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대하 21:7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편 130:5
친구가 전화를 했다. 성경을 사려고 하는데 무엇이 좋을지 물었다. 어디 외근 나가는 길에 전화도 한 거였다. 기특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저는 조심스럽게 또 물었다. 너는 왜 열심히 믿고 신앙도 좋은 것 같은데, 사는 게 나아지지 않고 아픈 게 낫지 않느냐며 궁금해 하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고 아주 좋은 질문을 했다며 꽤 길게 통화를 하였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강함이 나타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우리가 이런 대화를 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웠다. 목사가 되고 같이 어울리지 않는 동안 서로는 할 말도 잃었었다. 그런데 우여곡절을 더하시더니 드디어 친구도 주 앞에 부르심이다.
‘사랑은 덕을 세운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말씀으로 말씀을 이해하고 더하시는 게 놀라웠다. 우리는 얼마나 우상을 섬기듯 하나님을 바라고 믿고 의지하려 하는지. 때론 그저 있는 그대로 살아내는 것으로도 족하다. 그러할 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10:23).” 특히 가까운 친구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없는 시간이 유익하기도 하였다. 돌이켜 주가 다시 세우셨을 때,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14:25).” 이 또한 내가 하는 게 아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그저 삶으로 살아서 주를 드러내는 것으로 덕이었다. 그러다 이와 같이 주께서 변화시키고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말이 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토요일에 오는 친구는 회사를 떠나려고 하다 참고 견뎌내기로 하였다. 나는 듣기만 하였고 저의 결정에 대해 말씀에 따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그리 마음을 주시고 그처럼 인도하시는 이가 말씀 위에 말씀을 더하셨다. 내가 무얼 어찌 하려던 게 아니다. 그리 되어지는 일들 앞에서 오히려 나는 속수무책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저는 감사하게도 말씀을 따랐고 주를 의지하려 하였다. 이를 저녁에 가정예배로 드리면서 말씀에서 알았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고전 8:3).”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말씀 준비만 한다. 설교 원고 하나를 작성하기 위해 여러 날을 더듬는다. 아침마다 묵상 글을 쓰기 위해 여러 장의 메모를 준비한다. 한 날의 이야기에는 온통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다시는 안 올 것처럼 굴던 아이가 카페에 글을 올렸다. 고맙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한 두 마음이 동시에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 늘 나의 최종 결론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던히 갈 길을 마치기까지 나아가는 것뿐이다.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출 18:20).” 그리고 행할 따름이다.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삿 18:14).” 이 모든 한 날 한 날이 성일이 되었다.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느 8:11).” 이를 가르칠 따름이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모처럼 오전에만 아이가 오고 하루 종일 혼자 있던 날이다. 마음은 평온하였고 몸은 나른하였다. 모처럼 친구와의 긴 통화와 토요일에 오는 친구의 회사 일로 전화를 한 게 전부였다. 전에 누가 반가운 듯 연락을 하였으나 새삼스러웠고, 누가 딸아이 결혼식을 한다며 보내온 카톡을 보고도 시큰둥하였다. 마치 최대한의 에너지를 비축하려는 듯 굳이 관여할 일 아닌 데에는 마음을 거두었다. 내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스스로 자부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20:6, 9).” 그저 오늘에 맡기신 한 날의 수고로 족할 따름이다.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7).” 아이와 잠언을 읽으며 메모하였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온전하게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행하는 일보다 무엇을 주의하는 데 더 신중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롬 13:13).” 친구에게 보여지는 나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 나는 주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데 소용되어야 한다. 곧 우리는 감출 수 없는 삶을 산다.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잠 20:11).” 이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우리의 생활이기도 하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먼저는 소금으로 소금은 그 맛을 감출 수 없다. 또한 다음은 빛으로 빛은 그 빛을 숨길 수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결국 우리는 불 켜진 산 위의 동네와 같다(마 5:13-15).
소금은 그 맛으로 인상을 찌푸리게 하고 절여서 순을 죽이며 미연에 부패를 방지하지만 그래서 거절을 당하기도 한다. 빛은 좋은데 날벌레가 끼어들게 되어 있고, 불 켜진 동네에는 언제든 어중이떠중이가 드나들 수 있다. 온전하게 산다는 일은 그처럼 고상하고 우아하지만은 않다. 찌들고 번잡스러워 혼란할 때도 있다. 나는 가만히 의자에 누워 누구를 생각하다 깜빡 졸기도 하면서 한두 시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쉼을 가졌다.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피식, 웃음이 났다. 친구와의 통화에서 어느덧 일어나 앉아 여러 말로 설명하고 있는 내가 황당하였다. ‘그런 말’을 하고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하는 우리 사이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풋, 웃으며 우리가 이런 말을 이처럼 길게 진지하게 나누게 되었구나? 하고 친구에게 말하며 격려하였다. 저녁께 퇴근하면서 불미스러운 일로 회사를 그만두려 했던 친구가 어제와 달리 참아보려고 한다는 말을 할 때 그 또한 주를 위하여!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럼에도 주를 거역하는 자들의 특징이 있었으니 저들과의 대화는 항상 모래를 한 입 씹어대는 느낌이다.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잠 20:17).” 왜냐하면 그 소재가 한탕거리로 즐거움을 찾기 때문이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19).” 그러니 저들을 상대하기란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26:22).” 그래서 새삼 누구의 반가운 안부가 시답잖았고 어떤 소식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 늘 주 앞에 산다는 일은 모든 게 좋다 좋다하는 게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충동적이고,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잠 20:21).” 한결같지 않은 마음과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23).” 함부로 맹세하는 일은,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25).” 모두 헛되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주께서 그때마다 시의적절하게 다루시고, 말을 넣으시고, 침묵하게 하시고, 외면할 것은 외면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누구의 말을 들을 때도 또는 저의 마음을 어르는 일에서도, 그저 나는 내 마음의 등불을 따를 뿐이다.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잠 24:7).”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말씀을 먹어야 한다.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13).” 연습이 필요하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20:30).” 그리하여 눈을 떠야 한다.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13).” 우리에게는 생각하기가 중요하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시 94:8).” 나는 누구와 대화할 때 종종 나의 치부를 가감없이 드러내며 나처럼 어리석은 데로 휩쓸리지 않기를 바란다.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5:6).”
전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은 나의 형편과 여전히 병약하여 약에 의존하는 나를 나의 어린신앙의 친구는 이상했던 모양이다. 왜 너는 나아지지 않냐? 하고 물을 때 나는 기꺼이 말해주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또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그러하여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우리의 온전함이란 이처럼 아이러니하고 기이한 것이어서 믿음이 없이는 알 수 없고 받을 수 없고 관심도 없다.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그처럼 자신의 말씀을 준행하신다는 데 새삼 확신을 갖게 된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대하 21:7).” 말씀 때문에도 말씀으로 나를 인도하실 것을 붙드는 것이 나의 오늘의 온전함이었다.
그러므로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시 13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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