 도우심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러나 후에 이스라엘의 아하시야와 어울리며 악을 도모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는 내용이다. 오늘 말씀에서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하는 내용이 눈에 띈다. 공연히 이래저래 마음을 많이 쓰고 지내는 터에 이 일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는 데 위로가 크다. 암몬이나 모압과의 전쟁은 본래 하나님이 금하셨다.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신 2:4, 5, 9, 19 참고).” 그들에게는 얻을 기업이 없다. 저들은 에서의 후손들이고 롯의 후손들이다. 약속의 땅은 오직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뿐이다. 이를 다만 주가 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시 129:4).”
우리의 괴로움도 한 날의 수고로 족하다. 아이가 하고 안 하고, 오고 안 오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어찌 가늠할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주 앞에 선다.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대하 20:13).” 주는 우리를 돕는 이시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나에게 오늘 이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다만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34).” 다른 묘책은 없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한 영혼을 돌본다는 일은 참으로 진이 빠지는 일이다.
맥락이 닿지 않는 아이의 말에 답하고 듣고 같이 한다는 게 때론 지친다. 뭐라 한들, 하려고 하는 의지가 전혀 없는 아이를 붙들고 어르고 달래며 마치 꼬인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 같은 일은 지겨울 때도 있다. 늘 우울하고 무거운 아이의 그늘로 인해 덩달아 침울해지기 일쑤인데 뭐라 이르면 엉뚱한 소리로 자기를 변호하는 아이와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며 지내는 일이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누가 직장을 그만두는 문제로 하나부터 열까지 묻고 또 묻고 할 때의 답답하고 속상한 가운데서 주님은 말씀으로 나를 찾아오신다. 업신여김을 받지 마라!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누구에게 들려주던 말이 도리어 나에게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되는 것을 느꼈다. 업신여김을 받을 때가 언제인가? 혹시나 하고, 눈치보고, 괜히 더 그 곁에 빌붙어 있으려 할 때가 아닌가?
그게 직장 문제로 당장의 돈벌이와 관계가 되든지… 고질적인 우울감으로 고착된 자기연민이든지… 나태와 게으름으로 점철된 어린 영혼의 방종한 생활이든지… 병적으로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삶이든지… 나는 일일이 누가 어떻고, 무슨 일로 그러한지 분석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다만 현상이다. 드러나는 문제다. 닥친 과제이다. 어쩌겠나? 이 모두는 하나님과의 문제다. 다만 오늘 나에게 두신 일이라니! 결국은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오늘의 말씀 앞에서 되레 안도한다. 그리고 달리 바라보게 된다.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권면하고 책망하자! 이것을 말하자.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기 위해 더욱 굴복한다. 굽실거리며 무마하려 든다. 스스로 두둔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신을 항변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스스로는 모멸감이 들고 상대는 더욱 더 업신여길 따름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생각으로는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으나 번번이 패하는 까닭은 죄에 굴종하는 본성 때문이다.
그럼 어찌 해야 할까? 먼저는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기다리는 일이 우선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기다림이란 막연하게 주저앉아 마냥 그리 체념을 다하는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야 한다. 내가 믿는 것 같지만 이 믿음은 엄연하게도 거룩하신 이의 선물이다. 둘째, 기도를 해야 하는데, 성령으로 해야 한다. 내 기도란 그때마다 어찌나 세상적이고 육적이고 당장의 것들만 바라는 면피적인 것뿐인지! 그러나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자꾸 의외의 것을 구한다. 단적으로 내가 저 아이를 위해, 그 지긋지긋한 행실을 두고, 내 안에 이는 어떤 안타까움으로 아뢰고 구하는 일이다. 셋째, 이를 지탱하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데 있다. 나는 아이에게 고백하기를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내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를 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고백을 하였다. 넷째는 그러할 때 이와 같은 기다림은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놀라운 소망을 더한다. 단지 당면한 오늘의 문제가 그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들로부터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으로부터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의 업신여김은 열등감, 자존심 상함, 모멸감, 피해의식, 자기연민 등으로 나타나서 우리 안에 깊이 박힌 죄의 원뿌리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졌다고 여겼을 때 사람은 결국 자신의 수치심으로 그늘에 숨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말씀은 내게 말씀하신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22).” 힘에 겨워 지치다가도 저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저처럼 무방비상태로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일이겠으니, 하물며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모멸감에 대해서는 얼마나 공격적이고 방어적으로 대처하고는 하는지…!
그럼 어찌 대처해야 할까? 무엇을 이르고 권면해야 할까?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것을 알려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딛 2:11).” 그 증거는 이것이다. 첫째, 주가 우리를 양육하신다. 둘째, 그러므로 경건하지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을 버리게 하신다. 셋째, 한없이 가벼워지는 세상에서 신중하게 하신다. 넷째, 의롭게 하신다. 다섯째, 경건함으로 살게 하신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12).” 이를 위해 우리에게 두시는 것이 있다. 첫째, 우리 안에 복스러운 소망이다. ‘헬조선’을 부르짖는 시대에도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둘째,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다리게 하신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이는 막연하게 그럴 것이라는 게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먼저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속량하셨다. 다음은 선한 일을 하는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4).” 내가 무얼 도모하고 그 열심으로 얻어진 게 아니라,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때는 나도 어둠이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5:8).” 더는 아니다. 빛의 자녀로 행하게 하신다. 그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에게 스스로 업신여김을 당하고 심지어는 세상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사는 삶에 대하여, 우리는 이것을 말해주고 권면하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권위로 책망하고 다스려서 누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5).”
이처럼 아이들과 같이 있으면서 때론 고달프고 힘에 겨워 내가 지레 죽겠다고 엄살을 부릴 때면 어김없이 말씀으로 나를 붙드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를 살리셨고,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행 5:30).” 이내 우리를 살리신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주께서 살리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죽은 자 같은 삶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저마다 업신여김을 당하면서, 아이의 표현대로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열패감으로 자기 환멸에 빠져 헤어날 수가 없다. 무기력한 것을 알면서도 무기력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만사가 귀찮은 아이에게 뭐라 백날 떠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가끔은 아주 가끔은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를 바란다. 저주가 아니라, 그래야 좀 꿈쩍이라도 할 영혼에 대하여, 나는 저들의 상한 심령이 안타까운데 뭘 어찌 할 길이 없어 속만 끓인다. 가령 다 늦게 아이가 왔다. 글도 쓰지 않았다. 시험 때라 당분간 쉬겠다는 통보였다. 주일은 안 된다고 선언했다. 시험공부 핑계를 대지만 그 한두 시간을 뭐 그리 대단히 할 것도 아니면서 그리 엄살을 부렸다. 안 된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와라! 같이 예배드리자. 나는 물러서지 않았고, 아니면 감당이 안 된다고 고백하였다. 서로에게 향한 말이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그냥 늘 두 마음이 싸운다. 그렇게 그만두길 바라는 마음과 그럼에도 마주하고 긍휼히 대해야 하는 마음이 맞선다. 그래서도 나는 오늘 말씀을 붙들고 의지할 뿐이다.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하나님이 행하실 것을 의지하며, 비록 오늘의 모든 일이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하는 것처럼 괴로울 따름이나,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시 129:4).” 곧 우리를 업신여기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주께서 우리를 양육하시고,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우리로 자기의 선한 일을 열심히 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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